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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에 항거하다 돌 속에 갇힌 인생들

구로구청 사건, 그후 29년

  • 이문헌 | 자유기고가

부정에 항거하다 돌 속에 갇힌 인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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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에는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의 작가 김영현도 있었다. 그는 소설 ‘단풍나무집 풍경’에서 당시 구로구청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구로구청 마당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담벼락에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하얗게 붙어 있었다. 선거용으로 사용되었던 중계차도 서 있었는데 그 중계차에 설치되어 있는 고성능 앰프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연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자신을 동장이라고 소개한 사십대 초반의 사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도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울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



다음 날 신문에서 그는 사내가 집에 가서 석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7일 밤, 농성 지도부가 공정선거 감시단을 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로 전환할 것을 선언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 날인 18일 오전에는 시청 앞 광장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그곳에서 구로구청까지 행진할 것이라는 계획도 나왔다. 18일 자정 무렵 서울시장의 진압 예고 전화가 걸려왔다.



폭력 겪은 뒤 정서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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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8일 부정투표 항의 농성 현장인 구로구청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작전을 벌였다. [동아일보]

새벽 6시경, 마침내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4000여 명의 백골단이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구로구청에 난입했다. 7시경부터는 헬기까지 동원해 옥상으로 진압 공격을 했다. 아수라장이었다. 미처 옥상까지 올라가지 못한 농성자들은 경찰을 피해 건물 3, 4층에서 뛰어내렸다.  

이곳저곳에서 욕설과 비명, 누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대생 양원태 씨가 5층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척추가 꺾이는 중상을 입는 등 크게 다친 사람이 확인된 경우만도 17명이었다. 김인자 씨는 그때 상황을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최루탄으로 눈조차 뜰 수 없이 밀려서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바로 옆에 ‘배금이’라는 이름의, 모범택시 기사 옷을 입고 온 아가씨가 있었어요. 그런데 백골단이 그 아이 몸 위로 올라가 허리를 마구 밟아대는 거예요. 결국 그 애는 허리를 다쳐 지금도 몸이 성치 못해요.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 울부짖음… 끔찍했죠.

나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곧 풀려났지만 한동안 정서불안에 시달렸어요. 손가락을 괜히 만지작거리고,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구깃구깃 구기게 되더라고요. 지금도 제복을 입은 군인이나 경찰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요.”

그는 울분을 주체할 수 없어 이후 구로구청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모임과 시위에 열심히 다녔다. 어린 아들을 혼자 집에 놔둘 수 없어 아이까지 데리고 집회에 나갔다. 평범한 가정주부이던 그녀가 그 후 29년간 맹렬 여성운동가로, 노동운동가로, 남편을 사고로 잃는 불행을 겪으면서도 해고투쟁을 벌이는 등 사회운동가로 살아온 세월은 ‘87년 구로구청’의 연장이었던 듯하다.



부부가 암으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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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청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김병곤 씨가 병마에 시달리자 1990년 3월 후원회가 결성됐다. 부인 박문숙 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12월 18일 연행된 사람은 1050명. 그중 208명이 구속되고 114명이 기소됐다. 구속됐든 아니든, 형을 살았든 아니든 간에 구로구청에 있었던 사람 상당수의 삶은 ‘구로구청 이전’과 ‘구로구청 이후’로 바뀌었다.

특히 청년운동가 김병곤(사건 당시 35세) 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김씨는 “아직 살아 있다면 사회운동과 정치 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는 구로구청 농성 주도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사망한다. 1971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3학년 때인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처음 구속된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재판정에서의 일화로 유명해졌다. 스물두 살이던 그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법정을 울렸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얼굴엔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구형 정찰제’로 불릴 만큼 검사가 구형하면 판사도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던 시대였는데, ‘준(準)사형선고’를 받은 이가 얼굴이 새파래지기는커녕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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