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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난중일기’로 만난 이순신과 조선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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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간 쓴 ‘난중일기’는 병법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난중일기’에서 전쟁에 이기는 법만 보려 했다. 인간 이순신의 고민, 그 시대 조선의 문제는 외면했다. 필자는 수년간 난중일기를 통해 이순신과 이순신이 살던 시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두려움에 점을 치는 이순신, 그의 연인들, 이순신을 만든 부하들은 우리가 몰랐거나 외면한, 위인전에선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 가지 욕망이 있다. 식욕, 성욕, 미래욕이다. 식욕과 성욕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본능적 욕망이다. 미래욕은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만이 지닌 욕망이다. 미래욕이 없었다면 자연의 변화를 읽고 예측하거나 문명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점(占)은 미래욕을 채우는 하나의 행위이자 수단이다.

과학적 세계관으로 보면 점치는 행위는 원시적이고 비문명적 행위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느끼든 못 느끼든 매 순간 점을 치며 산다. 의사결정 순간마다 수반되는 예측은 점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판단하는 것도 점이고, 남에게 물어보는 것도 점이며, 신에게 물어보는 것 역시 점이다. 그래서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은 이렇게 적었다.

“임금이 궁금증이 있다면, 먼저 임금 자신에게 물어보고, 다음은 대신과 백성에게 물어보고, 그런 다음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거북점과 시초점에 물어보라. 세 사람이 점을 쳤는데 두 사람의 결과가 같다면 그 두 사람의 결과를 따르라.”

점친 기록 17회

‘태종실록’에는 점을 쳐 수도를 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태종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즉위하면서 한양에 조선의 수도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창덕궁을 건설할 즈음, 수재와 가뭄이 연이으며 도읍 건설 부정론이 일어났다.

그때 태종은 고려 태조 왕건이 개성에 도읍을 정할 때 척전점(擲錢占·돈을 던져 길흉을 파악하는 점)을 쳐 그 결과에 따랐다며 한양·무악·개성 세 곳을 대상으로 척전점을 쳐 결정하라고 명했다. 결과는 한양은 2길(吉) 1흉(凶), 개성과 무악은 2흉 1길로 나타났다. 그에 따라 태종은 한양을 도읍으로 확정짓고 창덕궁을 창건했다.

이순신의 후원자이자 영의정이었던 류성룡(1542~1607)도 점을 자주 쳤다. 그가 남긴 ‘서애집’에는 점을 친 사례가 나온다.

임진(1592년) 6월. 나는 선조를 따라 평양에 피난해 있었다. 어머님은 왜적을 피해 동쪽으로 가셨다고 하는데 길이 끊겨 소식을 듣지 못했다. 어머님이 걱정되어 점을 쳐 곤지건괘를 얻었다. ‘초씨역림’의 점사를 보니, “아이가 활을 쏘니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의심을 풀려고 점을 쳐도 아무도 피한 곳을 알 수 없다. 나라가 평안하니 머물러 있는 것이 이롭다. 군사와 도적이 이르지 아니하니 백성이 시끄러움이 없다(?或射御, 不知所定. 問于蓍龜, 孰可避之. 國安土樂. 宜利止居. 兵寇不作, 民無騷憂)”라고 했다. 후에 어머님의 소식을 들었는데, 형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가평현에 있는 절인 조종사로 피난했다고 한다. 왜적이 그 주변에서 사방으로 나왔지만 산이 깊어 그곳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가 괘를 얻은 날이고, 바로 어머님이 조종사에 있을 때였다.

이순신 시장(諡狀·임금에게 시호를 건의할 때 그가 살았을 때의 일을 적어 올리는 글)을 쓴 택당 이식(1584~1647)도 점을 아주 잘 쳤다. “공(이식)은 성질이 안정되어 마음에 망상이 없었으므로 어른들이 척전점을 시켜 임진왜란 시 피난할 곳을 물으면 그 길흉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순신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로 ‘선조실록’의 자료로 활용된 ‘미암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1513~1577)도 점을 자주 쳤다.

전쟁터에서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를 돌리며 살았던 인간 이순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스스로 점을 친 기록, 다른 사람이 점을 친 내용이 총 17번 등장한다. 이순신 자신이 직접 척자점(擲字占)을 친 것이 14회, 다른 사람이 친 것이 3회다. 점을 친 시기는 일기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은 1594년, 1596년, 1597년이다. 1594년은 3일간 척자점 10회, 1596년은 2일간 척자점 4회, 1597년은 3일간 추수(推數) 2회와 주역점 1회의 기록이 나온다. 1597년의 점들은 이순신이 아니라 맹인 임춘경과 신홍수가 각각 추수와 주역점을 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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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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