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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제언

‘콩글리시’를 許하라!

  • 신견식 | 번역가 kyonshik@hanmail.net

‘콩글리시’를 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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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콩글리시(Konglish)’는 천덕꾸러기일까. 지난 한글날 570돌 직전 출간된 ‘콩글리시 찬가’(뿌리와이파리 刊)는 콩글리시의 기원과 현재, 올바른 사용법을 다루며 콩글리시의 명예회복을 주창한다. 이 책의 저자는 15개 언어 해독이 가능해 ‘언어 괴물’로 불리는 신견식 씨. 그의 ‘콩글리시’ 예찬론을 들어보자.
‘콩글리시’를 許하라!
현대 영어를 비롯해 세계 문명을 주도한 여러 언어와 견주다보니 한국어가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이들을 종종 접한다. 그러나 한국어는 모어(母語) 사용자가 7500만 명 남짓해 지구상 수천 개 언어 중 15번째쯤 되고, 출판과 언론에서 활발히 쓰여 규모가 매우 큰 언어다.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 또는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하나 아직 가설일 뿐이고, 사실상 어느 어족(語族)에도 끼지 않는다. 이런 고립적 성격이 있고 문자의 역사가 뚜렷한 한글을 쓰다 보니 우리말이 매우 독창적이라며 자부심을 갖는 한국인이 많다. 그래서 지나친 외래어 사용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한국인이 영어 앞에서 작아지고 영어를 굴레처럼 여긴다. 이런 현상이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어느 언어든 외래 요소와 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위세를 지닌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그 언어에 신경 쓰게 마련이다. ‘콩글리시’는 이런 복합적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콩글리시 자체는 한국만의 특성이지만, 언어 접촉의 산물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유라시아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한국은 지리적 특성 탓에 주요 접촉 언어가 그리 많진 않다. 역사시대 이후 거의 끊임없이 중국어(한문)의 영향을 받았고, 근·현대엔 일본어와 영어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여러 민족이 교차하던 지역의 언어들과는 차이가 있지만, 한국어도 고립돼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혼합 없는 언어는 없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어, 아카드어, 아람어로 이어지는 영향 관계에서도 드러나듯 언어 접촉의 역사는 길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지 못한 언어들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리스어 어휘의 상당 부분도 선주(先住)민족 언어에서 유래했기에 인도유럽어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한국어도 유사 이래 단일 언어로 존재한 게 아니다. 한반도에 살던 수많은 종족의 방언이라든지 계통적 관련이 있는 언어들이 알게 모르게 뒤섞였을 것이다. 우리가 고유어라고 생각하는 많은 어휘 중엔 알고 보면 어원이 중국어인 것도 있고, 다른 인접 언어가 어원인 경우도 많다. 독일 언어학자 후고 슈하르트가 설파했듯 혼합을 겪지 않은 언어는 없다.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언어란 없다’는 것이다.

언어 접촉은 대개 이런저런 혼합으로 이어지는데, 콜롬비아 동남부 브라질 접경 아마존 부족들은 서로 여러 언어를 구사함에도 특별한 경우 말고는 자기 언어에 타 부족의 언어를 절대로 섞지 않기에 매우 특이하다. 인구가 적은 집단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아이슬란드어도 외래어가 없기로 유명하다. 웬만하면 고유어의 요소를 결합해 말을 만들어낸다. 한국어가 참고할 면도 물론 있겠지만, 과연 아마존 부족들이나 아이슬란드를 얼마나 모범으로 삼아야 할까.

독일어도 낭만주의 시대에 잠시 언어 순화에 공을 들여 성과를 거뒀으나 차용어도 많다. 케말 파샤의 서구적 근대화로 터키어도 아랍어나 페르시아어 요소를 많이 갈아치웠으나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 순화는 어느 한 시대에 집중적인 노력으로 빛을 볼 수는 있지만, 다른 언어를 영원히 등지지 않는 한 꾸준히 지속되긴 어렵다. 효율성으로만 따져도 외래 요소를 무조건 내치기보다는 받아들여서 녹이는 쪽이 낫다.

번역을 업(業)으로 삼기 전부터 나는 여러 언어를 공부해왔다. 유창한 외국어 구사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여러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탐구하길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언어의 접촉에도 흥미를 갖게 됐고, 한국어가 받아들인 여러 언어가 어떤 변용을 겪는지 살펴보는 것에 큰 재미를 느낀다. 번역도 언어 접촉의 일종이므로 관심사와 직업이 어느 정도 겹친다. 괴테의 말대로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언어도 모른다.’



영어의 막강한 위세

한국어만의 특징도 있지만, 다른 언어도 함께 살피면 인류의 언어가 얼마나 보편성을 띠는지 알 수 있다. 외래어나 콩글리시도 한국어와 영어라는 좁은 틀 안에서만 보면 그냥 ‘잘못 쓰는 영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한국어 안에도 여러 요소가 있다. 다양한 언어를 거친 낱말도 많다. 가령 ‘오렌지’는 그저 영어 orange의 발음과 다른 게 아니라 타밀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를 거치면서 수많은 언어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한국어 안에서 영어가 누리는 특권은 그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국어’도 ‘미국어’도 아니고, 영어는 딱 두 음절의 그 명칭뿐이다. 미스코리아 출신 가수 김성희의 1982년 곡 ‘세계는 친구’에서 “국어, 영어, 독어, 불어, 일어, 쓰는 말은 달라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죠. 생각은 같잖아요…”라는 노랫말은 국내 여러 언어의 위상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국어가 영어보다 먼저 나오긴 하지만, ‘국어’로 주로 불리고 문자체계 ‘한글’로도 자주 잘못 불리는 ‘한국어’보다는 ‘영어’의 위치가 한국어 안에서 더 굳건한 듯하다.

시대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한 언어들은 대개 일정 지역에 국한됐다. 동아시아의 중국어(한문)와 일본어, 남아시아의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서아시아와 중동의 페르시아어와 아랍어·터키어, 유럽의 그리스어와 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 옛 소련의 러시아어, 중남미의 스페인어가 다 그렇다. 그런데 영어는 20세기 이래 거의 모든 언어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친다. 세계 공통어로서 영어에 맞먹는 언어가 없다. 이런 영어의 위상  때문인지 콩글리시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언어는 요동치는 액체

콩글리시는 크게 두 가지를 가리킨다. 첫째는 한국인이 외국어로 구사해 원어민의 발음과 문법, 어휘 규범에서 벗어난 영어, 둘째는 한국어에 들어온 차용어로서 영어의 본뜻이나 본꼴과 달라진 어휘를 일컫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엔 ‘한국식으로 잘못 발음하거나 비문법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나오는데, 이는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로서의 영어만 정의한 것이다.

‘영어 섞기’는 많은 언어에서 나타난다. 한국에선 패션잡지의 영어 혼합 문체가 지탄과 조롱도 받지만, 사실 전문 분야에서 영어를 그대로 섞어 쓰는 일은 매우 흔하다. 규범적으론 바람직하지 않지만, 언어는 제자리를 지키는 고체라기보다는 요동치는 액체에 가깝다. 따라서 틀에 가둘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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