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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발해만 제해권 장악한 백제 북연(國勢) 흡수한 고구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발해만 제해권 장악한 백제 북연(國勢) 흡수한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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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흥기

발해만 제해권 장악한 백제 북연(國勢) 흡수한 고구려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 왜왕에게 전했다고 추정되는 칠지도. [사진제공·이소노카미 신궁]

모용선비족이 확립한 이원체제는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만주(청) 왕조를 거치면서 군산복합적(軍産複合的) 통치체제로 완성됐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이던 북방민족이 중원을 점령한 후 중원식 관료제도의 효율성을 고유의 군사적 장점과 결합해 백성을 통치한 것이다.

이 무렵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랴오허 유역을 놓고 다투는 틈을 타 한반도 남서부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고구려로부터 황해도 북부와 강원도 서부를 탈취했다.

전연의 모용준은 후조의 멸망으로 화북이 혼란에 처하자 350년 수도를 베이징 근교 계(薊)로 옮기고 황제를 칭했으며 허베이 남부의 업(鄴)을 점령한 뒤 그곳으로 재(再)천도했다. 전연은 365년 뤄양을 점령했으며 366년 동진(東晉)의 연주(州) 등 화이허 이북 영토를 차지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후조가 멸망한 과정을 꿰고 있었는데 모용선비의 중원 진출이 지나치게 빠른 것을 보고는 전연이 곧 후조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내다봤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모용외의 서형(庶兄) 모용토욕혼은 모용외와의 불화 끝에 따르는 무리 1700여 호를 이끌고 내몽골과 하서회랑을 지나 칭하이(靑海)로 옮겨갔다. 모용토욕혼은 285년 칭하이호 서쪽의 부사(伏俟)를 중심으로 선비족과 강족을 통합해 유목·농경·상업의 나라 토욕혼을 세웠다.



갈족의 후조가 혼란에 처하자 저족 수장 포홍은 경쟁 부족인 강족 수장 요익중·요양 부자를 제압한 다음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도참설에 따라 성을 부(苻)로 바꿨다. 부홍의 아들 부건은 부족을 이끌고 원주지인 산시(陝西)로 복귀해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칭했으며 352년 황제에 즉위해 전진(前秦)을 세웠다. 부건이 죽은 후 맹장으로 이름난 그의 아들 부생이 황위를 계승했으나 민심을 잃어 재위 3년 만에 사촌 부견(338~385)에게 살해당했다. 부견은 지모원려(智謀遠慮)의 인물인 한족 왕맹을 기용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부견은 모든 민족을 인의로 대하고 은신으로 회유하면 결국 융합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부견이 국력을 키워나갈 무렵 동진의 장군 환온을 상대로 한 황하 연안 ‘방두 전투’ 전공 문제와 관련해 숙부 모용평의 견제에 시달리던 모용황의 또 다른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전진으로 망명했다. 전연의 기둥 모용각(慕容恪)이 죽은 후 모용평과 공동으로 집정하던 모용수는 방두 전투 승리라는 큰 공을 세웠는데도 시기심 많은 모용평과 가족혼(可足渾) 태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전연의 약점을 파악한 부견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후 370년 9월 왕맹과 곽경에게 6만 대군을 줘 전연을 공격하게 했다. 왕맹은 전연 제1의 군사기지인 태원을 점령한 다음 모용평이 지휘하는 30만 대군을 격파하고 수도 업을 포위했다. 371년 봄 업은 함락되고 전연 황제 모용위는 곽경에게 생포돼 장안으로 압송됐다.



거란의 모태, 우문선비

이런 와중에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백제 태자)는 고구려가 전진-전연 전쟁에 관심을 쏟는 틈을 타 북상해 평양 전투(371년)에서 고국원왕을 패사(敗死)시켰다.

왕맹과 곽경이 업을 함락할 때 부여울(扶餘蔚)이 부여·고구려·갈족 인질 500여 명과 함께 성문을 열어 전진 군사를 맞아들였다. 부여울이 이끈 부여·고구려인 포로는 모용외, 모용황에 의해 포로가 된 이들이다.

모용황은 342년 고구려 공격을 계획했다. 동생 모용한이 동쪽의 고구려를 정벌한 다음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고 건의한 까닭이다. 모용한은 고구려를 격파한 다음 우문선비를 정벌하고 화북으로 진공하자고 제안했다. 모용황은 주력부대는 산길로, 보조부대는 평지로 진군하는 방법으로 고구려군을 속였다. 소수 병력으로 산길을 방어하던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황에게 대패한 끝에 필마단기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점령한 후 왕대비 주씨 등 5만여 명의 포로와 함께 회군했다. 그 과정에서 미천왕의 시신도 도굴해 수레에 싣고 갔다.

고구려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모용황은 344년 우문선비를 정벌했다. 우문선비의 족장 우문일두귀의 아들 중 하나인 우문릉은 500여 기를 이끌고 탁발선비로 망명했다. 우문릉은 나중에 북주(北周)를 세우는 우문태의 선조다. 우문선비 일부는 모용선비에 편입됐으나 다른 일부는 고구려로 이주하거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남아 거란족의 모태가 됐다.

모용선비군은 346년 부여를 공격해 멸망시켰으며 부여왕 현(玄)과 백성 5만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모용황은 부여현을 사위로 삼았는데, 왕맹과 곽경이 업을 함락할 때 부여·고구려·갈족 인질들과 함께 성문을 연 부여울은 부여현의 아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부여울은 전연에 의해 부여가 멸망했기에 전진 군대가 업을 공격할 때 같은 처지이던 고구려와 갈족 인질을 모아 조응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울은 전진에 투항한 후 고구려인 포로가 집단 거주하던 형양의 태수로 임명됐으며 정동장군(征東將軍) 부여왕에 봉해졌다. 부여가 재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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