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마지막회〉

5·18 발포명령 진실 ‘병사 사망사건’ 증언이 열쇠

  • 김충립 | 前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5·18 발포명령 진실 ‘병사 사망사건’ 증언이 열쇠

1/2
  • ● 北, 5·18 작전 실시간 보도…軍 무선 통제
  • ● 구타 사망 특전사 병사 부대원 증언 나와야
  • ● 2017년 5·18 기념식에서 광주-5共 화해 기대
5·18 발포명령 진실 ‘병사 사망사건’ 증언이 열쇠

1988년 12월 7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호용 당시 의원.

‘신동아’ 9월호에서 언급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희생자 단체와 광주시민들은 5공 세력에 대해 발포명령자를 밝힐 것과 진정한 사과를 요구한다. 그들 대부분은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발포명령자요, 총 책임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인식한다. 반면 전두환, 정호용 두 사람은 “우리는 발포명령자가 아니며, 5·18이 일어났을 때 군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진영의 주장은 36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맞부딪친다. 5·18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이던 필자는 그날의 진실에 비교적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필자가 알고, 보고, 행했던 역사적 사실만 ‘신동아’ 연재 수기를 통해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이 필자의 기록을 보고 그날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필자가 정호용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12월 13일이다. 전날 특전사령관이던 정병주 장군이 연행되고, 50사단장이던 정호용 장군이 특전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다. 필자는 이후 1년 넘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보고하고, 때로는 그를 보좌하는 자리에 있었다.



5공 핵심과 불편한 사이

정 사령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는 개인적으로는 친구 사이였지만, 5공 핵심 인사들과는 불편한 사이였다. 1980년 4월에는 언론 통폐합을 반대한 일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고, 그런 와중에 5공 세력의 좌장이요 핵심인 장세동 대령이 특전사 작전참모로 부임하자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1980년 5월 초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5·17 계엄확대 조치에 따른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특전사 예하 여단은 서울 경기 인근 부대로, 7여단은 광주지역 교육사령부로 작전 배속됐다. 따라서 특전사령관은 예하부대를 타 부대에 작전 배속시킨 후 특전사에 홀로 남았고 아무 임무도 맡지 않았다.

물론 특전사령관이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직접 3개 여단을 이끌고 부산 한성여대(현 경성대)에 지휘부를 설치했고, 예하 여단은 부산대, 동아대 교정에 주둔시켰다. 필자도 특전사령부와 함께 이동해 한성여대에 출동한 바 있다.

그런데 5·17 계엄확대 조치 때는 예하 여단을 전국적으로 분산 배속시켰기 때문에 정호용 사령관에겐 특정 임무가 없었다. 이 때문에 5·18 광주 작전 때는 처음엔 7여단이 31사단에 작전 배속됐고, 사태가 확대되자 3여단이 추가로 배속됐다.

정 사령관이 구체적 임무를 받지 못한 것은 △12·12 주역이 아닌 사람이 특전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보직됐고 △보직 후 4개월 동안 5공 핵심 인물들이 추진하는 일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했고 △평소 “군인은 군인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 듯하다. 5공 핵심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그에게 임무를 주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일종의 ‘왕따’였다.

당시 나는 계엄사와 보안사,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등 각종 정보기관에서 배포하는 1일 정보보고와 북한 동향, 예하 여단에서 사령부 상황실로 보고한 내용을 취합해 보고했다. 광주에서 진압작전이 시작된 후 정 사령관은 “시위대가 도주할 길을 열어줘야지, 가둬놓고 모두 체포하려 하면 안 된다. 국군이 적군 대신 국민을 향해 발포하는 사태가 일어나 안타깝다”며 눈물을 보인 적도 있다.

내가 올리는 여러 정보보고 중 정 사령관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북한 관련 보고였다. 북한이 광주 상황을 오판하고 도발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5·18 초기 북한 방송은 허위 선전 일색이었지만, 1주일쯤 지나자 국군의 작전 상황까지 포함된 내용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광주-서울 연락업무 건의

5·18 발포명령 진실 ‘병사 사망사건’ 증언이 열쇠

1980년 5월 21일 광주 투입 공수부대의 발포 직전. [동아일보]

이와 관련해 필자는 두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해 정호용 사령관에게 설명했다.

“우리나라에 침투해 모르스 부호를 이용해 보고하는 고정간첩 30여 명 중 많은 숫자가 광주지역으로 이동해 활동하거나, 북한이 국군의 유무선 통신을 감청해 정보를 입수한 뒤 방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국군의 유무선 보고를 줄이고 광주와 서울 간 헬기를 통한 연락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건의했다.

“5·17 계엄확대로 김영삼(YS), 김대중(DJ) 등 재야 정치권 인사들과 김종필(JP) 총재를 포함한 3공화국 인사 대부분이 검거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집권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정 사령관님은 12·12에 참여하지 않아 실세들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광주 상황 수습과정에서 아무런 임무도 맡지 않고 사무실만 지키고 있어선 안 됩니다.

마침 정보기관에서 북한의 국군 유무선 감청에 대응해 광주와 서울 간 연락업무 체계를 연구하는 중이니, 육군 항공대 헬기를 지원받아 광주를 오가면서 연락업무를 맡는 게 좋겠습니다.”

정 사령관이 흔쾌히 동의하자 필자는 보안사령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광주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 단시일 안에 매듭지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최근 북한 방송 내용이 우리 군이 상부에 보고하는 것보다 더 자세하고 빠르니 광주지역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 검거에 노력해야 한다. 국군의 유무선 통신이 북한에 감청될 우려가 있으니 통신보안에 더 유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북한이 광주 상황을 오판하고 도발할 가능성이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 군 작전상 보안 유지를 위해 육군 항공대 헬기를 활용해 장군급 인사가 광주와 서울 간 연락업무를 맡으면 좋겠다. 마침 정호용 사령관이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으니 이 임무를 주는 게 좋겠다.”

필자의 건의는 군 수뇌부에 즉각 전달됐고, 다음 날 육군 항공대는 2명의 조종사(소령)와 헬기 2대를 특전사 연병장에 대기시켰다. 정 사령관이 이 헬기를 타고 처음 광주에 다녀온 것은 5월 20일이다. 이후 21일과 26일 모두 3회에 걸쳐 광주를 다녀왔다. 그런데 후일 정 사령관은 5·18 책임자라는 ‘누명’을 쓴다.


1/2
김충립 | 前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목록 닫기

5·18 발포명령 진실 ‘병사 사망사건’ 증언이 열쇠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