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조선의 아버지들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학문적 자유인’ 박세당의 극진한 아들 사랑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2/2

역사에서 삶의 지혜를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경기 의정부시 박세당 고택의 바깥사랑채. [사진제공 · 경기관광공사]

엄밀한 의미로 박세당은 철학자요 윤리학자였다. 역사가나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도 역사란 소중한 지혜의 보물창고였다. ‘누구나 역사가를 꿈꿀 필요는 없다. 그래도 역사적 지식은 누구에게든 삶의 중요한 밑천이다.’ 1666년 12월 9일, 큰아들에게 보낸 박세당의 편지에서 그런 생각의 자취가 발견된다.


네가 역사책을 읽겠다고 했느냐. 이 부분이야말로 전부터 네게는 몹시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 네가 그쪽에 뜻을 둔다면 필경 크게 유익됨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정말 위안이 되고 위안이 되는 일이구나.

그런데 말이다. 네가 역사책 읽는 법을 아느냐. 한꺼번에 죽 읽기만 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단다. 낮 동안에 읽은 내용을 그날 밤중이나 이튿날 아침에 조용히 앉아 곰곰이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또, 네가 읽으면서 흐뭇해한 대목, 역사 속 인물의 언행 가운데서 본받을 만한 점 또는 경계할 일을 찾아내어 가슴 깊이 간직하기를 바란다. 이런 방법으로 역사책을 읽는다면 금방 잊어버리지도 않게 되고 네 자신의 언행에 보탬이 적잖을 줄로 믿는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이런 점들을 잘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박세당은 진작부터 큰아들에게 역사책 읽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으나 참고 기다렸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큰아들이 역사책을 읽겠노라, 스스로 의지를 세우자마자 기꺼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세당에게 역사 자체는 일관되게 진보 또는 퇴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인간의 간접경험을 확대시켜주는 것, 인생의 교훈을 주는 처세서 같은 것이었다.   





벼슬은 생계수단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박세당이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상서’ ‘시경’을 주 해한 책 ‘사변록’. [사진제공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세당은 32세 되던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그 뒤 6, 7년간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에 종사했다. 1668년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격심한 당쟁만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벼슬길에서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현실 정치에서 고개를 돌렸지만, 아들들에겐 과거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공자도 말했듯, 선비에겐 벼슬이 곧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었다.

그런데 과거에 합격하려면 글솜씨가 탁월해야 했다. 글씨도 전아(典雅)해야 했다. 박세당은 1675년, 둘째 아들 박태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서와 글씨 연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밤새 평안했느냐. 특별히 다른 일이 없으면, (선비는) 책 읽고 글씨 쓰기를 연습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느니라. 이 두 가지가 네게는 마치 농부가 호미와 쟁기를 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스스로를 엄히 타일러 날마다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만약 이를 중지하면 장차는 남의 도움을 비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글쓰기는 선비의 필수 교양일 뿐만 아니라, 생계의 수단이라고 본 것이다. 농부에게 호미와 쟁기가 생업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도구이듯, 선비에겐 글솜씨가 절대적이라고 봤다. 그래야만 과거에서 합격을 바랄 수 있었다. 자상한 박세당은 편지의 형식을 빌려 아들 박태보에게 작문 요령을 지도하기도 했다.
 

과거시험 볼 날이 멀지 않았구나. 공부에 힘을 쏟아야 할 텐데 몸이 아프다니 어찌 마음대로 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글짓기를 할 때는 결코 생소하고 괴상한 문체를 쓰는 병통을 고집하지 말라. 문맥이 평이하고도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면 문체가 절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특히 글의 앞뒤[首尾]를 상세히 잘 따져서 귀결점이 있게 해야 맥락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글짓기의 요체다.

네가 (전에) 작성한 시권(試券, 과거시험 답안)의 글씨도 문제구나. 아주 거칠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서툰 점이 없지 않다. 글짓기를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화담비(花潭碑)’나 ‘조아비(曹娥碑)’를 보고 베껴라. 그 일에도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글씨를 쓸 때는 크게만 쓰려고 하지 말고, 시권의 크기에 맞게 쓰는 연습을 하기 바란다. 과거에 익힌 글씨체는 일단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 글짓기에 있어서는 간략하게만 쓰려 하지 말고 (표현과 내용을)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들의 논술선생

젊은 시절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박세당, 그로서도 아들을 과연 어떻게 지도해야 과거시험 합격이 가능할지 고충이 많았던 모양이다. 궁리 끝에 아버지는 아들의 낙방한 시험 답안을 분석해가며 글짓기와 글씨를 훈수했다. 이를테면 ‘첨삭지도’의 노고를 아끼지 않는 논술선생 역할을 아버지가 자임한 셈이다.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화담비’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비석이다. 박민헌(朴民獻·1516~1586)이 짓고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峯), 곧 한호(韓濩·1543~1605)가 글씨를 쓴 비문이다. 또 ‘조아비’란 그 내용도 “절묘하고 훌륭한 글[絶妙好辭]”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저명한 명필 왕희지가 글씨를 썼대서 이름이 났다. 둘 다 일종의 서예 교본으로서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버지의 정성스러운 지도는 헛되지 않았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모두 대소과에 급제했다. 장남 박태유는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했다. 차남 박태보도 1675년(숙종 1) 생원시를 거쳐 이태 뒤인 1677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681년(숙종 7)엔 장남도 문과에 합격했다.

두 형제는 소론의 기대주였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려 차례로 화를 입었다. 박태유는 노론의 핵심인 김익훈과 정면충돌해 고난을 겪었다. 함경도 변방으로 좌천된 그는 곧 병으로 사직했다(1695년, 숙종 21).

박태보의 운명은 더욱 비참했다. 1689년의 기사환국, 즉 남인이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일으켜 재집권하자, 그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했다. 박태보는 그 일로 심한 고문을 받았다. 박세당은 달려가 아들을 간호했으나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주검을 소거(素車, 상여)에 태워 시골로 돌아왔다. 그의 아픈 가슴을 뉘라서 위로할 수 있었겠는가.

일찍이 어느 큰선비가 말했듯, 벼슬길이란 바다와도 같았다. 거친 풍랑이 일면 배가 뒤집히기 일쑤다. 부귀영화를 멀리한 박세당도 당쟁의 해일(海溢)에 휘말린 뒤 안전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결국 ‘사문난적’으로 내몰렸다. 

백 승 종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신동아 2016년 6월호

2/2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목록 닫기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댓글 창 닫기

2019/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