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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리·걸·에·세·이

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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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소의 위력

한편 영미법계 국가에서는 기소 여부를 시민들의 대표로 구성된 대배심(Grand Jury)이 결정한다. 얼핏 보면 대배심이 민주주의에 더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래만 따지자면 오히려 왕권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12세기경 영국 왕 헨리2세는 왕의 재판소 관할권을 영주들의 관할 지역까지 확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대배심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치안담당관을 파견했다. 파견된 치안담당관은 대배심으로부터 그사이 발생한 사건들을 보고받고 선별적으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러한 대배심 제도가 13세기 왕권을 제한하기 위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규정되면서 영미법계 전통으로 확립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소권의 위력은 불기소권에 있다. 죄 없는 사람을 기소하더라도 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난다. 그러나 죄 있는 사람을 불기소하면 판사가 재판을 할 수 없다. 죄지은 사람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은 본전치기이므로 억울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기와 같은 죄를 지은 다른 사람이 처벌받지 않으면 더 이상 본전치기가 아니라 손해를 본 셈이 된다. 불공평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불의(不義)다. 정의의 본질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천 명을 처벌하더라도 한 명을 불공평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천 명이 억울해진다. 정의가 파괴되는 것이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면서 상시 서로 비교하고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공평이 쉽게 식별되고 크게 문제가 되며 사람에게 깊은 내상을 입힌다. 그렇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불공평을 초래할 수 있는 권력일수록 위세를 떨친다.

내 고향의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종합병원에는 류머티즘 ‘명의’가 있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은 비결은 사기였다. 노화로 인한 퇴행성관절염으로 팔다리가 아픈 노인에게 “류머티즘이다, 류머티즘은 암보다 무섭다, (손발이 뒤틀어진 류머티즘 환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나중에 이렇게 된다”라며 거짓 진단을 내린다. 그러곤 겁먹은 노인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다정한 표정과 말투로 “걱정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내가 주는 약만 꾸준히 먹으면 악화되지는 않는다”며 특정 제약회사의 류머티즘 약을 장기간 처방해왔다. 그 대가로 명의는 제약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챙겨 병원으로부터는 동료의사 연봉의 두 배를 받았다.

나의 부모님도 그 의사로부터 거짓 류머티즘 진단을 받고 7년 동안 항암제와 동일한 성분인 독한 류머티즘 약을 먹었다. 약이 독한 만큼 몸과 정신에 부작용이 심각했다. 이 사건이 지역 방송국에 보도되자 같은 피해를 보았다고 제보한 사람이 하루 만에 80명을 넘었다. 부모님과 내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제발 신고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던 의사와 병원은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범행을 일체 부인하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법복 안쪽에 새긴 표어

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
수사 결과 경찰과 수사검사는 기소의견을 냈다. 법원도 민사판결에서 의사의 사기 진료를 인정했다. 그러나 부장검사는 “피의자가 환자들에게 류머티즘이라고 거짓말을 한 사실은 인정되나 그런 행위는 피의자가 의사로서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한 것이므로 재물죄인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사 생활 동안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결론을 손수 작성해서 무혐의결정을 내렸다. ‘명의’의 처가에 검찰간부가 있었다.

뜻밖의 무혐의결정을 받고 보니 황망함, 분함, 좌절감, 무력감 등 온갖 악감정이 밀려들어 지옥에라도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따귀라도 맞은 듯한 모멸감도 들었다. 내가 믿고 사랑한 이 나라가 나를 초등학생 상대 불량식품 수준의 조악한 논리로 우롱하려 들었다고 느껴져서다.

수사기관에 지칠 정도로 장시간 협조한 피해자들은 그 결정에 류머티즘 진단보다 더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의사와 병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영업을 계속했고(심지어 지금까지도) 검찰간부는 영전했기에 이 나라에 더 정이 떨어진다고 했다. 판사인 나조차 배신감과 모멸감에 몸서리가 쳐지는데 일반 사람들은 이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큰 불신과 적의를 품을까. 검찰의 힘은 죄 지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기소권보다 죄 있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불기소권에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내 직업에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나 자신이 이처럼 불완전한 사법 시스템의 일원이라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내 부모도 지키지 못하는 놈이 무슨 남의 인권을 지키는 일을 하겠느냐는 자괴감도 들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퇴근하면 바닷가 카페에서 밤바다를 흘깃거리며 글을 썼다. 처음 몇 달은 벙어리가 하소연하려 용쓰듯 글이 써지지 않았다. 한참 후 문장이 제법 쌓일 때 즈음 돼서야 격랑 이는 거친 바다 같던 마음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내 소설 ‘보헤미안랩소디’는 바로 그 문장들을 모아 그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고 나니 내가 하던 일이 다시 보였다. 나는 그동안 오판으로 얼마나 많은 당사자를 이런 지옥으로 몰아넣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그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오판의 위험성을 머리로만 가늠하던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었다는 것 외에는. 그 사건 이후 재판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운전하다 가족을 잃어본 사람이 다시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법복 안쪽 가슴에 보이지 않는 세로줄 표어가 새겨졌다. “음식장사는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되고, 법조인은 정의로 장난치면 안 된다.”



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신동아 201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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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전 판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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