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조선의 아버지들

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거가(居家) 선비 유계린의 ‘거가십훈’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6-01-27 17:45:5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5세기 말부터 4차례 거듭된 사화로 당대의 진보세력 사림파가 입은 손실은 컸다. 하지만 그들은 소멸되지 않았고, 결국 조선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장했다. 조선 초기 사림파의 일원 유계린 역시 ‘거가십훈’의 실천을 통해 멸문의 위기에서 탈출했고, 그의 학문적 지도를 받은 두 아들은 전국적인 명사로 자랐다.
    사화(士禍)는 15세기 말 조선 연산군 때 시작돼 16세기 전반 명종 때까지 4차례나 거듭됐다.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사화마다 발생 배경이나 전개 과정 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림파, 곧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훈구파와 왕실 외척들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당한 일련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현실주의자들이 성리학 정치이념을 구현하려 애쓴 이상주의자들을 거세한 것이다.
    거듭된 사화로 사림파가 입은 손실은 막대했다. 그러나 사림파는 소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되레 조선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장했고, 17세기 들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따져볼 겨를은 없다. 다만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들이 세찬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 배경엔 아버지들의 비상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김종직-김굉필-유계린

    새삼스럽게 유희춘(柳希春·1513~
    1577)이라는 호남 성리학자 집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유희춘은 말년에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정3품)에 이르렀다. 당대의 석학 김안국(金安國·1478~1543)과 최산두(崔山斗·1483~1536)의 문인이다. 청년 시절부터 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사후에는 전라도 담양과 무장, 함경도 종성의 여러 서원에 배향됐다. 노년에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됐다. 유희춘의 아내 홍주 송씨도 당대의 여류 문사였다. ‘덕봉(德峰)’이란 호로 이름난 그녀는 한시(漢詩)에 능통했다.
    이렇게 몇 줄로 뭉뚱그려놓고 보면, 그 집안에 과연 무슨 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실상은 비참했다.
    그들은 연거푸 4차례의 사화에 얽혀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성리학자 가문의 전통을 굳게 지키며 성장을 거듭했다. 결국은 명문가가 됐다. 그런 성공의 이면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다.
    유계린(柳桂隣·1478~1528)은 조선 초기 사림파의 일원이다. 그의 스승은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다. ‘소학동자(小學童子)’라는 별호로도 유명한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 사건의 발단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한 편의 글. 그 저자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으로, 그는 고려 충신 길재(吉再·1453~1419)의 학통을 이어 조선 초기 사림파의 종장(宗匠)이 됐다.
    김종직은 ‘세조실록’에 실린 이 글에서 은연중 세조의 왕위 찬탈을 중국 고대에 항우가 진(秦) 의제를 살해한 사건에 비유했다. 유자광 등 훈구파는 그 점을 문제 삼았다. 유자광 등은 김종직을 불충한 인물로 규정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어 목을 자름)했다. 그들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과 김굉필 등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고, 조정의 권력을 독점했다.



    해남 성내에 숨어 살아

    무오사화 6년 뒤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이번엔 왕실 외척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일부 훈구파와 사림파를 역신(逆臣)으로 몰아 잔혹하게 처벌했다. 유계린의 스승 김굉필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이 사건에 다시 연루됐다. 김굉필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당해 결국 거기서 사약을 마시고 운명했다.
    유계린은 두 차례의 사화로 스승과 많은 동료, 선배를 잃었다. 그에게 친아버지와도 같던 장인 최부(崔溥·1454~1504)도 희생됐다. 최부는 이미 무오사화 때부터 김굉필과 유배형을 당했다. 그는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김굉필 등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흔히 조선 초기 사림파라면 영남 출신 성리학자들만 떠올린다.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경기, 충청은 물론 호남에도 사림파가 상당수 존재했다. 최부는 호남 성리학자의 대표적 인물로서 김종직의 아낌을 받았다. 최부의 호는 금남(錦南), 훗날 ‘표해록(漂海錄)’이란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왕명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 부친상을 당했다. 귀향을 서두르던 중 그가 탄 배가 표류했다.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도 중국을 다녀왔다(1488).


    기묘사화로 장남 잃어

    ‘거가십훈’이 유계린의 독특한 생활철학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리학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도덕철학이다. 15~16세기 조선 사회에서 이러한 도덕률을 존숭하고 몸소 실천하는 행위는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란 평가를 받을 만했다. 당시 대다수 지배층은 이러한 도덕률을 무시하고 현실적 이익과 쾌락을 노골적으로 추구했다. 유계린이 지배층의 구태를 비판하고 성리학적 도덕실천운동에 나선 것은 특기할 일이다.
    결과적으로 유계린은 ‘거가십훈’의 실천을 통해 멸문의 위기에서 탈출했다. 거듭된 사화로 그의 집안은 자칫 몰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좌절의 위기 속에서 유계린은 오히려 성리학적 가르침의 온전한 구현을 추구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성리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향촌사회에서 드높아졌다. 집안 살림살이도 더욱 안정됐고, 가족의 화목과 유대감도 강화됐다. 그의 학문적 지도를 받은 두 아들, 유성춘과 유희춘은 전국적인 명사로 자랐다.
    유계린이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큰아들 유성춘(柳成春·1495~1522)은 약관 20세에 문과에 급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유성춘은 윤구, 최산두와 더불어 ‘호남 삼걸’로 불릴 만큼 명망이 높았다. 중종 때 조정에 진출한 그는 개혁정치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정치적 동반자였다.
    유성춘은 곧 이조정랑에 등용돼 사림파 정계 진출의 산파 노릇을 했다. 이조정랑은 6품 이하 당하관의 등용에 상당한 자율권을 행사했다. 아울러 삼사(三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 임용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직이다. 유성춘은 조광조와 더불어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적 역풍이 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사림파가 일망타진됐다. 유성춘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는 경상도 금릉현으로 귀양 갔다가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자 이내 숨을 거뒀다. 향년 28세였다. 유계린은 이런 비극적 사태에 직면해 말을 잃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큰아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뜬 지 6년 만에 눈을 감았다.
    말년의 유계린은 실의 속에서도 차남 유희춘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그의 학문적 성취에 자신의 힘과 능력을 다 바쳤다. 유희춘은 “선친은 3남 중에서 나를 특별히 아끼시어 매번 몸소 업고 거닐며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는 이 아들이다’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장자 유성춘이 쓰러진 뒤 아버지는 더욱 유희춘을 아끼며 채찍질했다. “늘 네 마음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 한번이라도 마음이 치우치는 경우가 있다면, 그로 인해 일이 어긋나고 윤리가 흐려지기 마련이다.”
    유계린이 세상을 뜬 뒤 유성춘의 자손은 유희춘에게 의지해 문호를 보존했다. 유성춘의 아들과 손자들, 즉 유연개(柳沿漑)를 비롯해 유광운(柳光雲)과 유광문(柳光雯)은 유희춘의 각별한 보살핌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을사사화로 차남마저…

    사림파 유씨 일가의 수난은 3차례의 사화로도 끝나지 않았다. 유계린의 차남 유희춘도 을사사화에 얽혀 고난을 겪었다. 그는 20년 동안 궁벽한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비참한 신세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버지 유계린은 그런 비극을 직접 겪지 않은 점이리라. 유희춘은 아버지가 작고한 지 10년 만에 문과별시에 급제해 조정의 반열에 섰다(1538). 어릴 적부터 그는 아버지가 실의를 극복하고 ‘십훈’을 실천하며 성리학자의 외로운 길에 매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무한에 가까워 아버지를 자신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그는 훗날 ‘거가십훈’을 글로 적어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굳게 지키라고 당부했다.
    유계린은 아들 유희춘의 운명을 예감했다. 언젠가 아버지는 ‘주역’을 가지고 아들의 운명을 점쳐,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네(유희춘) 운명은 (…) 정괘(井卦) 구오(九五)에 해당한다. 그 ‘괘사(卦辭)’는 ‘한 번은 고개를 숙이고 한 번은 하늘을 우러르노라. 초수(楚水)와 회산(淮山) 땅에 한이 더욱 깊구나’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네가 장차 멀리 귀양 갈 조짐이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나서더라도 정상에 오르기를 기약하지 말고, 중도에 몸을 거두어 전원으로 돌아감이 좋으니라.

    사화라면 치를 떨던 유계린이다. 그는 둘째아들이 장차 과거에 급제해 큰 뜻을 펼 수 있기를 강렬하게 바라면서도 행여 아들이 무사하지 못할까봐 근심했다. 사림파에 대한 기득권층의 질시와 탄압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가 한쪽으로 기운 권력 판에서 감히 정의가 구현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유계린의 염려는 현실이 됐다. 결국 그의 스승과 장인, 두 아들에 이르기까지 온 집안이 ‘4대 사화’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됐다. 그러나 유씨 일가는 시류를 좇아 기성 세력에 아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를 이어가며 절개와 지조를 숭상하고, 성리학의 근본이념에 투철하고자 했다. 16세기 후반, 경향 각지엔 그와 호흡을 같이한 다수의 성리학자 집안이 있었다.



    사림파의 찬란한 부활

    결국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선조의 즉위와 더불어 그동안 사화에 시달리던 성리학자들이 대거 조정에 복귀했다. 유희춘도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선조는 유희춘의 학덕을 높이 평가해 대사헌과 전라감사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했다. 이후 그의 여생은 순탄하고 평안했다. 그가 누린 말년의 영예는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과 인격을 부단히 연마한 유희춘 자신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거가십훈’이 상징하는 아버지 유계린의 강철 같은 신념과 실천의지를 토대로 했다.

    ◇ ‘아버지 유계린’의 가르침
    - 효(孝)를 실천하라.
    - 집안을 원만하게 다스려라.
    - 함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라.
    - 가문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에 힘써라.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