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특집 | ‘촛불정부’ 원년, ‘나라다운 나라’ 얼마나?

청년실업, 비정규직 ‘사상 최고’

'일자리 대통령’의 초라한 성적표

  • 입력2017-12-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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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정부 시절보다 청년실업률 상승

    • 최저임금 인상 충격 심각…‘아르바이트 자리’도 줄어들 것

    • 세계경제 호황 힘입어 경제성장률은 낙관적

    수출 등 경기 호조에도 청년층 실업률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2017년 12월 13일 오후 서울 광진구의 한 대학교에서 학생이 게시판에 붙은 취업 정보를 읽고 있다. [뉴시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수출 등 경기 호조에도 청년층 실업률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2017년 12월 13일 오후 서울 광진구의 한 대학교에서 학생이 게시판에 붙은 취업 정보를 읽고 있다. [뉴시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모 취업 전문 사이트는 “2018년 초 졸업하는 대학생 취업희망자의 88%가 2017년 말 이미 취업을 결정했다”고 전한다. 10명 중 9명꼴로 입도선매 된 셈이다. 3명 중 2명꼴로 두 곳 이상의 기업에 동시 합격했다고 한다. 졸업반 학생은 어느 회사로 갈지 결정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이 뉴스는 ‘가짜 뉴스’가 아니다. 일본에서 날아온 소식이다. 반면 우리 앞에는 암울한 통계가 기다리고 있다. 2017년 11월 청년(15~29세) 실업률은 9.2%였다. 전월 대비 0.6%포인트 상승했다. 2016년 같은 달 대비 무려 1.0% 포인트나 올랐다. 2016년 11월이면 ‘박근혜 정부 시절’이다. 

    지금 한국의 청년은 어떤 세대인가. 이미 자조적인 표현들을 스스로 만들어온 이들에게 더 아픈 단어는 삼가야겠다. 다만 한국에 ‘잃어버린 세대’가 등장했다는 분석을 피하기는 어렵다. 

    ‘촛불정부 원년’의 경제 부문에 대해 평가하자면, 수출 상황보다 일자리 상황에 먼저 눈길이 간다.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정부’를,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 대통령’을 자임해서다. 대선 공약으로 그걸 앞세웠다. 취임사에서도 “일자리를 가장 먼저 챙기겠다”고 했다. 취임 직후 내린 1호 업무 지시는 ‘일자리위원회의 구성’이었다. 그로부터 7개월여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를 어떻게 챙겨왔는가. 새해 전망은 어떤가.

    대통령 집무실의 ‘일자리 현황판’을 보니…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24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한 일자리 상황판 모니터를 보며 현황을 직접 설명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24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한 일자리 상황판 모니터를 보며 현황을 직접 설명하고 있다. [뉴스1]

    문 대통령은 취임 2주 뒤 집무실에 ‘일자리 현황판’을 설치했다. 여기에는 6개의 지표가 나타난다. 고용률, 취업자 수, 실업률, 청년실업률, 비정규직 비중, 근로시간이다. 등락을 보여주는 화살표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세부 항목으로 6개 지표를 포함해 총 18종의 통계치가 그래프로 그려진다. 청년실업률과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쏟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가 담겼다. 문 대통령은 현황판 설치를 국민에게 알리며 “매일 점검하겠다”고 약속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이 메뉴가 떠 있다. 



    문 대통령은 7개월 만에 점검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경제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중시한 일자리 지표들은 빨간색이다. 청년실업률은 10월 8.6%, 11월 9.2%로 각각 18년 만의 최고치였다. 비정규직 비율(2017년 8월 기준)은 32.9%로 2012년 8월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 

    문재인 정부 6개월의 경제 성과가 나쁜 탓인가. 이 수치만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시점의 통계는 그 당시 정부만의 성과 지표는 아니다. 특히 일자리 같은 통계는 가계·기업·정부의 경제활동 결과다. 

    2017년 고용 동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6개월 이상 실직 상태인 장기실업자 수가 월평균 14만4000명에 달한다는 점이다. 전체 실업자 가운데 장기실업자 비중이 1년 전에 비해 비교적 큰 폭 상승했다. 

    청년취업 사정은 더 나쁘다. 11월 청년 체감실업률은 21.4%로 1년 전보다 0.1%포인트 높아졌다. 2015년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최고치였다. 청년층 취업자 비중은 최저 수준이었다. 구직에 나선 지 3개월이 안 돼 취업한 청년의 비중이 5월 기준으로 49.9%였다. 처음으로 50%를 밑돌아 구직 기간이 길어지는 추세가 강해졌다. 청년층이 선호하는 ‘좋은 일자리’는 감소했다. 게다가 앞으로 전망도 좋지 않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대졸 초임은 10년 동안 정체했다. 근로 의지를 상실한 니트(NEET·취업하지도 않고 취업교육도 받지 않는 사람)족이 대졸자를 중심으로 급증하고 있다.

    무리한 정규직 전환 약속

    그렇다면 ‘일자리 정부’ 문재인 정부는 잘 대처하고 있나. 1년도 안 됐지만 좋은 평가가 나오긴 어려울 듯하다. 일자리 정책들이 일자리 창출의 주역인 기업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무리하게 숫자만 채우려 한다’거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첫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응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요구는 2012년 나왔다. 통합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가 공약 1호로 발표했다. 2015년 12월 문재인 대표의 새정치민주연합은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비정규직 제도 4대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대선 유력주자 문 후보는 정규직 전환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대선에서 승리한 문 대통령은 취임 이틀 후인 5월 12일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했다. 그의 현장 발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환호했다. “임기 중에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한다. 우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을 드린다.” 공약이 5년 만에 정책이 된 순간이었다. 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도 “공항 가족 1만 명 모두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전환 비용이다. 정부는 공공부문에 관련 비용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당연히 빚더미에 시달리는 공기업들의 고민이 깊어갔다. 정 사장의 ‘연내 전환’ 약속은 무산돼 비정규직으로부터 ‘희망고문’이라는 반발을 샀다.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은 한 토론회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정규직 노조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규직 노조의 양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공기업들에서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정규직 노조와 갈등이 빚어졌다. 

    “전환 비용을 국민 세금에서 나가게 해선 안 된다”고 많은 전문가가 지적한다. 이들은 “무리한 정규직 전환보다는 비정규직에 대한 잘못된 차별을 없애가는 방안이 도입됐어야 했다”고 말한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은 충분한 준비 없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취임 직후의 졸속 발표, 공기업 현장에서의 갈등 유발, 전환 비용 부재에 따른 혼란이 한둘이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을 대폭 올렸다. 수년 전 노동계는 ‘시간당 1만 원’을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2020년까지 시간당 1만 원까지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일단 2018년엔 16.4% 오른 시간당 7530원으로 결정됐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현실화된 것이다. 새해엔 연봉 4000만 원을 받는 근로자도 최저임금에 미달이라고 한다. 청년 5명 중 1명꼴이라는 ‘사실상 백수’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프랜차이즈, 편의점, 주유소 어떻게 하나

    2017년 11월 5일 오후 서울 동작구 에듀윌 대방학원에서 열린 9급공무원 합격전략 설명회에서 참가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뉴스1]

    2017년 11월 5일 오후 서울 동작구 에듀윌 대방학원에서 열린 9급공무원 합격전략 설명회에서 참가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뉴스1]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일자리 확충에 어떤 충격을 줄지가 관건이다. 호주에 있던 GM, 도요타 등 자동차 공장들이 최근 전부 가동을 멈춘 것으로 보도됐다. 호주의 기업 환경이 매우 우수하다는데 무슨 일일까. 호주의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5860원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장이 문을 닫으면 일자리는 당연히 사라진다. 새해 국내에서 더 심각한 상황이 빚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프랜차이즈, 편의점, 주유소 등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직원의 비중이 높은 업계는 고민이 더 깊다. 가격 인상, 인원 감축, 무인점포 전환 등 인건비 절감 방안에 골몰하고 있다. 새해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정부가 제때 대응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는 자영업자도 많다.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분 일부를 대신 지급하기 위해 예산을 마련한 것은 비정상이다. 시장경제 원칙의 훼손이다. 혈세로 민간기업의 임금을 대신 내주는 상황을 만든 것은 정부 잘못이다. 그런 식으로 정부가 대신 지급하면 좀비 기업까지 살아남게 하는 비효율을 낳을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대선 직후 급하게 열린 최저임금위원회가 실태조사도 제대로 못 하고 졸속 결정을 내린 잘못을 지적했다. 이병태 KAIST 교수는 ‘정부 지원의 잘못된 선례’를 안타깝게 여겼다. 한국은 30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고용의 60%가량을 차지한다. 이런 후진적 고용구조를 세금으로 온존시키고 왜곡하는 것은 최악의 정책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를 확충하기로 했다. 그는 임기 내에 공무원 17만4000명 증원 공약에 맞춰 새해에 우선 9475명을 늘리기로 했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치보다 우리나라의 공무원 및 공공부문 일자리 비중이 낮다는 이유를 댄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어떤 사회 서비스 인력을 늘릴 것인지 계획을 밝혔어야 한다. 돈은 얼마나 드는지 설명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인원수 외에 공공부문의 서비스 질, 서비스 수요도 OECD 국가들과 비교했어야 했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비전과 실천 계획이 없는 공무원 증원은 국가의 혁신역량 추락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박동운 단국대 명예교수는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 증원에 세금 4조 원을 쓴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40조 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 경제 운이 좋았다. 외환위기에 따른 국가부도 위험을 전 정부에서 물려받은 김대중 정부에 비하면 아주 좋은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현안을 맞닥뜨린 이명박 정부에 비해서도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 국제경제 전망이 밝다. 한국은 2017년 3분기 경제성장의 75%가 수출에서 나왔을 정도로 수출 의존도가 높다. 그러니 해외 경제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 2018년 세계경제가 교역 증대와 투자 회복에 힘입어 탄탄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OECD는 새해 세계경제가 3.7%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국제금융센터는 새해 미국이 2.3%의 견조한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고용시장 개선으로 소비가 증가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가 좋은 자극을 주는 덕분이라고 한다. 유로존은 금융 완화 분위기여서 내수 중심의 성장 모멘텀이 유지될 전망이다. 다만 2019년 3월 ‘브렉시트’ 발효를 앞둔 불확실성이 회복세를 제약할 것이란 예상이다.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국은 6.7%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중국의 주요 기관들이 전망하고 있다. 경착륙 위험은 없다는 이야기다.

    1인당 실질 국민총소득 3만 달러 돌파?

    한국 경제 성장률에 대해서도 대체로 낙관적인 전망이 많다. 2017년 3분기에 7년 만에 가장 큰 폭인 1.5%(전 분기 대비)의 깜짝 성장을 거뒀다. 전년 동기 대비 3.8% 성장으로 3년 반 만에 최고 수치였다. 실질 국민총소득(GNI) 역시 3분기에 전기 대비 2.4% 증가했다. 연간 1인당 GNI가 2018년 3만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06년 2만 달러를 돌파한 지 12년 만의 ‘승급’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성장 전망에도 불구하고 체감경기는 여전히 좋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고용과 실질임금이 핵심이다. 새해 실업률은 전년과 비슷하지만, 취업자 수 증가 폭은 감소할 것으로 관측된다. 최저임금 인상 충격파로 물가가 들썩이고 청년들의 아르바이트 자리도 감소할 가능성이 높다. 청년들에겐 안팎으로 체감소득이 감소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치 논란이 많아지면서 경제는 뒷전으로 밀린 느낌이다. 출범 초기 7개월간 ‘체감경기’ ‘경제성장’ ‘국가경쟁력’ 등을 키워드로 한 신문 방송의 보도건수가 박근혜 정부 때에 비해 15% 안팎 감소했다. 

    새해 경제가 대체로 순항한다면 구조개혁에는 최적의 타이밍이다. 집권 초반이고 국민 지지도까지 높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이다. 어떤 집권 세력이라도 경제구조나 경제 운용 방식을 자신들의 희망대로 일시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법률, 행정조치, 재정 및 금융정책 등 가용수단을 동원하면 된다. 그러나 개혁의 성공은 쉽지 않다. 새로운 구조나 방식이 경제주체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시장에서 큰 부작용 없이 작동되어야 한다. 특히 지속가능성이 확인되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사람 중심의 경제’라는 표현을 썼다. 국가, 기업이 아니라 국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다. 대선 때 김상조 한성대 교수(현 공정거래위원장)는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이 양대 축이다. 아울러 침체된 내수를 재정을 통해 회복시키고 국민 개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비정규직, 하도급영세기업, 영세자영업자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개혁 추진 과정에서 경제위기론에 대한 부담을 이겨내지 못했다. 관료와 재벌에 다시 의존했고 그래서 실패했다.” 

    많은 정치인과 경제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한국 경제 구조의 개혁을 요구한다. IMF도 그중 하나로 연례협의단 6명이 2017년 11월 서울에서 또 한 번 개혁 필요성을 언급했다. IMF는 우선 한국 경제의 회복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어 IMF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조언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990년대 초반 7%에서 3% 이하로 하락했다. 노령화, 저출산, 노동생산성 증가 둔화 때문이다. 양극화와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다. 노인 빈곤, 청년실업, 불충분한 사회 안전망이 불평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다.” 

    IMF는 “경제성장 모멘텀을 보이는 지금이 구조 개혁의 적기”라고 봤다. 고용 증대와 생산성 향상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상품시장 및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해야 하며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를 확대하는 정책이 동반돼야 한다고 권고했다.

    IMF와 문재인 정부의 시각차

    2017년 7월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 앞에서 열린 '11년 만에 제시한 인상이 고작 155원! 노동자 우롱, 노동적폐 공범 경총' 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2017년 7월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 앞에서 열린 '11년 만에 제시한 인상이 고작 155원! 노동자 우롱, 노동적폐 공범 경총' 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한국은 ‘유연안정성(flexicurity)의 확충’을 노동시장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IMF는 권고한다.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을 함께 높여가는 것을 말한다. IMF 협의단은 이를 위한 실천과제로 정규직 근로자의 유연성 확대, 실업자에 대한 강력하고 포용적인 사회 안전망 구축,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 시행을 제시했다. ‘일자리가 아닌 근로자를 보호하는 것’이 유연안정성의 기본 원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안정성’이 우선이다. 쉬운 해고를 규정한 정부 지침 폐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이 그것이다. 반면 IMF가 제시한 유연안정성은 유연성을 먼저 내세우고 있다. 

    한국 노동시장의 현실 인식 및 처방에서 문재인 정부와 IMF 간에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진보진영이 합심하자’는 정권 운영의 원칙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는 18대 대선 패배 후 반성과 각오를 담아 펴낸 책 ‘1219 끝이 시작이다’(2013)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여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금산분리 등 시장규제를 고수했다. 작은 정부를 반대했으며 종부세로 부유층 증세를 했다. 국민의 정부 때부터 진행돼오던 민영화를 전면 중단했다. 노동의 유연화 역시 참여정부에서 더 진행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비정규직보호법 등으로 오히려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설명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에 재임 시절의 노동유연성 확대에 대해 후회한 장면과 연결된다. 노 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일부 받아들인 것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 

    노 전 대통령은 노동의 유연성을 확대한 조치를 후회했다. 문 대통령 역시 유연화의 확대 저지를 노 정부의 성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 정부가 노동의 유연성을 낮추는 쪽으로 정책을 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결국 IMF의 조언과는 반대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문 정부는 출범 4개월여 만에 박근혜 정부 노동개혁의 핵심인 ‘양대 지침’을 폐기했다. 양대 지침 중 하나는 저성과자 해고가 가능하도록 일반 해고를 허용한 공정인사 지침이다. 다른 하나는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불리한 근로조건을 도입할 때 노조나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받도록 한 법규를 완화하는 내용이 담긴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에 관한 지침이다. 양대 지침 폐지는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첫해 ‘사람 중심 경제’를 위한 정책 방향을 국민 앞에 공개했다. 아울러 소득주도성장, 일자리 중심 경제, 공정경제, 혁신성장의 4대 축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이 가운데 상대적으로 생소하게 들리는 것이 소득주도 성장론이다. 

    해외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기존 성장 전략을 부정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2011년 이후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임금주도 성장에 관한 보고서가 나왔다. 친자본적 분배정책과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대신 친노동적 분배정책과 임금주도 성장 전략을 추구하자는 주장이었다. ‘임금주도 성장론’으로 국내로 소개되기도 했다.

    한국 장악한 소득주도성장

    국내에서는 2012년부터 ‘소득주도 성장론’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논의됐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전제를 달았다. 그래서 수출주도와 낙수효과의 성장 전략 기조도 내수주도와 분수효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마침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맞붙은 18대 대선 국면이었다. 당시 민주통합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에서 관련 자료를 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선 공약으로 승격되지는 못했다. 

    초기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이론은 점차 정책의 모양을 갖춰가게 된다. 대선 패배 후 재기를 노리던 문재인 의원을 만나 정치적 힘을 얻은 결과였다. 2014년 7월 ‘소득주도성장의 의미와 과제’ 세미나에서 이의영 군산대 교수가 발표를 했다. 그해 11월 ‘부채주도성장에서 소득주도성장으로’ 세미나에서는 홍장표 부경대 교수(현 청와대 경제수석)와 강병구 인하대 교수가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이때 소득주도성장의 필요성을 역설한 문 의원의 인사말은 비교적 잘 정리돼 있었다. 

    2015년 3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소득주도성장과 광주형 일자리’ 토론회 인사말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가계소득을 높이는 소득주도성장을 위한 고용친화적 산업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달 새정치민주연합은 4월 재보선을 앞두고 ‘소득주도성장’을 포함한 공약을 발표했다. 유력 정치 세력의 공식 공약으로 처음 채택된 것이다. 이후 2년간 다듬어지고 확대돼 2017년 7월 급기야 한국 정부 정책의 핵심 기둥이 됐다. 국내에서 논의 시작 후 약 5년 만의 일이다. 규모가 큰 국가경제 단위에서는 첫 사례다.
     
    소득주도성장은 2017년 실제 정책의 모양으로 발표되었다. 이어 예산 확보 과정을 거쳐 새해에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이제 효과 논쟁이 적지 않게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소득주도성장은 국내에서 수개월간 매체에 소개되어 국민에게 알려지긴 했지만, 학계에서조차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는 한 토론회 주제발표를 통해 “소득주도성장은 우리나라 저성장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혹평했다. 단기 성장률만 높이는 분배 중시의 경기부양책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장기성장률(잠재성장률)은 5년마다 1%포인트씩 하락하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현 대통령 임기 중 이 추세를 막지 못하면 차기 대통령 임기 초 0%에 진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총수요 진작에 의한 경기부양보다는 정체된 인적자본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김영식 서울대 교수도 “수요 측면만 강조하고 공급 측면을 무시하면 반쪽짜리 정책에 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제학 교과서 다시 써야’ 냉소

    노동경제학계의 권위자인 남성일 서강대 교수는 소득주도성장을 평가 절하했다. 그는 “돈을 많이 줘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정책이 있다면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왜 시도하지 않았겠나?”라고 반문한다. 남 교수는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한다면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 교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노동개혁은 해고 요건 완화 등 노동유연화로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외국기업 유치 등 긍정적인 성과를 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반면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단기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정수 서강대 교수는 세미나 주제발표를 통해 소득주도성장의 허상을 지적했다. 이 이론이 토대를 두고 있는 ILO의 ‘포용적 성장을 진작시키는 최저임금정책’ 보고서(2013)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무리한 가정이고 실증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소득주도성장 지지자들은 소비 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려줘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정책이 유효하다고 본다. 하지만 국내 현실을 대입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박 교수의 분석 결과다. 인위적인 임금인상은 저임금 근로자를 많이 고용하고 있는 영세 기업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국내기업의 비용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국내 생산을 해외 수입으로 대체해 실업을 늘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수정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도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에 소득주도성장 전략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경제로 포장한 정치투쟁 아닐까?

    이근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경제전문가 그룹은 저서 ‘2008 한국경제대전망’에서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이오, 헬스케어 등 산업 부문에서 중국 등과 경쟁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일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초반에 구사한 경제정책들은 방향성이 짙다. ‘사람 중심’ ‘소득 중심’ 개념을 연결해 대대적인 교체 실험, 이식 수술을 하는 느낌이다. 신자유주의적 제도와 관행과 운영 구조를 철저히 깨서 지우는 방향이다. 추상적이지만 그 빈자리에 ‘사람’을 넣는다는 구상인 것 같다. 경제로 포장한 정치투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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