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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그들이 이혼 못 한 진짜 이유

  •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그들이 이혼 못 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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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가 이혼하려던 까닭

헨리 8세와 앤 불린을 그린 풍자화, 1728, 영국박물관 소장

헨리 8세와 앤 불린을 그린 풍자화, 1728, 영국박물관 소장

영국 헨리 8세(재위 1509∼1547)의 말썽 많았던 이혼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의 왕비 캐서린은 본래 헨리 8세의 형 아서 왕자의 아내였다. 그런데 아서가 결혼한 지 20주 만에 병으로 죽었다. 부왕 헨리 7세(재위 1485~1509)는 캐서린이 모국 스페인에서 지참금으로 가져온 황금 20만 두카트를 반환하기 싫었다. 황금에 눈먼 부왕 때문에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합은 교회법상 근친상간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들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왕비 캐서린의 소생은 메리 공주만 살아남았다. 게다가 캐서린은 나이가 들어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헨리 8세와 측근들의 고뇌가 깊어졌다. 만일 메리 공주를 유럽의 다른 왕가에 시집보내면 장차 영국의 왕위 계승권이 그쪽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헨리 8세가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영국은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가 필요했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서둘렀으나,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첫째, 전임 교황이 예외적으로 그들의 혼인을 허락했는데, 이를 번복하자니 교황청의 체통이 손상된다. 둘째, 캐서린의 친정 조카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다. 그가 이혼에 반대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정치적으로 부담을 느꼈다. 

애당초 헨리 8세는 교황파로 분류됐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자 이에 강력히 반발한 이가 헨리 8세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헨리 8세의 태도에 감명을 받아, ‘신앙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이혼 문제로 사정이 달라졌다.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을 원하는 일부 성직자 및 귀족들의 지지에 기대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선포했다. 이에 일부 귀족들이 반발했다. 대법관으로서 신교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 주교가 대표적이었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작가다. 성난 헨리 8세는 모어 등을 처형했다. 크게 실망한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헨리 8세를 파문했다. 

영국 왕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가톨릭 수도원을 해산했다. 국토의 6분의 1을 차지했던 수도원의 토지가 한순간에 교황의 통제를 벗어나 국왕에게 귀속됐다. 교황청과 왕권의 대립은 극한에 도달했다. 

사실 헨리 8세의 종교적 성향은 무난했다. 그는 인문주의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유사했다. 교리상으로는 교황청과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혼 문제로 교황청과 대립하다 ‘영국국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앤 불린(재위 1533~1536)과 재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헨리 8세는 전후 6명의 왕비를 맞이해 둘은 참수하고 둘은 추방하는 등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왕자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열 명의 왕자보다 믿음직한 한 명의 공주가 있었다.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다. 그녀가 통치한 45년 동안 영국은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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