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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유린 교역 위축되자 내륙 약탈

사라센 해적 (上)

  •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sukkyoon2004@hanmail.net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유린 교역 위축되자 내륙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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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대 제국 로마가 멸망한 후 지중해는 사라센 해적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라센 해적은 해적질을 이교도 기독교인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유린 교역 위축되자 내륙 약탈

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 세력권을 보여주는 지도.

이번 호에서는 ‘서로마 제국’으로 통칭되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사라센 해적을 다루고자 한다. 사라센 해적은 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 세력이 중근동과 북아프리카 해안을 지배하는 동안 이탈리아 반도 인근의 지중해를 약탈했다. 이들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로마 제정 말기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이슬람의 등장과 사라센 해적을 바로 다루면 전체의 맥락은 사라지고 단절된 역사의 단면만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인위적인 단절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어느 시대의 어떠한 역사적 사건도 긴 흐름 속에서 여러 요인이 서로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상호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사라센 해적의 발호도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에서 생긴 힘의 공백을 틈타 일어난 역사적 현상이었다.

무엇보다 로마의 역사가 곧 고대 유럽의 역사라 할 수 있을 만큼 고대 유럽사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 영향은 막강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로마 시대의 해적도 로마가 지배하는 지중해에서 로마와 속주를 오가며 무역하는 배들을 약탈하는 것이 주업이었고, 이들 해적을 소탕하는 것도 로마 해군의 몫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도 해적 소탕작전을 벌인 적이 있지만 해적 문제 해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로마 시대였다.

천년 제국의 위기

로마 멸망 후 등장한 사라센 해적은 이전까지의 지중해 해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집단이었다. 로마 멸망 전 그들을 괴롭히던 지중해 해적은 로마 제국 내부의 문제였고, 그것은 같은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망한 후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를 건너와 이탈리아 반도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약탈했다.

찬란한 천년 역사의 대제국 로마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존속했지만 서로마와는 사실상 별개의 제국으로 존재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의 역사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는 게 정설이다.

전성기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로 에스파냐, 북으로 브리타니아, 동으로 흑해 연안의 소아시아와 근동, 남으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오랜 기간 서쪽으로는 라인 강, 동쪽으로 도나우 강이 제국의 최전방 방위선이었다. 이 방위선을 따라 방벽을 설치하고 인근에 군단기지를 주둔시켰다. 이 선은 단순히 야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선이 아니라 문명세계와 야만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변경선 안쪽의 로마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학문과 예술이 융성했으며, 법과 제도에 의해 통치되고 사람의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였다. 반면 로마인이 보기에 변경 너머는 부족집단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쟁과 약탈에 의존해 살아가는 미개한 야만 사회였다.

로마는 여러 대륙에 걸쳐 인종·종교·문화가 다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만민에게 공평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아울러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면 로마와 각지의 속주를 연결하는 도로교통망을 구축해야 했다. 이런 목적으로 건설된 로마 가도는 황제의 통치가 변방의 속주 구석구석까지 미치도록 하고 속주의 일이 신속히 황제에까지 도달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제국의 수도에서 변방까지 잘 닦인 로마 가도는 거대 제국 로마를 작동시키는 신경체제였다. 야만족의 침략이 있거나 속주에서 반란이 발생한 경우 로마 가도는 신속하게 대규모 군사 이동을 가능하게 해 로마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로마는 AD 1세기 말부터 2세기 말까지의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 기간에 정치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성했으며 영토는 최대 판도를 이뤘다. 무엇보다 야만인들이 로마 방벽을 넘어올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변경의 방위가 튼튼했다. 로마의 가치가 곧 보편적 가치가 되고, 로마에 의한 질서의 구축이나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가 열렸다.

오현제 시대까지는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 중에서 황제가 선임됐다. 그러나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황제 자리가 세습되면서 함량 미달의 군인 출신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했다. 한꺼번에 여러 황제가 난립하기도 하고, 연이은 황제 암살과 팔미르·갈리아 지역의 반란 등으로 로마는 건국 후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위기의 3세기’를 거치면서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로마의 개방성은 서서히 무뎌졌고 경제는 활기를 잃었다. 경제적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사회적 갈등은 심화됐다. 재정이 부실해져 잦아지는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변경을 방위할 충분한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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