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역사탐구

홍위병 이끈 35/45세대 홍위병 딛고 新중국 주도

‘세기의 세대전쟁’ 중국 문화대혁명 50주년

  • 모종혁 | 중국 전문 칼럼니스트

홍위병 이끈 35/45세대 홍위병 딛고 新중국 주도

1/4
  • ● 마오, ‘반자본주의 투쟁’ 허울로 반대파 제거 노려
  • ● 1935~45년생 선배들이 文革 현장에서 홍위병 선동
  • ● 중·노년 학자들에게 칼끝 겨눈 청년 학자들
  • ● 내부 노선투쟁이 무력투쟁으로…22만 명 희생
  • ● 날개 단 35/45세대, 천덕꾸러기 된 홍위병 세대
홍위병 이끈 35/45세대 홍위병 딛고 新중국 주도

톈안먼광장에 몰린 100만 홍위병. 이런 홍위병 집회가 1966년 한 해만 8차례 열렸다.

1966년 8월 18일 수도 베이징의 한복판 톈안먼(天安門)광장. 사위가 어두운 새벽부터 붉은 완장을 찬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베이징의 각급 학교에서 차량을 타고 혹은 걸어서 광장으로 집결했다. 연령대는 앳된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했다. 일부는 붉은 깃발을, 일부는 각종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었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래 여러 차례 열병식이 열렸지만, 학생들이 톈안먼광장에 그리 많이 몰린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오전 8시가 넘자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톈안먼 앞에 섰다. 한 노인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진수이차오(金水橋)를 천천히 건넌 그는 주변 학생들과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며 톈안먼으로 향했다. 많은 학생이 감격해 눈물을 흘리면서 외쳤다. “마오(毛) 주석 만세!”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쩌둥은 톈안먼 성루에 올라 먼저 각급 학교의 학생 대표들을 사열했다. 이때 베이징사범대 부속중학 여학생이 마오에게 ‘홍위병(紅衛兵)’이라 쓰인 완장을 채워줬다. 마오는 성루 위에서 자신에게 열광하는 ‘학생 군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 홍위병은 “마오 주석께서 홍위병에 참가하셨다. 우리를 후원하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고 외쳤다.

그해 마오는 73세였으나, 2시간 넘게 걸린 집회에 꼿꼿이 선 채 참여했다. 집회 후 100만 명의 행렬도 사열했다. 마오는 “투쟁의 규모가 아주 크다. 학생 대중을 확실히 발동시켰다. 전국 인민들에 대한 사상혁명화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뻐했다. 광장 집회는 11월까지 7차례 더 열렸고, 1300만 명의 홍위병이 참가했다.



‘四舊’ 유적·유물 파괴

적지 않은 홍위병들은 “대중에게 혁명사상을 퍼뜨리겠다”며 10여 일 동안 걸어서 상경했다. 그들은 곧바로 가지 않았다. 도중에 ‘사구(四舊,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눈에 띄는 대로 파괴했다. 마을마다 인민재판을 열어 반혁명세력으로 몰고 처단했다. 누군가가 특정인을 향해 “주자파(走資派)!” “반동(反動)!”이라 외치면 그 집에 들어가 가산을 몰수했다. 홍위병들은 반동분자를 끌고 나와 때려죽였다. 그야말로 대륙을 ‘무법천지’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일부는 톈안먼광장 집회가 열리기 훨씬 이전부터 학교나 마을에서 반동분자를 색출해 징벌했다. 이 시기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은 이들 중 볜중윈(卞仲耘)도 있었다. 볜중윈은 베이징사대 부중의 당서기이자 부교장이었다. 대지주의 딸로 태어났지만 194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급진적인 역사학자 왕징야오(王晶堯)와 결혼도 했다. 베이징사대부중은 중국 최고의 귀족학교였다. 마오쩌둥,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 최고위급 지도자들의 자녀가 수학했다. 문혁이 일어나자 볜은 출신성분 때문에 주자파로 몰렸다. 대중집회에 수없이 끌려 나가 조리돌림을 당했다.



毛의 반대파 제거 속셈

1966년 8월 5일 볜중윈에게 최후가 닥쳐왔다. 이날은 마오쩌둥이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발표해 홍위병들을 극렬히 선동했다. 늦은 오후 홍위병들이 각목을 들고 볜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볜을 포박해 끌고 나와 인민재판을 열었다. 볜의 죄상을 열거한 뒤 몽둥이질을 시작했다. 얼마 안가 볜의 몸은 경직됐고 숨이 멈췄다. 볜은 문혁 발발 후 베이징에서 피살당한 첫 교원이었다.

이 집회를 주도한 이들 중 한 명이 쑹빈빈(宋彬彬·1947년생)이다. 바로 첫 톈안먼광장 집회에서 마오에게 완장을 채워준 여학생으로, 인민해방군 대장이던 쑹런충(宋任窮)의 딸이다.

문혁(文革) 이전의 마오에겐 행정 권한이 없었다. 1958년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류사오치를 정점으로 한 실무파와 혁명 원로들에게 실권을 넘겨줬다. 마오와 류는 후난(湖南)성 출신의 동향이다. 마오의 고향 사오산(韶山)과 류의 고향 닝샹(寧鄕)은 불과 50여㎞ 거리라 사투리가 같다. 마오는 내전과 중일전쟁 시기에 류를 신뢰했다. 건국 후에는 줄곧 후계자로 삼았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오의 이런 생각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1963년 류가 사청(四淸)운동을 일으키자 마오는 분노했다. 류는 급속한 인민공사화에 따른 오류와 관료들의 거짓 보고를 시정코자 했다. 이를 위해 아내인 왕광메이(王光美)를 농촌에 보내는 등 실태조사를 벌였다. 여기서 발견된 회계 부정, 창고의 재고, 관료들의 재산 축적, 노동력 분배 문제 등을 해결하려 대중운동을 벌였다. 이후 마오가 반격해 운동 기조는 사상·정치·조직·경제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마오는 류가 자신에게 도전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마오는 권력욕의 화신이긴 해도 함께 고생한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자신과 권력투쟁을 벌인 왕밍(王明), 역린을 건드린 펑더화이(彭德懷) 등을 권부에서 내쫓았으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숙청 방식과 달랐다. 하지만 마오는 문혁을 발동하면서 류샤오치와 그의 추종자 일부를 축출하고 죽일 심산이었다. 이처럼 마오는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이란 허울을 앞세워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되찾으려 문혁을 일으켰다.

문혁이 발발한 뒤 홍위병들의 난동은 마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마오는 수십 년간 전장을 누빈 군사 지도자였다. 목적과 수단을 위해 병사나 인민이 죽는다고 눈도 깜짝 않았다.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아사(餓死)해도 모른 척했다. 홍위병들이 전국을 휘젓고 다니며 당·정 간부들과 사회 각계 지도층, 심지어 혁명 원로들을 조리돌림하고 구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조반유리(造反有理, 반항과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며 정당성을 부여했다.

주목할 점은, 문혁 이전에는 마오에 대한 개인 우상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1959년 펑더화이에 뒤이어 국방장관이 된 린바오(林彪)가 총대를 멨다. 린은 1963년 ‘마오주석 어록’을 발간해 군대 내에서 학습토록 했다. 또한 1년 전 사고로 순직한 군인 레이펑(雷鋒)을 영웅화하는 데 몰두했다. 레이펑은 생전에 마오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한 일기를 남겼다. 마오가 “레이펑 동지에게 배우라”고 지시하자 순식간에 학생들의 숭배 대상이 됐다.

우리가 보통 ‘문혁’ 하면 떠오르는 4인방(四人幇)과 캉성(康生)도 문혁 이전에는 존재감이 없었다. 장칭(江靑)은 마오의 제지를 받아 선전 부서의 간부로만 활동했다.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은 상하이(上海) 시당에서 일했고, 왕훙원(王洪文)은 일개 공장 간부에 불과했다. 캉성은 공산당 중앙서기처의 서기였지만 원로들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옌안(延安) 시기 캉이 적색 테러를 두 차례나 일으켜 동료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1/4
모종혁 | 중국 전문 칼럼니스트
목록 닫기

홍위병 이끈 35/45세대 홍위병 딛고 新중국 주도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