2013년 12월호

전통에 눌리고 정치에 밟히고…

만신창이 숭례문 복원사업

  •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3-11-21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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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을 위한 문화재 복원…참담한 결말
    • 공짜로 하겠다 내놓고 공사비 올려달라며 태업
    • 한겨울에 난로 켜놓고 한 단청 공사
    • 전통의 해석은 ‘그때그때 달라요’
    • 匠人과 문화재청의 야합…국고가 샌다
    전통에 눌리고 정치에 밟히고…

    1 복원식 직후부터 단청이 벗겨져 떨어지는 현상이 발견된 숭례문. 2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불타 무너지는 숭례문.

    백화가 만발한 지난 5월 4일, 문화재청은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해 숭례문 복구 준공식을 열었다. 옥색 저고리에 푸른 치마 차림의 박 대통령은 취임식 때보다 더 환한미소를 지으며 “대한민국의 얼굴인 숭례문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감격의 순간을 국민과 함께 맞게 돼 기쁘다”며 “숭례문의 부활로 우리 민족의 긍지를 되살리고 새로운 희망의 문, 새 시대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축사를 했다.

    그리고 여름 한 철을 지내고 가을을 맞은 지난 10월 숭례문이 ‘앓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숭례문의 서까래를 빛내주는 단청이 벗겨져 떨어지더니(박락·剝落), 기와가 변색됐다고 하고, 누각 기둥이 갈라져 터져나갔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숭례문 부실 복구는 물론 문화재 행정 전반을 철저히 조사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라고 지시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사색이 됐고, 국민은 숭례문이 불탔을 때만큼이나 속이 타들어갔다.

    숭례문이 일찍 앓아눕는 바람에 더 큰 낭패를 피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올 연말 정부는 복원에 참여한 이들에게 훈·포장을 줄 예정이었다. 대상자 선발과 공적 조사를 마친 상태에서 부실 복원의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훈·포장 수여 후 이 사태를 맞았다면 더 큰 소동이 일었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의 문화재 관리·운영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국민과 정부는 문화재를 중시해야 한다는 ‘원칙’만 알았지, 그 원칙을 지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여기에 ‘문화재 정치학’도 개입했다.

    숭례문 부실 복원은 한마디로 ‘전통대로’와 ‘잘해보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화재 발생 3개월 뒤인 2008년 5월 문화재청이 ‘숭례문 복구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중요무형문화재 등 기술자들이 참여해 전통기법과 도구를 사용해 복원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 화근이었다. 전통대로 한다고 해서 꼭 ‘잘하는 것’은 아닌데, ‘잘하는 것’으로 꾸민 것이 문제였다.



    처음 문제가 된 단청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단청공들은 전통 안료와 아교를 사용했다. 아교는 단청색을 붙여주는 기능을 한다. 전통안료가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안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화학안료를 만들어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도 화학안료 써

    전통에 눌리고 정치에 밟히고…

    5월 4일 숭례문 복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그는 문화재 행정 경험이 적은 변영섭 교수를 문화재청장에 ‘전격적으로’ 지명했다가 ‘전격적으로’ 경질했다.

    숭례문에서는 서까래 끝에 그린 장단색(핑크빛에 가깝다) 단청이 주로 떨어졌는데, 이 색을 만들려면 유황과 녹인 납을 섞어야 한다. 우리 선조는 오래전부터 이 방식으로 장단색을 만들어 썼는데, 이는 화학식으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화학안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이전에 쓰던 것을 전통안료라고 일컫는다.

    화학식으로 정리된 본격적인 화학안료는 1885년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색깔이 좋고 오래갔기에 이 안료는 곧장 세계로 퍼져나갔다. 1901년 조선은 덕수궁 중화전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때 서양의 화학안료로 추정되는 ‘양록’과 ‘양청’을 구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몇 년 후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됐고 이후 화학안료가 빠르게 보급됐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 문화재 보수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전통안료가 어떻게 단절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의 문화재 정책은 1971년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을 우연히 발굴하면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민족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신라의 능을 발굴하고 문화재를 적극 복원했다. 이 바람에 단청장(匠)을 비롯한 문화재 기술자들이 바빠졌다. 그 무렵 국내 최고의 단청공으로 활약한 이가 2006년 세속 나이 94세로 입적한 태고종의 만봉 스님이었다. 스님은 단청보다는 불화(탱화)에 더 능했는데, 1971년 정부는 스님을 중요무형문화재 48호로 지정했다.

    숭례문 단청 작업을 한 홍창원 씨는 15세이던 1970년 만봉 스님 밑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배웠다. 그는 “스님의 뒤를 이어 인간문화재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은 없었고, 그저 입에 풀칠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따라다녔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시멘트를 써서 석조 문화재를 복원하던 시절이라 누구도 전통 안료를 찾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색을 내고 그 색이 오랫동안 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나무에 단청을 붙이기 위해 아교를 썼는데, 그 모양이 길어서 ‘막대아교’라 했다. 막대아교로 붙인 단청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방법을 찾게 했다. 그리하여 막대아교 대신 합성수지로 화학안료를 붙이는 방법이 개발돼(1972년), 그것이 정부 표준 시방서에 올랐다. 이후 ‘합성수지+화학안료’ 단청이 대세가 됐다. 만봉 스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1973년 숭례문 단청을 했고, 1988년에는 그의 제자인 김형주 씨가 다시 숭례문 단청을 했다.

    홍창원 씨는 1986년 스님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복원을 중요무형문화재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문화재 복원과 중수는 기술자가 소속된 업체에 의뢰한다. 1988년 홍창원 씨가 속한 업체는 서울 낙성대 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해 숭례문 보수는 김형주 씨가 속한 업체가 맡게 됐다.

    인프라 없이 ‘일본의 길’로

    전통에 눌리고 정치에 밟히고…

    숭례문 2층 누각의 추녀 끝 지붕판에 그려진 핑크빛(장단색) 단청이 떨어져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숭례문 복원을 앞두고 이런 관례를 깼다. 중요무형문화재 등 최고의 장인을 모아 복원한다고 선언하면서 홍 씨를 ‘징발’했다. 문화재청은 복원공사를 명헌건설에 맡기고, 홍 씨를 비롯해 다른 회사에 소속된 최고 수준의 장인들을 이 회사로 옮겨오게 했다. 그때만 해도 이것은 ‘영예로운’ 동원 이었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홍 씨에게 천연안료로 단청을 하라고 주문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가 “국내에는 천연안료 전통이 끊어진 지 오래”라고 난색을 표하자 문화재청은 일본의 예를 알아보라고 했다. 우리보다 목조건물이 훨씬 많은 일본에서는 단청을 두 가지로 한다. 문화재가 아닌 일반 신사(神社)나 사찰의 단청에는 무슨 안료를 쓰든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보나 보물처럼 나라가 관리하는 목조건물에는 반드시 돌가루를 넣어 색을 내는(石彩) 천연안료로 단청을 하게 한다.

    일본에서도 국보나 보물급 단청 공사는 발주가 적기 때문에 정부는 전통안료 단청의 경우 높은 공임을 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제한해놓는다. ‘이너서클’을 만들어 자부심을 갖게 하고, 그들이 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단청장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은 선택을 한다. 실력이 달리면 일감이 많은 화학안료 쪽으로 가고, 자신 있으면 천연안료에 도전한다. 덕분에 일본에서는 천연안료 제작술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장단색의 예에서 보듯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이미 합성(화학)안료를 만들어 썼다.

    우리의 문화재 보수 복원 기술은 대부분 일본에서 배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오사카에는 593년 준공됐다는 시텐노지(四天王寺)라는 절이 있다. 일본은 백제 기술자 3명을 불러 이 절을 짓게 했다는데, 그중 한 명이 유중광(일본명 시게미쓰)이다. 유중광은 578년 ‘공고구미(金剛組)’라는 조직을 만들어 공사를 했는데, 이 조직이 14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같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회사는 2006년 파산했지만, 다른 건설회사가 인수해 여전히 사찰 건축과 개보수를 하고 있다.

    일본 문화재계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한 분야의 일만 해온 공방(工房)이 적지 않다. 공방에선 신참자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고 5, 6년은 청소 등 잡일만 하게 한다. 어깨너머로 배우는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인성도 순화됐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기술을 가르쳐준다. 문화재청이 전통 방식대로 국보 1호를 복원하겠다고 한 것은 ‘일본의 길’을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엔 인프라가 있고 우리에겐 전혀 없다는 중요한 차이를 간과했다.

    6월부터 단청 떨어져

    2010년 홍창원 씨는 일본산 천연안료를 구입해 왔다. 그러자 문화재 관련 시민단체들의 제보로 각 언론에서 ‘국보 1호에 일본 단청을 칠하려 한다’는 내용의 보도를 쏟아내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러나 천연안료를 구하려면 그 방법뿐이었기에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천연안료로는 필요한 모든 색을 낼 수 없기에 끊어진 지 오래인 전통 안료 기법도 찾아보기로 했다.

    1970년대 서울 왕십리에는 자개공장이 많았는데 그곳에선 아교로 자개를 붙였다. 홍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어렵사리 그 아교를 구했다. 이른바 ‘막대아교’였다. 그러자 문화재청이 막대아교는 근대 이후 등장한 ‘공업용’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알(卵)처럼 생겼다고 ‘알아교’로 불리는 것이 식용이니 “조선시대에도 그것을 썼을 것”이라며 알아교로 단청을 붙이게 했다.

    알아교로 시험을 해보니 단청이 잘 붙지 않았다. 홍 씨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다가 결국 4번 칠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잘 붙지 않기는 일본산 천연안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여러 번 칠해 입혀야 했다. 우리가 천연안료를 외면한 것은 공해에 약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래서 숭례문처럼 도심에 있는 문화재를 복원할 때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숭례문 서까래는 성벽 위 2층으로 올려진 누각 지붕 밑에 있다. 2층 누각은 정자처럼 벽 없이 탁 트인 구조다. 광장 한복판의 높은 곳에 있으니 숭례문 서까래는 단청에 치명적인 비바람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문화재를 아는 사람들은 숭례문 단청이 머잖아 곧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가장 노심초사한 이는 홍 씨인데 그는 이미 지난 6월에 단청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밝힌 바 있다. 준비 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추진한 ‘전통 계승’이 ‘왜색(倭色)’ 시비만 일으키고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이 숭례문 단청이었다.

    덜 마른 목재

    전통에 눌리고 정치에 밟히고…

    숭례문 2층 누각 기둥의 균열. 법적 함수율은 맞췄지만 덜 마른 나무를 써서 성급히 공사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오래 말린 나무도 조금씩은 틀어진다.

    큰 목재를 다뤄 건물을 짓는 이를 ‘대목(大木)’ 또는 ‘대목수’라고 한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목장은 3명인데, 그중 가장 나이가 많고 유명한 사람이 74호인 신응수 씨다. 그런 신 씨가 진두지휘 했는데도 숭례문에는 균열된 기둥과 서까래, 보가 적지 않다. 문화재청은 불타지 않은 부재는 그대로 두게 했기에 숭례문에는 예전 기둥들도 함께 서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균열은 새 기둥뿐만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던 기둥에도 나 있었다.

    나무는 베어내도 계속 움직이는 ‘생물’이다. 품고 있는 습기 때문이다. 덜 움직이게 하려면 오래 건조시켜야 한다. 근대 이전에는 나무로만 건물을 지었으니 건물의 변형을 막기 위해 나무 말리는 데 많은 정성을 쏟았다. 나무가 품은 습기의 비율인 함수율(含水率)이 13% 정도가 될 때까지 건조시킨 후 사용했다. 함수율 13%를 맞추려면 5년 이상 건조시켜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할 수 없기에 문화재청은 24%를 요구한다. 정부 표준 시방서에도 24% 함수율을 맞추라고 해놓았다.

    대목들에게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완공한 건물에서 기둥과 보가 갈라졌다는 항의다. 이 때문에 신 씨는 미리 나무를 준비해둔다. 이는 ‘쟁이’로서의 고집, 그리고 자신에게 늘 공사가 맡겨질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신 씨는 보통 함수율 20% 이하의 나무로 집을 지었다. 그런데 숭례문은 큰 건물이라 신 씨가 준비해둔 목재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숭례문 화재 후 전주이씨 종친회 등에서는 문중 땅에서 자라는 좋은 소나무를 내놓겠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부인 이양무가 묻혔다는 강원도 삼척의 ‘준경묘’ 주변에서 큰 소나무를 베어 와 말렸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원을 서둘렀기에 함수율이 24%로 떨어지자 바로 재료로 사용하게 했는데, 갈라진 목재들은 대개 이렇게 마련된 것들이다. 문화재청은 자기 말마따나 ‘전통대로’ 하고 싶었다면 정부 시방서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함수율이 13%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사를 했어야 한다.

    전통이 뭐길래

    문화재청은 ‘전통대로’를 ‘그때그때 달라요’ 식으로 적용했다. 누각 2층 바닥은 두께 7cm의 송판을 깔고 전통못으로 고정했다. 전통못은 몸통이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올수록 두꺼워지기에 따로 머리 부분이 없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현장에서 수거된 것과 경복궁에 보관된 전통못을 쓰게 했으나 너무 약했고 수량도 적었다. 이 때문에 신인영(62) 대장장에게 현장에 대장간을 마련해 전통못을 만들게 했다. 못은 기둥과 달리 눈에 잘 띄지 않기에 작업자의 요구를 수용해 보다 강하게 만들었다. 이는 ‘전통대로’를 슬쩍 외면한 사례다.

    전통기와는 단청처럼 기술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 1980년대까지도 일본식 기와를 올린 집이 많았고, 그 후로는 문화재 보호가 활성화해 꾸준히 수요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기와의 수명은 100년 정도인데, 이는 제대로 된 기와의 경우다. 그렇지 못한 기와는 몇 번의 겨울과 여름을 지나면 동파(凍破)되거나 열파(熱破)된다.

    이 때문에 정부는 KS 표준화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주)고령기와 등 몇몇 회사에서 동파나 열파가 거의 되지 않는 KS 규격 기와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기계기와’다. 기계기와는 전통기와보다 강하게 압축하고 가스불을 이용해 훨씬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기나 자기에 가까운 강도의 기계기와가 나오자 고궁과 절은 거의 이 기와를 썼다. 숭례문도 1997년 개수 때 이 기와를 올렸다.

    기계기와는 먹(墨)빛을 띠지만 전통기와엔 은은한 회색이 돈다. 따라서 멀리서 보면 전통기와 지붕이 멋있어 보인다. 기계기와가 시장을 장악한 시기에 단 한 사람만이 전통기와 제작을 고집했다. 1988년 문화재청은 나무와 숯을 이용한 방식으로 기와를 굽는 제와장(製瓦匠) 한형준 씨(올해 작고)를 중요무형문화재 91호로 지정했다. 문화재청은 한 씨에게 전통기와 제작을 주문했으나 워낙 연로해 그의 전수조교인 김창대(41) 씨가 맡게 됐다.

    문화재청은 전통문화 기술을 잇기 위해 2000년 충남 부여에 한국전통문화대학교를 세웠다. 김 씨는 이 학교에 기와 굽는 가마인 ‘와요(瓦窯)’를 만들고 2만6000여 장을 구워냈다. 기존 기와를 벗기고 새 기와를 올리는 것을 ‘번와(飜瓦)’라고 하는데, 번와는 제와만큼이나 어려운 기술이다. 문화재청은 중요무형문화재 121호인 번와장 이근복 씨에게 지난해 5~11월 숭례문에 전통기와를 올리게 했다.

    그런데 이 기와가 벌써 변색된다는 게 작금의 시비다. 숭례문 단청이 떨어지고 목재가 균열될 것을 예측했던 전문가들은 이 대목에서 “전통기와도 곧 깨져나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들은 “도대체 전통이 뭐냐?”고 반문한다. “기계기와는 전통기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니 이것도 우리 전통문화다. 그런데 왜 이를 외면하고, 조선시대 기술로 만든 것만 전통기와로 보느냐”는 것이다.

    갈팡질팡 ‘문화재 정치학’

    문화재청은 숭례문과 이어진 성곽 일부를 복원했다. 성곽 복원에는 이의상(72)·이재순(58) 두 석장(石匠) 팀이 참여했다. 한양 도성을 이룬 돌은 인왕산이나 안산 등 4대문 인근 산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통을 강조해도 서울 시내에는 채석장을 만들 수 없기에 비슷한 돌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서 가져왔다.

    그래도 돌 다듬는 연장만큼은 전통적인 것을 쓰라고 주문했다. 두 석장으로 하여금 요즘 나오는 더 좋은 연장은 놔두고 옛 기억을 토대로 신인영 대장장의 대장간에서 전통 방식대로 망치와 정 등을 만들게 하고, 그것으로 돌을 다듬게 했다. 석공들에겐 한복 작업복 차림으로 일하게 했다. 또 크레인 대신 거중기(擧重機)로 돌을 들어 올리게 했다.

    그런데 거중기는 조선 후기에 정약용이 개발한 것이니 한양 도성을 만들 때는 ‘목도’로 날랐거나 줄을 걸어 돌을 당겨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목도꾼은 사라진 지 오래고, 숭례문 현장은 너무 좁아 줄을 걸 수도 없었다. 결국 크레인으로 돌을 올렸다. 전통 흉내 내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나무 건조는 짧게 하고, 돌을 쪼고 나르는 일은 오래하게 해서 효율을 떨어뜨린 ‘갈팡질팡 전통 복원’엔 ‘문화재 정치학’이 작용했다. 정치적 요소를 의식해 문화재 정책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통상적으로 문화재 복원은 전문 업체가 맡아서 하고 감리를 받는다. 숭례문 복원공사는 명헌건설, 감리는 금성종합건축사에 낙찰됐다. 그러나 정작 두 회사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문화재청이 모든 것을 다 했기 때문이다.

    문화재 복원공사의 일인자로는 김의중 씨가 꼽힌다. 그는 장원건설 소속으로 덕수궁 함명전 복원을 막 끝낸 다음 문화재청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명헌건설로 소속을 옮겨 현장소장을 맡았다. 이어 문화재청은 앞에서 거론한 중요무형문화재들을 명헌건설로 불러 각자의 공사를 하게 했다.

    전통에 눌리고 정치에 밟히고…

    지금의 광화문 현판(왼쪽)과 2010년 11월 복원 3개월 만에 갈라진 광화문 현판.

    문화재청에서는 ○○계 소속 공무원 3인이 현장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명헌건설은 공사를 이끌 수가 없었다. 감리사도 지켜보기만 했다. ‘전통대로’는 안 가본 길이니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가 거듭돼야 한다. 이는 문화재청이 주도해야 할 일인데, 문화재청은 이것보다는 숭례문 복원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 치중했다. 이는 왜색 안료 시비를 잦아들게 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전통대로의 복원을 강조했기에 문화재청은 최초의 숭례문과 성곽 형태를 알고자 했다. 이 때문에 처음 2년은 숭례문 주위를 발굴하는 데 보냈다. 우리나라는 지형상 보통 100년에 1m 정도 흙이 쌓인다고 한다. 비가 올 때 흘러내리는 토사가 100년이 지나면 1m나 쌓이는 것이다(자연 상태일 경우). 그래서 평지에서 유물을 발굴할 때는 10여 m를 파들어간다.

    사공 많은 배는 산으로

    발굴에 들어간 문화재청은 숭례문의 최초 지반이 현재 지표면 1.6m 밑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깊이에서 숭례문의 문짝 기둥인 문설주를 꽂는 바닥돌 ‘문지도리석’ 등을 찾아낸 것이다. 화재가 났을 때 숭례문 석벽 높이가 6.4m였으니 처음에는 8m로 웅장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60cm 정도까지만 드러나게 하고 최초 기단 등을 되묻었다.

    일부 인사는 “국토해양부 측이 ‘흙을 걷어내면 숭례문은 그 아래를 지나는 지하철 1호선의 진동을 더 받게 돼 보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인들에게는 금과옥조처럼 적용된 ‘전통대로’가 타 부처와 얽히면 통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의미 잃은’ 발굴로 2년을 흘려보냈다.

    숭례문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전 당선인이던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쯤 세상에 불만을 품은 채종기(당시 69세) 씨가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여 일어난 화재로 무너졌다. 화재 소식을 들은 이 당선인은 바로 현장으로 달려와 발을 구르다 자정 무렵 숭례문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맥없이 발길을 돌렸다. 숭례문 복원을 맡은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에 공사를 마치고자 했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원식을 2012년 8월 15일 광복절 즈음에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공사를 독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2010년 11월 광화문 현판 사건이 일어났다. 문화재청은 1990년 시작한 경복궁 복원의 일환으로, 2006년 12월부터 시멘트로 지어진 광화문을 철거하고 ‘1865년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0년 8월 15일 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분 좋게’ 광화문 복원식을 열었다.

    그런데 석 달 뒤에 광화문 현판이 갈라진 것이 발견됐다. 현판 나무를 충분히 건조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지적됐다. 그러자 같은 현상이 숭례문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복원 시기를 이 대통령 퇴임 직전으로 미뤘다. 그러나 그때가 다가와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8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당선인 캠프가 이를 알고 복원식을 박 대통령 취임 이후로 연기하라고 요구했다.

    문화재청은 적극 협조했다. 그러나 상급 기관인 문화부의 생각은 달랐다. 문화부가 “장관도 모르게 그러한 일을 결정하느냐”고 문화재청을 강하게 질책하자 복원식을 이명박 정부 이후로 결정한 문화재청 핵심 인사는 사표를 냈다. 그러자 많은 이는 그가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재청장에 임명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고려대 세종캠퍼스 고고미술학과의 변영섭 교수(62·여)를 청장에 임명했다.

    변 청장은 문화재 시민운동을 이끄는 그룹과 가까운 편이라 그 후 숭례문 복원을 둘러싼 시민단체의 반발은 줄었다. 컹컹 짖어야 할 ‘워치독’은 그냥 바라보기만한 것이다. 그리고 문화재청은 박 대통령을 모시고 화려한 복원식을 했다가 한 달 만(6월)에 단청이 떨어지는 사태를 맞았다. 그러자 ‘문화재 정치학’의 한 주역인 박 대통령은 숭례문 복원에 대해 철저한 조사와 엄중한 문책을 지시하고 변청장에게도 책임을 물어 퇴임시켰다.

    숭례문 복원은 ‘전통대로’에 눌리고 문화재 정치학에 밟혔으니 사공 많은 배처럼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논쟁이 모두 탁상공론이 된 것이다. 사건이 커지고 나서야 바른 소리가 나왔다. 숭례문 성곽 공사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실토했다.

    전통에 눌리고 정치에 밟히고…

    숭례문 2층 누각에서 본 주변 풍경. 2층 누각은 뻥 뚫린 구조로 높은 곳에 있어 강한 비바람을 직접 맞는다. 물에 약하고 공해에 약한 전통안료 단청은 금방 벗겨질 수밖에 없다.

    “단청은 건물을 다 지어놓고 제일 마지막에 하는 것 아닌가. 숭례문에 기와를 올리는 것이 지난해 늦가을에 끝났으니 단청은 한겨울에 한 셈이다. 숭례문의 2층은 허공에 떠 있기에 찬바람이 들이친다. 이 때문에 휘장을 치고 난로를 켜놓고 단청을 칠했다. 안 그래도 처음 시도하는 공법인데 한겨울에 단청이 붙겠나. 아교가 제대로 녹기나 하겠느냐는 말이다. 여느절에서도 그렇게는 안 한다. 목조건물은 완성한 다음에도 조금씩 움직이며 말라간다. 이 때문에 2년여가 지난 후 날 좋은 때를 골라 단청을 한다.

    복원 현장에서는 경험 많은 현장소장도, 감리도 제 구실을 못했다. 높은 분들이 너무 많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현장이고층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압박감도 컸다. 기술자들은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시키는 대로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 중요무형문화재들만 망신을 당하게 됐다. 물론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진짜 프로라면 끝까지 ‘안 된다’며 버텼어야 하는데 따라가기만 했다.”

    다음과 같은 증언도 나왔다.

    “복원을 시작할 때 일부 중요무형문화재들은 서로 끼워달라고 경쟁했다. 어떤 이는 공짜로 봉사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나중엔 ‘전통 방식대로 하니 비용이 더 들어간다’며 공사비를 올려달라고 한 달 동안 공사를 안 하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전통 방식의 공임을 높여줬다. 문화재청과 장인들이 결탁한 셈이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원을 계기로 조직을 키웠다. 숭례문 방화로 ‘문화재 지킴’이라는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으니 문화재청은 겉으로는 울어도 속으로는 웃었을 것이다. 진짜 고생한 이들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한 현장 일꾼들이다. 그들의 고생이 묘한 야합 때문에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해보지도 않은 전통 방식을 써서 시간에 맞춰 하려고 허둥대다 실패한 것, 숭례문 사건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짜 프로는 없는가

    숭례문 복원과 비교되는 것이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탑 해체 복원이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고정해놓은 것이 파손돼 1998년 문화재청과 전북도는 이 탑을 해체했다가 2007년 복원하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해체를 하는 와중에 많은 유물이 나오자 시기를 늦춰 2010년 5월에야 완전 해체를 했다. 그리고 3년간 복원 방법에 대해 논의한 끝에 ‘2016년 완성’을 목표로 올해 11월에야 복원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 사이에 사업비는 계속 올라갔고 돈문제가 얽혀 검찰 내사가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했기에 실수가 적은 편이다.

    숭례문과 미륵사지탑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재 정책이고 행정이다. 우리는 1971년 치밀한 준비 없이 우리 손으로는 처음으로 백제 무령왕릉을 성급히 발굴했다가 많은 자료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 반작용으로 고분 발굴 기술이 크게 발전했으나 이후로는 답보를 거듭했다.

    숭례문 복원 실패는 이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문화재를 전통 방식대로 복원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전통 방식이 이어질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고 그것이 안착되도록 끈질기게 기다려야 한다. 대통령을 위하겠다는 정치색도 배제해야 한다. 그 시작은 정권과 가까운 이가 아닌, 진짜 전문가를 문화재 담당 부처의 핵심에 임명하는 것이다.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고속철 TGV를 한국에 수출하기 위해 병인양요(1886년)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한다고 약속했다가 학예사들의 반발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랜 회담 끝에 5년씩 계속 임대하는 방식으로 한국에 반환했다(2010년). 우리 문화재 전문가들도 이러한 정도의 전문성과 소신을 갖고 일해야 한다. 정치와 명분에 춤추지 말고. 그것이 한국을 문화국가로 만들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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