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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토라는 다케시마(竹島)는 독도 아닌 ‘대나무 섬’ 울릉도

일본의 착각

  • 김정현│재야 사학자 kimskorean@naver.com

일본 영토라는 다케시마(竹島)는 독도 아닌 ‘대나무 섬’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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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교문제를 다룬 조선의 예조 문서를 분석해보면 조선과 대마도는 울릉도를 ‘죽도’ 혹은 ‘의죽도’로 부르며 문서를 교환했다. 조선은 해금(海禁)정책 때문에 울릉도를 빈 섬으로 유지했을 뿐 영유권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 일본은 울릉도를 뺏을 수 없자 엉뚱하게도 울릉도의 부속섬인 독도를 죽도로 바꿔 부르며 자국 영토라고 우긴다.
일본 영토라는 다케시마(竹島)는 독도 아닌 ‘대나무 섬’ 울릉도

1953년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도에 박아놓은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무라 다케시마(竹島)’ 말뚝. 그해 한국산악회는 태극기를 걸고 사진을 찍은 뒤 이 말뚝을 바로 뽑아내 버렸다.’

일본은 우리 독도에 대해 착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의적으로 왜곡한다. 독도는 ‘다케시마’란 이름의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케시마는 한자로 죽도(竹島)다. 대나무 섬이란 뜻이다. 일본도 한자 문화권이니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는 의미를 둔다. ‘도쿄’가 그런 예이다. 그곳을 東京(동경)으로 적은 것은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독도를 이유도 없이 죽도(竹島), 다케시마로 불렀을 까닭이 없다. 독도는 큰 바다에 홀로 있는 모양이니 독도(獨島)가 옳다. 독도는 대나무 섬도 아니다. 우리 역사 자료는 현재의 울릉도가 죽도였음을 알게 해준다.

울릉도가 죽도·의죽도였다

‘춘관지(春官志)’는 조선 영조 20년(1774) 예조정랑 이맹휴(李盟休)가 왕명으로 편찬한 예조(禮曹)에 관한 여러 사례를 수록한 책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울릉도 섬은 울진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끝이며 산부리를 역력히 볼 수 있다. 지역이 넓고 땅이 비옥하며 대(竹)를 산출하므로 죽도(竹島)라 했다. 세 봉우리가 있어서 삼봉도(三峰島)라고도 했다. 우산(于山), 우릉(羽陵), 울릉(蔚陵), 무릉(武陵), 의죽( 竹) 등의 이름도 있었는데, 이는 와음(訛音)에서 그러했다.’

광해군 때 이수광이 지어 인조 때 간행한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울릉도가 의죽도였음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땅이 비옥해 대나무가 굵고 크며, 쥐가 고양이만큼 크다. 복숭아도 되(升)보다 크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가본 사람이 있는데 그 섬 또한 왜놈들이 분탕질을 해 섬에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근래에 와서 들으니 왜(倭)가 의죽도를 점거해 산다고 했다. 의죽은 곧 울릉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돌 모양 의( )’ 자를 쓰는 의죽( 竹)은 바위 사이에서 자란 대나무, 산죽(山竹)을 칭한다. 따라서 의죽도는 죽도와 맥이 통한다. ‘춘관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광해 갑인년에 왜인이 와서 장차 배 두 척을 보내서 의죽도의 지형을 살피겠다고 하며 그 섬은 경상과 강원 사이에 있다고 했다. 우리 조정에서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하며 왜인을 만나주지 아니했다. 그리로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에게 명해 다음과 같이 답장하게 했다.

“그 섬을 살펴보겠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걸 모르는바 아닐 텐데 외람되게 왜 엿보려 하는가. 이는 이웃나라로서 우호 도리가 아니다. 경상·강원 양 바다에 그대들 섬이 위치해 있다고 하며 우리를 속이려들지 말라. 신라와 고려도 섬으로 도피한 죄인들을 여러 차례 찾아 잡아왔었다. 지금 우리는 백성이 섬에 나가 사는 것을 금한다. 그 때문에 빈 섬이 된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가서 살도록 용납한 것은 아니다. 전일 답장에 말했듯이 귀 대마도 측은 잘못된 생각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고쳐야 한다. 그대들은 지금 곧장 배를 보내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조정을 가벼이 본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다. 왜가 왕래하는 길은 오직 하나, 귀 대마도를 문호(門戶)로 한 것뿐이다. 그 외 길은 표류선(漂流船)을 막론하고 모두 적선(賊船)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엄히 단속만 한다고 그대들은 말하겠지만 국경선이 있어 침범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 것이다. 그대들은 잘못을 끝까지 저지르지 않길 바란다.”’

춘관지에는 또 이런 내용도 있다.

‘신라 때 이사부(異斯夫)가 위협해 굴복게 한 후 우리나라에 예속됐음을 사적(史籍)은 밝혀주고 있다. ‘지봉유설’은 “근자에 들으니 왜가 의죽도를 점거했다고 하는데 의죽도는 바로 우리의 울릉도이니 항의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인이 이를 가지고 트집 잡아 말썽을 부렸다. 광해군 갑인년(1614) 이후 그러했다. 이는 왜의 관백(關白)의 뜻이 있어 울릉도를 점거하는 행동을 보인 것이 아니라, 대마도 왜인들이 울릉도에서 나는 고기며 대(竹)를 탐내 그렇게 한 것이다.’

착각으로 울릉도와 죽도 구분

울릉도가 죽도 혹은 의죽도였다는 것은 당시 왜인들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조선 숙종 때 김지남(金指南)이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사역원(司譯院)의 연혁과 예부터 내려온 역사자료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숙종 계유년(1693)에 대마도 도주(島主)가 동래부에 글을 보내 말하기를 “조선인이 일본 의죽도를 침범해 들어왔으므로 붙잡아 압송한다”고 했다. 이어 “조선인이 들어올 수 없는 섬에 온 것인데, 우리 일본이 관용을 베풀어 기꺼이 돌려보낸다”며 “향후에는 이 섬에 조선인 출입이 없길 엄히 요구한다”고 했다.’

이 책은 이런 내용도 담고 있다.

‘을해년(1695)에 대마도 도주가 동래부에 글을 보내 다시 의죽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계유년(1693)에 보낸 우리 회답 서신에 “귀계(貴界) 죽도와 폐경(弊境) 울릉도”라고 돼 있는 것을 근거로 마치 죽도와 울릉도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에 우리는 “82년 전인 갑인년(1614)에 그대 나라가 의죽도 형세를 탐색한다는 서신을 가져왔기에 우리 조정은 부사 박경업(朴慶業)을 시켜 “섬은 두 개가 아니다. 죽도가 곧 울릉도다”라고 했었다. 그 서신에 우리 입장이 실려 있으니, 우리는 그 내용으로 족하다고 본다. 그러한 답장을 보내준 뒤에 세 번이나 표류해 온 왜인들이 더러 죽도의 나무를 베간다고 했고, 죽도에 고기잡이 간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한 왜인들을 붙잡아 돌려보내고 국경 침범을 책하지 않았는데 이는 양국 우의를 생각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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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재야 사학자 kimskore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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