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조선의 아버지들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일상을 經典 가르침대로…김숙자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2/2

배우는 순서와 精讀 강조

김숙자는 청년 시절부터 문명(文名)이 높았다. 한때 세종은 3~4명의 선비를 중국에 보내 과거시험을 치르게 할 계획이었다. 김숙자는 그때 선발된 선비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경학(經學)에 탁월했고 문장(文章)도 아름다웠다. 따르는 제자도 많았다.
그런데 그는 공자의 선례를 따라 제자들의 엽등(躐等,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감)을 금했다. 배움엔 반드시 순서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초보자에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幼學字說)’ ‘정속편(正俗篇)’을 가르쳤다. 이것을 완전히 습득한 사람에겐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이어 ‘효경(孝經)’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주역(周易)’ ‘예기(禮記)’를 차례로 읽게 했다. 맨 마지막엔 ‘통감(通鑑)’ 및 제사(諸史)와 백가(百家)를 읽게 했다. 그런 김숙자의 문하에선 겉멋을 부리며 함부로 알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독서에도 엄격한 법이 있다고 가르쳤다. 무슨 책이든 한 글자씩 모두 정확히 이해하라며 정독을 주문했다.
김숙자의 일상생활은 곧 경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곤궁할 때는 배움을 몸소 실천하고, 영달하여 남을 다스릴 때는 모든 것을 성현(聖賢)의 가르침대로 하라.”(‘선공기사’) 유난히 중시한 것은 ‘소학’이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그는 ‘소학’에 명시된 대로 물 한 잔조차 마시지 않았다. 초빈을 마친 뒤에야 겨우 죽을 들었다. 당시 풍속은 선비 집안에서도 불가의 장례법을 따랐다. 그러나 김숙자는 “유독 확고부동해 염(殮), 습(襲), 우(虞), 부(祔), 연(練), 상(祥) 등의 의식을 주자(朱子)의 예(禮)에 따라 알맞게 거행했다.”(‘선공기사’)
‘불법 이혼’ 문제로 그는 가족 윤리에 어긋났다는 비난과 함께 세상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시골에 칩거하며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성리학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성리학적 사회 개혁의 선두에 섬으로써 그는 재기했다.



淸水白石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의 초상.

김종직이 목격한 아버지 김숙자는 청렴한 관리이기도 했다. 그가 고령현감(경상북도)으로 부임했을 때 전임자의 잘못으로 창고의 곡식이 장부보다 3000여 곡(斛)이 적었다. 김숙자는 전임자의 잘못을 감추고, 임기 내내 절약에 힘써 문제를 조용히 해결했다.
일선 행정업무에도 능통했다. 이두에 익숙했고, 판결을 공정하게 잘하기로 이름났다. 그는 두 고을의 현감을 지냈는데 그때마다 스스로 다짐하기를, “토지가 있고 백성이 있으니, 여기서도 나의 학문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며 낮은 벼슬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를 모범으로 삼아 선정을 베풀었다. 개령현감(경상북도) 시절엔 세 곳에 방죽을 파서 700~800결의 농지에 혜택을 줬다.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향교를 대대적으로 수리해 선비들이 배움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했다. 공무의 여가에 유생들의 학업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그가 재임한 고령과 개령에서 여럿이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모두들 김숙자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전들을 다스리는 데도 뛰어났다. ‘약속(約束)’이라는 업무규정을 만들어 아전들이 협잡을 부리지 못하게 통제했다. 아전들은 원님 김숙자를 ‘청수백석(淸水白石)’이라 부르며, 청백함과 공정함을 칭송했다.
세종이 전라도 지방의 전품(田品, 토지 등급)을 실정에 맞게 개정하려 했을 때 그는 경차관(敬差官, 후대의 어사와 같음)이 되어 남원, 장흥, 옥과, 순천 등지에서 직무를 수행했다. 다수의 경차관이 순찰사(관찰사)와 짜고 부정을 저질렀으나 김숙자는 달랐다. “조정도 속일 수 없거니와 백성을 어찌 저버릴 수 있는가.” 이에 백성들이 기뻐하며 닭고기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김숙자는 그들의 마음만 받을 뿐이었다. 김종직은 회고하기를, 훗날 “그 지방 사람들이 나(김종직)를 만나면 그 은덕에 감격하며 칭찬하였다”고 했다(‘선공기사’).
김숙자는 어떤 벼슬을 하더라도 백성의 의식주를 염려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아끼지 않았다. 김종직은 아버지의 태도에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나는 바보라서 좋다”

1455년(세조 1년) 12월 김숙자의 막내딸이 결혼했다. 그때 자신의 소회를 아들들에게 토로했다. “나는 품계가 이미 3품에 이르렀고, 남혼여가(男婚女嫁, 아들딸의 결혼)도 끝냈다. 할 일을 마쳤으니 어서 사직서를 작성해 오거라.”(‘선공기사’)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밀양으로 돌아갔다. 평생 청렴하게 살았기에 두어 달 만에 식량이 떨어졌으나 태연했다. 어쩌다 잔치에 초대받아도 말을 타지 않고 죽여(竹輿, 대나무를 엮어 만든 가마)로 갔다. 이런 김숙자를 사람들은 ‘달존(達尊, 세상이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 했다.
잇속에 밝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바보’였다. 재산을 불릴 줄도 모르고, 위세를 부리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김숙자는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는 아들 김종직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졸(拙)하다(못났다)’고 말하는데, 졸한 것이 진정으로 큰 보배로다. (…) 나는 진실로 그런 말을 다행으로 여긴다. 너도 내 아들인지라, 나중에 졸하기로 이름이 날 것이다. 그런 세평에 부디 괘념하지 말아라.”(김종직, ‘선공유사’)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김종직은 문과에 급제해 세조와 성종 때 여러 요직을 두루 지냈다. 그럼에도 권귀(權貴)들에게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사림파의 영수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세상의 높은 추앙을 받았다. 끝내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 시체의 목을 베는 벌)의 벌을 받았다.
하지만 김숙자, 김종직 부자의 관작은 오래지 않아 복구됐다. 그들은 조선 성리학계의 별이 되어 수백 년 동안 후학들의 길잡이 구실을 했다. 한때 좌절의 늪에 빠진 것처럼 보이던 김숙자의 삶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사림파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으니 놀라운 일이다. 기회는 위기 속에서 잉태되기 마련인가.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다 김숙자처럼 탁월한 학자 또는 공직자가 돼야 할 까닭은 없다. 우리 자신이 허물어진 그 지점에서 다시 일어나 미래 지향의 가치를 추구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성취 그 자체가 아니라, 아마도 우리의 성실한 태도일 것이다. 



‘아버지 김숙자’의 가르침
- 인륜의 출발점은 결혼에 있다.
- 배움을 몸소 실천하고, 모든 것을 성현(聖賢)의 가르침대로 하라.
- 하찮은 직책이라도 정성을 다하라.

백 승 종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신동아 2016년 3월호

2/2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목록 닫기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댓글 창 닫기

2019/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