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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변호사의 알아두면 돈이 되는 법률지식<마지막회>

법은 밥보다 가깝다

법은 밥보다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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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까지 계약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해봤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질문을 듣고 어떤 이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다가 “서너 번”이라고 답할 것이고, 어떤 이는 “아직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은 하루에 몇 번이나 계약을 하고 삽니까?’라고 다시 물으면 대부분 ‘하루에 몇 번? 나를 무슨 부동산 중개업자로 생각하나?’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법은 일상이다

회사원 이평범 씨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월요일 아침. 늦게 일어난 이 씨는 후다닥 출근 채비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뛰어간다. 교통카드를 갖다 대고 개찰구를 통과해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한다.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침식사로 샌드위치 1개와 아메리카노 1잔을 사들고 사무실에 도착한다. 업무를 보다가 지난주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본 캐나다산 거위털 파카가 계속 눈에 어른거려 결국 쇼핑몰에서 거금을 들여 구입한다.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회사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 백반을 시켜 먹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을 산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증권회사 사이트에 들어가 갖고 있던 주식 일부를 매각한다. 오전에 비싼 옷을 산 것을 벌충하기 위해서다. 근무를 마친 이 씨는 버스를 타고 친구와의 저녁약속 장소로 가서 소주 한잔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친다.

이평범 씨가 이 월요일 하루 동안 업무가 아닌 일상 중에 계약을 몇 번이나 했을까. 정답은 ‘최소한 9번’이다. 먼저 이 씨는 이날 3건의 여객운송 계약을 체결했다. 출근할 때 지하철, 저녁 친구와의 약속장소로 갈 때 버스, 귀가할 때 택시, 이렇게 3번이다. 그리고 3건의 물품구매 계약을 했다. 출근할 때 샌드위치와 커피, 인터넷 쇼핑몰에서 의류, 점심식사 후 담배 1갑을 구매했다. 여기에 점심과 저녁 2건의 음식물 공급 계약 내지 식당이용 계약, 마지막으로 주식거래 계약 1건을 체결했다.

평생 서너 건의 계약을 해봤다거나 아직 경험이 없다고 말한 이들은 계약이라고 하면 부동산을 사고팔 때처럼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 신분증을 주고받거나 공증을 받는 정도는 돼야 ‘계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착각이다. 두 사람이 무엇인가를 대가로 무엇을 해주기로 하는 약속은 대부분 계약이다. 우리 국민 중 3500만 명 이상이 체결했을 이통통신 계약은 휴대전화 요금을 내면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게 해주겠다는 계약이고, 4000만 명 이상이 체결했을 은행거래 계약은 돈을 맡기면 계좌를 만들어주고 이자를 주겠다는 내용의 계약이다. 이통통신, 보험, 은행거래, 신용카드 등은 우리 경제생활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수단들이고, 이들은 모두 계약이 없으면 이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말없이 체결되는 계약

휴대전화나 보험은 계약서라도 있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또 식당에서 음식 주문할 때는 무슨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근거로 계약이라고 할까. 꼭 부동산 계약같이 인감도장을 찍진 않지만 최소한 사인이라도 들어가는 휴대전화, 신용카드 계약까지는 계약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교통카드가 든 지갑을 ‘툭’하고 찍고, 손을 들어 정차한 택시를 타고 “○○으로 갑시다”라고 하는 게 고작인 상황을 가리켜 계약하는 것으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그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이 급정거하는 바람에 부상자가 생겼다고 하자. 지하철공사는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해 치료해줄 것이고, 부상자들은 손해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지하철공사가 언제 승객들에게 부상당하면 치료해줄 것이고 피해배상을 해주기로 한 적이 있는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부상 승객에 대한 치료와 배상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지하철공사와 승객 간에 여객운송 계약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지하철 여객운송 계약은 승객이 교통카드를 인식장치 위에 댄 순간 체결된다. 그래서 지하철공사의 여객운송 규정도 “교통카드 이용자는 교통카드를 개찰한 때에 계약이 성립된다”고 정하고 있다. 택시운송 계약은 승객이 손을 들어 차를 세운 후 행선지를 말한 순간, 식당의 음식공급 계약은 주문을 하고 종업원이 “네” 하는 순간 체결된 것이다. 이렇게 계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승객은 운임이나 식대를 지불할 의무가 생기고 운송회사는 목적지까지 승객을 안전하게 운송할 의무를 지고, 식당은 안전한 음식을 제공할 의무를 진다.

계약과 같은 법률행위에는 반드시 계약 당사자가 계약을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해야 하는데, 의사 표시는 꼭 말이나 글로 할 필요가 없다. 지하철, 버스, 택시처럼 같은 내용의 계약이 극히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특별한 경우에는 행동으로 하는 것도 인정되는 것이다.

‘법은 밥’이라고 한다. 그러나 밥은 하루 세끼 먹고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만, 계약은 그보다 훨씬 더 자주하는 것이고 이를 피해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법은 밥보다 더 가깝고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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