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역사탐구

홍위병 이끈 35/45세대 홍위병 딛고 新중국 주도

‘세기의 세대전쟁’ 중국 문화대혁명 50주년

  • 모종혁 | 중국 전문 칼럼니스트

    입력2016-05-02 08:39:23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마오, ‘반자본주의 투쟁’ 허울로 반대파 제거 노려
    • 1935~45년생 선배들이 文革 현장에서 홍위병 선동
    • 중·노년 학자들에게 칼끝 겨눈 청년 학자들
    • 내부 노선투쟁이 무력투쟁으로…22만 명 희생
    • 날개 단 35/45세대, 천덕꾸러기 된 홍위병 세대
    1966년 8월 18일 수도 베이징의 한복판 톈안먼(天安門)광장. 사위가 어두운 새벽부터 붉은 완장을 찬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베이징의 각급 학교에서 차량을 타고 혹은 걸어서 광장으로 집결했다. 연령대는 앳된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했다. 일부는 붉은 깃발을, 일부는 각종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었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래 여러 차례 열병식이 열렸지만, 학생들이 톈안먼광장에 그리 많이 몰린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오전 8시가 넘자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톈안먼 앞에 섰다. 한 노인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진수이차오(金水橋)를 천천히 건넌 그는 주변 학생들과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며 톈안먼으로 향했다. 많은 학생이 감격해 눈물을 흘리면서 외쳤다. “마오(毛) 주석 만세!”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쩌둥은 톈안먼 성루에 올라 먼저 각급 학교의 학생 대표들을 사열했다. 이때 베이징사범대 부속중학 여학생이 마오에게 ‘홍위병(紅衛兵)’이라 쓰인 완장을 채워줬다. 마오는 성루 위에서 자신에게 열광하는 ‘학생 군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 홍위병은 “마오 주석께서 홍위병에 참가하셨다. 우리를 후원하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고 외쳤다.

    그해 마오는 73세였으나, 2시간 넘게 걸린 집회에 꼿꼿이 선 채 참여했다. 집회 후 100만 명의 행렬도 사열했다. 마오는 “투쟁의 규모가 아주 크다. 학생 대중을 확실히 발동시켰다. 전국 인민들에 대한 사상혁명화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뻐했다. 광장 집회는 11월까지 7차례 더 열렸고, 1300만 명의 홍위병이 참가했다.





    ‘四舊’ 유적·유물 파괴

    적지 않은 홍위병들은 “대중에게 혁명사상을 퍼뜨리겠다”며 10여 일 동안 걸어서 상경했다. 그들은 곧바로 가지 않았다. 도중에 ‘사구(四舊,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눈에 띄는 대로 파괴했다. 마을마다 인민재판을 열어 반혁명세력으로 몰고 처단했다. 누군가가 특정인을 향해 “주자파(走資派)!” “반동(反動)!”이라 외치면 그 집에 들어가 가산을 몰수했다. 홍위병들은 반동분자를 끌고 나와 때려죽였다. 그야말로 대륙을 ‘무법천지’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일부는 톈안먼광장 집회가 열리기 훨씬 이전부터 학교나 마을에서 반동분자를 색출해 징벌했다. 이 시기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은 이들 중 볜중윈(卞仲耘)도 있었다. 볜중윈은 베이징사대 부중의 당서기이자 부교장이었다.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지만 194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급진적인 역사학자 왕징야오(王晶堯)와 결혼도 했다. 베이징사대부중은 중국 최고의 귀족학교였다. 마오쩌둥,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 최고위급 지도자들의 자녀가 수학했다. 문혁이 일어나자 볜은 출신성분 때문에 주자파로 몰렸다. 대중집회에 수없이 끌려 나가 조리돌림을 당했다.



    毛의 반대파 제거 속셈

    1966년 8월 5일 볜중윈에게 최후가 닥쳐왔다. 이날은 마오쩌둥이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발표해 홍위병들을 극렬히 선동했다. 늦은 오후 홍위병들이 각목을 들고 볜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볜을 포박해 끌고 나와 인민재판을 열었다. 볜의 죄상을 열거한 뒤 몽둥이질을 시작했다. 얼마 안가 볜의 몸은 경직됐고 숨이 멈췄다. 볜은 문혁 발발 후 베이징에서 피살당한 첫 교원이었다.

    이 집회를 주도한 이들 중 한 명이 쑹빈빈(宋彬彬·1947년생)이다. 바로 첫 톈안먼광장 집회에서 마오에게 완장을 채워준 여학생으로, 인민해방군 대장이던 쑹런충(宋任窮)의 딸이다.

    문혁(文革) 이전의 마오에겐 행정 권한이 없었다. 1958년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류사오치를 정점으로 한 실무파와 혁명 원로들에게 실권을 넘겨줬다. 마오와 류는 후난(湖南)성 출신의 동향이다. 마오의 고향 사오산(韶山)과 류의 고향 닝샹(寧鄕)은 불과 50여㎞ 거리라 사투리가 같다. 마오는 내전과 중일전쟁 시기에 류를 신뢰했다. 건국 후에는 줄곧 후계자로 삼았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오의 이런 생각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1963년 류가 사청(四淸)운동을 일으키자 마오는 분노했다. 류는 급속한 인민공사화에 따른 오류와 관료들의 거짓 보고를 시정코자 했다. 이를 위해 아내인 왕광메이(王光美)를 농촌에 보내는 등 실태조사를 벌였다. 여기서 발견된 회계 부정, 창고의 재고, 관료들의 재산 축적, 노동력 분배 문제 등을 해결하려 대중운동을 벌였다. 이후 마오가 반격해 운동 기조는 사상·정치·조직·경제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마오는 류가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마오는 권력욕의 화신이긴 해도 함께 고생한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자신과 권력투쟁을 벌인 왕밍(王明), 역린을 건드린 펑더화이(彭德懷) 등을 권부에서 내쫓았으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숙청 방식과 달랐다. 하지만 마오는 문혁을 발동하면서 류샤오치와 그의 추종자 일부를 축출하고 죽일 심산이었다. 이처럼 마오는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이란 허울을 앞세워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되찾으려 문혁을 일으켰다.

    문혁이 발발한 뒤 홍위병들의 난동은 마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마오는 수십 년간 전장을 누빈 군사 지도자였다. 목적과 수단을 위해 병사나 인민이 죽는다고 눈도 깜짝 않았다.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아사(餓死)해도 모른 척했다. 홍위병들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며 당·정 간부들과 사회 각계 지도층, 심지어 혁명 원로들을 조리돌림하고 구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조반유리(造反有理, 반항과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며 정당성을 부여했다.

    주목할 점은, 문혁 이전에는 마오에 대한 개인 우상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1959년 펑더화이에 뒤이어 국방장관이 된 린바오(林彪)가 총대를 멨다. 린은 1963년 ‘마오주석 어록’을 발간해 군대 내에서 학습토록 했다. 또한 1년 전 사고로 순직한 군인 레이펑(雷鋒)을 영웅화하는 데 몰두했다. 레이펑은 생전에 마오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한 일기를 남겼다. 마오가 “레이펑 동지에게 배우라”고 지시하자 순식간에 학생들의 숭배 대상이 됐다.

    우리가 보통 ‘문혁’ 하면 떠오르는 4인방(四人幇)과 캉성(康生)도 문혁 이전에는 존재감이 없었다. 장칭(江靑)은 마오의 제지를 받아 선전 부서의 간부로만 활동했다.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은 상하이(上海) 시당에서 일했고, 왕훙원(王洪文)은 일개 공장 간부에 불과했다. 캉성은 공산당 중앙서기처의 서기였지만 원로들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옌안(延安) 시기 캉이 적색 테러를 두 차례나 일으켜 동료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35/45세대의 적극 협력

    1966년 5월 16일 마오는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문혁 발동을 결정하고 ‘5·16 통지’를 내려보냈다. 그 뒤 두 달여 만에 전국 학교에서 홍위병이 조직됐다. 학내에서 ‘35/45세대’가 적극 협력했기 때문이다. 35/45세대는 1935년에서 1945년 사이에 태어나 붙은 이름이다.

    이들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 전후에 초등학교를 다니며 소년선봉대에 참여했다. 중·고교에선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반우파운동, 1963년 사청운동 등도 경험했다. 정식으로 사회주의 교육을 받고 대중투쟁을 거친 첫 세대였다. 문혁이 발발했을 때는 대학 졸업을 코앞에 뒀거나 각급 기관의 초급 간부로 있었다.

    베이징 홍위병들을 지도한 조반파(造反派)의 5대 리더 중 4명이 35/45세대였다. 5대 영수는 베이징대 강사 녜위안츠(聶元梓·1921년생), 칭화(淸華)대 4학년 콰이다푸(蒯大富·1945년생), 베이징사대 조교 탄허우란(譚厚蘭·1937년생), 베이징항공대 4학년 한아이징(韓愛晶·1945년생), 베이징지질대 석사생 왕다빈(王大賓·1944년생)을 가리킨다. 5월 25일 녜위안츠는 철학과 강사 및 조교 6명과 공동명의로 베이징대 총장과 부총장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이를 시발로 대륙 전역은 대자보 홍수로 뒤덮였다.

    녜위안츠는 베이징대 내 청년 학자들을 대표해서 대학 지도부를 공격했다. 2006년 베이징대 역사학과 왕위안저우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문혁 전 베이징대 노년 학자와 청년 학자의 갈등과 긴장이 심각했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때 대만으로 건너간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대륙에 남았다. 1956년 공산당은 이들에 대한 포섭과 입당을 결정했다. 또한 교육부는 1961년 ‘대학교육 60조’를 발표해, 이들의 법적 지위를 교수나 부교수로 보장했다.



    복음 같은 ‘5·16 통지’

    1958년 교육부가 대학 입학정원을 크게 늘렸기에 교원을 증원해야 했다. 때문에 갓 석사학위를 취득한 청년 학자들을 대거 강사로 임용했다. 문제는 이들 강사가 오늘날의 비정규직처럼 신분이 불안정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통 사회주의 교육을 받아 대부분 공산당원이었고, 일부는 학내 당 간부직을 꿰차고 있었다.

    녜위안츠가 대표적이다. 그는 17세에 입당해 관료로 일했으나 정식 대학교육은 이수하지 못했다. 1963년 베이징대에 온 뒤 경제학과 부학과장을 거쳐 철학과 당지부 서기를 맡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강사 신분에서 못 벗어나고 있었다. 탄허우란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베이징대 정치교육학과를 졸업했지만, 문혁이 터졌을 때는 베이징사대 조교 2년차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겐 우수한 학력과 걸출한 학술 성과로 무장한 40~60대 중·노년 학자들이 넘어설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었다. 노년 학자들은 교육부의 신진 교수 양성 방침에 따라 청년 학자들이 일정한 연구 성과를 내도록 쉴 새 없이 다그쳤다. 청년학자들은 연구와 강의뿐 아니라 학생 관리, 당직 업무, 대중운동 지도 등을 모두 떠맡았다. 평소 심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엄청났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5·16 통지’는 청년 학자들의 숨통을 터주는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통지문에는 “문화대혁명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반당·반사회주의로 나가는 소위 ‘학술권위’의 부르주아적 입장을 철저히 폭로하고, 학술·교육·언론·문화·출판계의 부르주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서 지도권을 빼앗자”고 적혀 있었다. 통지문의 초안은 천보다(陳伯達), 캉성, 장칭 등이 작성했고 마오쩌둥이 최종 수정했다. 마오가 당시 대학 사회의 긴장 양상을 알 리 없었지만 장칭은 달랐다. 그는 오랫동안 선전부서에 근무하면서 청년 학자들과 교류했다.

    문혁이 발발하자 20~30대 강사와 조교가 앞장서 노년 학자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노년 학자들의 과거 행적을 물고 늘어지며 반동분자로 몰아세웠다. “건국 이후 교단을 점령해 교육과 연구를 농단했고, 청년 학자들의 연구를 방해하고 강좌 개설을 불허했다”고 성토했다. 왕위안저우 교수는 “마오를 지지하며 문혁을 이끈 조반파의 적극성과 자발성은 당시 사회적 요인에서 기인한다”며 “조반파는 학교 내부에서 일찍부터 존재한 각종 모순을 적극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대학 강사나 조교, 중·고교 청년 교사들은 학생들의 기숙사 생활을 관리하고 당 사상과 이념을 교육하는 지도원(輔導員)이었다. 학생들을 선동하기 쉬웠다. 이에 반해 노년 학자와 중년 교사는 학생들과 거리감이 있었다. 35/45세대의 지도에 가장 열렬히 반응한 학생들은 당·정·군 간부 자녀들이었다. 쑹빈빈처럼 출신성분이 좋은 이들이 홍위병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기도 했다. 훗날 이들 조직을 ‘라오(老)홍위병’이라 부른다. 물론 모든 학생이 35/45세대에게 휘둘린 것은 아니다. 기존 당·정 조직을 옹호하는 홍위병도 적지 않았다.

    그 외에도 홍위병들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특히 지방에선 서로 전투를 벌일 만큼 갈등이 심각했다. 대표적인 도시가 내륙의 충칭(重慶)이었다. 조반파는 1966년 5월 29일 칭화대 부속중학에서 처음 홍위병을 조직했다. 홍위병 운동은 들불처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7월 충칭에 도래했다. 각급 학교에서 조직된 홍위병들은 학내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탈권(奪權)투쟁에 들어가 8월 15일 충칭사범대에서 처음 성공했다. 이를 기념해 홍위병들은 연합체 ‘8·15(八十五)’을 결성했다. 이들은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기업과 공장을 무대로 한 탈권투쟁에 돌입했다.


    내전으로 치달은 노선투쟁

    이처럼 군중운동으로 변모하면서 홍위병들은 노선 충돌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로 인해 홍위병들은 크게 두 개로 갈라졌다. 기존의 8·15,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학생들이 주동이 된 노동자규찰대가 그것이다. 갓 분열됐을 때만 해도 두 조직은 토론과 대자보를 통한 상호 비판에 머물렀다. 하지만 대립의 양상은 점차 치열해졌다. 12월 4일 다톈완(大田灣)운동장에서 열린 대중집회에서 두 조직이 처음으로 패싸움을 벌여 수십 명이 다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 간 노선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1967년 1월 상하이에선 조반파의 지도 아래 홍위병들이 시 당위원회와 정부를 장악하는 ‘1월 폭풍(暴風)’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이를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엎어버리는 대혁명”이라면서 전면적인 권력 탈취를 지시했다. 탈권투쟁이 학교와 공장을 넘어 당·정·군까지 파급된 것이다. 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홍위병들의 분파 투쟁도 가속화했다. 2월 8·15 홍위병들이 충칭조반연합위원회를 결성하자 노동자규찰대는 반도저(反到底)라는 새 연합체를 조직했다.

    4월, 무너진 당·정 조직을 대체할 혁명위원회의 간부를 선출하면서 홍위병 분파들은 사사건건 충돌해 무력투쟁으로 치달았다. 그 배후에 장칭이 있었다. 4월 3일 베이징에서 장칭은 라오홍위병에서 소외된 홍위병들을 모아 사삼파(四三派)라는 새 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장칭의 후원 아래 무력으로 지방의 기존 조직을 접수하려 했다. 7월 장칭은 허난(河南)성 홍위병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어느 조직이 문공무위(文功武衛, 글로 공격하고 무력으로 지킨다)라는 구호를 만들었는데 그 구호는 맞다”고 격려했다.



    사망·실종 22만 명

    장칭의 발언은 곧 대륙 전역에 보도되면서 ‘문공무위’ 구호를 유행시켰고 무력투쟁을 정당화했다. 이에 따라 8월부터 홍위병 분파들끼리 본격적인 내전에 들어갔다. 1989년 발간된 ‘충칭대사건’에 따르면, 1967~69년 발생한 8·15, 반도저, 사삼파 사이의 전투는 규모가 큰 것만 31건이었다. 기관총, 박격포, 탱크, 함선 등을 동원한 전투만 24건에 달했다. 이 기간에 1만여 발의 포탄이 사용됐다.

    당시 충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무력투쟁은 최대 규모였다. 무력투쟁을 연구한 제3군의(軍醫)대학 리산구이 교수는 “충칭이 중일전쟁과 3선 건설로 투자가 집중된 6대 군수공업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홍위병들은 군수공장에서 중화기를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대까지 쳐들어가 무기를 손에 넣었다”며 “무력투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말했다. 1967~69년 중국 전역에서 사상자를 낸 무력투쟁 건수는 밝혀진 것만 5만7000여 건이다. 이 중 9700여 건에서 1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22만 명의 학생과 노동자, 농민이 죽거나 실종됐다.



    그때 4세대 지도자들은…

    충칭시 사핑(沙坪)공원에는 무력투쟁으로 죽은 홍위병 영혼의 안식처 ‘홍위병묘’가 있다. 이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홍위병 공동묘지로, 1967년 6월부터 1969년 1월까지 숨진 홍위병 404명이 잠들어 있다. 이들은 모두 8·15 조직원으로 가장 어린 매장자는 14세에 불과했다. 35%는 학생, 59%는 노동자였다. 홍위병묘의 면적은 2100㎡로, 한 좌에 여러 명을 함께 묻는 군묘 형태다. 콘크리트로 다진 지반 위에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 계단식이다.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는 배치다. ‘죽어서도 마음은 언제나 베이징의 마오쩌둥을 바라보고 받들려는(心向紅太陽, ‘홍태양’은 마오쩌둥을 가리킴)’ 홍위병의 의지가 담겼다.

    묘분에는 평소 홍위병들이 외친 구호가 새겨져 있다. ‘조반유리, 혁명무죄(革命無罪)’.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인 이들은 학우와 동료였다. 몇 달 전만 해도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같은 사업장에서 일한 벗들이었다. 리산구이 교수는 “그나마 홍위병묘에 묻힌 홍위병은 이름, 성별, 이력, 소속기관, 사망일시 등이 남아 있지만, 교외에 버려지고 매장된 이들의 행적은 알 길이 없어 막막하다”고 했다.

    무력투쟁은 문혁 기간 35/45세대 최고의 스타를 탄생시켰다. 훗날 4인방의 일원이 되는 왕훙원(1935년생)이다. 왕훙원은 지린(吉林)성 장춘(長春)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마친 뒤 1951년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6년 제대하고 상하이 목화 가공 공장의 경비과 초급간부로 배치됐다. 문혁이 터졌을 때는 경비과 책임자였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6명의 동료와 조반을 일으켰다. 1966년 11월에는 각 공장을 점령한 노동자 30여 명과 상하이노동자조반사령부를 결성해 주석이 됐다.

    왕은 참전 경험이 있어 전투력이 강했다. 철로를 마비시킨 안팅(安亭)사건, 상하이시 당·정을 장악한 1월 폭풍 등을 진두지휘했다. 이런 공적으로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의 눈에 들어 시 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됐다. 대륙 전역에서 무력투쟁이 격화했을 때 상하이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왕이 홍위병 조직을 장악해 분란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의 상황은 마오의 귀에도 들어갔다. 1968년에 들면서 마오는 홍위병들끼리 벌이는 내전에 넌더리를 내던 차였다. 그는 문혁의 정신을 지키면서 중국을 이끌 후계자 중 하나로 왕을 염두에 뒀다.



    본래 마오쩌둥은 문혁을 오랫동안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과거에 벌인 대중운동처럼 3년 정도면 반대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한데 무력투쟁은 마오가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 그로 인한 혼란과 피해가 극심했다.

    1968년 7월 마오는 처음으로 베이징시 조반파 5대 영수를 불러 면담했다. 그는 “너희들은 지난 2년여 동안 투쟁하지 않았고, 비판하지 않았으며, 개혁하지 않았다. 투쟁은 했지만 무장투쟁만 했을 뿐이다”라고 성토했다. 8월 마오는 인민해방군과 민병을 출동시켜 홍위병들을 진압했다. 토사구팽이었다.

    무장해제당한 홍위병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9월부터 하방(下放)이 시작됐다. 조반파는 공장과 공사장에 배치됐다. 홍위병은 변경의 산골이나 척박한 농촌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35/45세대는 경력 단절을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의 학력과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사업장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훗날 중국 4세대 지도자들이 되는 후진타오(胡錦濤·1942년생), 원자바오(溫家寶·1942년생), 우방궈(吳邦國·1941년생), 저우융캉(周永康·1942년생), 허궈창(賀國强·1943년생), 리창춘(李長春·1944년생) 등은 모두 혜택을 받았다.

    문혁이 시작됐을 때 후진타오는 칭화대에서 조교와 지도원으로 일했다. 하방 뒤에는 전공대로 간쑤(甘肅)성 류자샤(劉家峽)댐 건설 현장에 가서 엔지니어가 됐다. 1982년까지 간쑤에서 근무하며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로 업적을 쌓았다. 원자바오도 베이징지질대 석사생이었다. 후와 같은 시기 간쑤성 지질국으로 배치돼 1982년까지 엔지니어와 관료로 근무했다. 이들의 1966~68년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본인들 스스로도 어떤 언급도 없었다.



    두 세대의 운명이 갈리다

    1969년부터 본격 궤도에 오른 ‘3선 건설’은 35/45세대의 숨통을 틔웠다. 본래 3선 건설은 행여나 있을지 모를 미국과 소련의 선제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1964년 마오가 주창한 후방건설 프로젝트였다. 중국을 지역별로 나눠 연해(1선)와 중부(2선)에 있던 군수기업을 서부(3선)로 옮기고 새로이 군사기지를 조성하는 대역사였다. 이를 위해 먼저 철로를 깔고 도로를 닦았다. 인프라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자 군수공장 이전과 군사기지 건설이 시작됐다.

    오늘날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국유기업으로 명성을 떨치는 창안(長安)자동차, 자링(嘉陵)오토바이 등이 충칭으로 이전했다. 쓰촨에는 창홍(長虹)전자, 판즈화(攀枝花)철강, 둥자오(東郊)전자공업이, 산시(陝西)에는 중국비행기공업이 새로이 설립됐다. 42개 연구소와 297개 군수공장이 이 시기에 문을 열면서 엄청난 연구·기술인력이 필요했다. 대학을 졸업해 전문지식을 갖춘 35/45세대가 각 단위에서 엔지니어와 간부로 활약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반해 홍위병 세대(1946~54년생)는 대학 혹은 중·고교 중퇴 학력이라 현장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3선 건설과 더불어 성장한 대표적인 35/45세대가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다. 1969년 후는 류자샤댐 공사 현장에서 란저우(蘭州)에 있던 수전국(水電局) 제4공정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문지식을 맘껏 발휘해 고속승진을 거듭했고 1974년 간쑤성 건설위원회로 영전했다. 건설위원회는 3선 건설을 추진하는 핵심 부서였다. 여기서 후는 정치적 은사이자 후견인 쑹핑(宋平)을 만났다. 쑹핑은 1962년부터 란저우의 서북국에서 일했다. 문혁 초기 홍위병에게 극심한 고초를 겪고 실각했지만, 1969년 서북국 3선 건설위원회 부주임으로 복권했다.

    1972년 쑹은 간쑤성 당서기로 승진하고 1977년에는 란저우군구 정치위원이 돼 1982년까지 간쑤를 통치했다. 이런 실력자의 눈에 든 후는 승승장구했다. 1980년에는 간쑤성 건설위원회 부주임에 올랐다. 1982년 12월 쑹은 베이징으로 영전해 가는데, 이때 후도 데려갔다. 쑹의 천거로 후는 불과 40세에 공청단 제1서기가 됐다. 쑹은 199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직을 후에게 넘겨줄 정도로 그를 아끼고 후원했다. 원자바오 전 총리도 3선 건설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원은 후와 함께 베이징으로 간 간쑤방(幇)의 일원이다.

    이들과 달리 홍위병 세대는 난동을 피운 멍에 때문에 문혁이 끝날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걸었다. 교정으로 돌아간 이는 극소수였다. 볜중윈을 사지로 몰아넣은 쑹빈빈은 구제받았다. 쑹은 1969년 네이멍구(内蒙古)로 하방돼 3년간 민병으로 근무했다. 1972년 아버지 쑹런충이 복권되자 군 장성의 추천 케이스로 창춘(長春)지질대에 진학했다. 1978년에는 중국과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1980년 국비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 갔다. 1989년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국적을 얻었고 사업가로 성공했다.



    한국의 세대갈등과 文革

    올해로 문화대혁명 50주년을 맞았지만, 지금도 중국에서는 당시 여러 사건과 무력투쟁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금기시된다. 2006년 중국의 독립영화 감독 후제(胡杰)는 볜중윈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는 비록 죽었지만(我雖死去)’을 제작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볜의 남편 왕징야오가 40여 년 보관해온 자료를 공개했기에 가능했다. 왕은 아내의 처참한 주검을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중국에서 상영이 금지됐다. 2014년 1월 쑹빈빈이 공개석상에서 볜을 죽음으로 몬 것을 사죄한 게 전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혁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는 덩샤오핑의 관용과 원칙이다. 덩은 주자파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온갖 험한 꼴을 당했다. 그러나 덩은 자신을 핍박하고 수차례 내친 마오쩌둥에 대해 ‘삼칠개(三七開)’라는 평가를 했다. 마오가 30%의 과오를 저질렀지만 공로가 70%나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홍위병을 지휘한 35/45세대의 과거를 죄다 덮었다. 오히려 이들을 격려하고 키웠다.

    그는 장쩌민(江澤民)보다 16세 어린 후진타오를 4세대 지도자로 끌어올렸다. 문혁을 주도하고 홍위병을 충동질한 이들은 인민재판이 아니라 ‘법대로’ 처벌했다. 베이징 5대 영수를 비롯한 각 지역의 조반파 우두머리들도 재판정에서 단죄했다.

    둘째는 세대갈등의 해소다. 필자가 35/45세대에 주목하게 된 것은 문혁 전 중국 상황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와 유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35/45세대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사회주의 교육 세례를 받았다. 사상의 순수성으로 똘똘 뭉쳐서 세파에 물든 중·노년층을 경원시했다.

    과거 우리 86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도 좌파사상으로 무장해 산업화세대를 격하했다. 현재 86세대는 기득권이 돼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생)에게 ‘꼰대’ 취급을 당한다. 이런 세대 마찰을 해소하려면 서로 간에 지속적인 소통과 이해가 절실하다. 지나간 역사는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