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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그림을 귀로 보지 말라”

미술품 감정·복원 전문가 최명윤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그림을 귀로 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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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알아채는군”

“그림을 귀로 보지 말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국제미술과학연구소에서 만난 최명윤 소장. 그의 등 뒤에서 복원을 기다리는 그림은 김형대 화백의 추상 작품이다. [조영철 기자]

최 소장은 그간 보고 겪은 가장 황당한 위작 사건으로 이중섭 사례를 들었다. 2005년 그는 대형 전시회를 앞둔 이중섭의 그림들을 가짜라고 감정했다가 그림 소장자 김용수 씨와 이중섭 화백의 둘째아들 이태성 씨로부터 민·형사상 고발을 당했다(무고로 끝났다). 그리고 이후 오히려 김씨가 사기 등 혐의로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검찰은 이씨를 공범으로 보고 지명수배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서울 중구) 황학동에 가면 10만 원에 서너 점 살 수 있는 조잡한 그림들이었다”고 했다.

“조잡한 그림을 진짜라고 우기는 사람들, 가짜라는데도 굳이 경매에 올려 그림을 판 대형 화랑도 황당했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김씨와 이씨가 각자 따로 저를 고발하면서 둘 다 제 이름을 ‘최명원’이라고 적어냈더군요.”

최 소장에 따르면 국내 미술계에서 위작의 역사는 깊다. 1990년대 최 소장은 절친한 친구의 부탁으로 재벌 회장의 자택에 소장품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스무 점을 본 뒤 그는 “그만 보고 싶다”고 했단다. 단 한 점도 진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장이란 양반이 내 말을 듣고 씩 웃으며 그러더군요. ‘전문가는 가짜인 걸 알아채는군.’ 진위 감정을 하려고 저를 부른 게 아니었던 거죠. 그 다음 말이 더 기가 막혔습니다. ‘(가짜라는 걸) 당신은  알아봤지만 한 세대만 지나면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라고. 위작이 판을 치는 것은 이런 수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과연 문화민족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집을 나오면서 회장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가짜란 말을 못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흘러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 세상에 나오면 가짜임을 증명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과학 감정을 하려면 엄청나게 큰 기계가 필요하지만 30년 후엔 만년필만 해질 것이다’라고.”



최 소장은 “아직 만년필은 아니지만 들고 다닐 정도로 장비 크기는 작아졌다”고 덧붙였다.

▼ 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까.

“딱 한 분. 1970년대에 조흥은행에 근무하던 분이에요. 점심시간마다 빵으로 끼니 때우고 그림 보러 다니셨죠. 보너스를 탄 날엔 그림 한 점 사서 표구하러 우리 화방에 왔어요. 완성한 액자를 받으면 한숨 푹 쉬면서 ‘아이고, 오늘 마누라한테 죽었네’ 하셨어요. 그림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분들이죠.”



그림이 하는 말

“그림을 귀로 보지 말라”

6월 30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이우환 화백. 이 화백은 “경찰 압수 그림은 모두 내가 그린 진품”이라고 밝혔다. [동아일보]

최 소장은 화방집 아들이다. 1950년대 국내 최초로 미술 재료를 취급한 명미당과 서울화방을 운영한 최영소 선생이 부친이다. 박서보 등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회고록에는 최영소 선생과 그의 화방이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최 소장은 소년 시절부터 가게로 불려나가 캔버스 만드는 법, 안료 구별법 등을 체득했다. 웬만한 화가들의 캔버스는 직접 만들고 배달까지 했다. 화방을 물려받으려면 미대에 가는 게 좋겠다는 부친의 뜻에 ‘등 떠밀려’ 홍익대 응용미술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망가진 그림을 복원하는 일도 도맡아 했다.

“저녁 6시가 되면 우리 화방이 화가들 모임 장소가 되곤 했어요. 그때부터 한밤까지 술 취한 선생들을 댁으로 모셔다 드리곤 했지요. 1970년대에 ‘민족기록화’라고 해서 정부에서 화가들에게 미술 재료를 지급했어요. 근데 작가마다 즐겨 쓰는 색상이 다릅니다. 파란색을 많이 쓰는 선생이 ‘명윤아 파란 물감 좀 구해와라’ 하면 ‘○○○ 선생은 흰색을 많이 쓰니까, 흰색을 가져가서 파란색으로 바꿔오겠습니다’ 했지요. 선생들 비리도 많이 알아요.”

▼ 비리?

“사모님 몰래 예쁜 아가씨한테 그림 그려주는 거요(웃음).”

▼ 당시 이우환 화백도 만나봤습니까.

“1970년대에 박서보 선생이 이 화백을 모시고 우리 화방에 왔어요. 캔버스 등을 주문받은 기억이 납니다.”

미대에 진학한 그는 쟁쟁한 동기생들 사이에서 자신에겐 예술적 재능이 없다는 점을 깨닫고 보존미술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시절, 동기들 캔버스 만들어주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한양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를 받은 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랄페르 기술연구소에서 복원 기술을, 고등장식미술학교 아르데코에서 벽화 기술을 배웠다.

▼ 학교보다 화방에서 미술품 복원 지식과 경험을 더 쌓았다고요.

“화방에 앉아 있으면 별의별 그림이 다 찾아옵니다. 부부 싸움으로 찢어진 그림, 다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캔버스와 겹쳐 놔 상한 그림…. 명색이 미대생이니까 저보고 고치라고들 했지요. 그러면서 차츰 그림들이 하는 말이 들리게 됐습니다.”

▼ 그림이 말을 한다?

“그림을 가만 보면 ‘나는 거꾸로 놓여 있었어요’ ‘벽장 속에 있었어요’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났어요’ 같은 말이 들려요. 선친이 캔버스 나무틀을 대패질시킨 게 생각나요.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화방들이 사용하는 톱날이 한 종류였습니다. 그 톱날은 나무를 매끈하게 자르지 않고 꺼풀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대패질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것은 화가가 알 수 없는 일이죠. 감정 전문가는 이런 것들까지 공부해 진위의 키포인트를 잡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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