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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한국의 전문경영인

‘월급쟁이 사장’에서 지식경제시대 주역으로

  • 문주용 서울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월급쟁이 사장’에서 지식경제시대 주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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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기업의 전문경영인은 그저 전문경영인일 따름이었다. 능력과 전문성은 끈끈한 ‘혈연’ 속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돈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사람이 돈을 버는 지식경제 시대는 오너와 비오너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진정한 전문경영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1월 14일 저녁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현대그룹의 부사장급 이상 중역들과 주한 외국인 명사들이 부부 동반으로 환담하고 있었다. 현대가 매년 정초에 갖는 주한 외국인 초청 신년회였다. 올해도 현대의 고위 인사들이 거의 다 참석했고, 주한 외국 대사들과 외국 기업 대표, 국내 기업인과 언론인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저명인사 400∼500여명이 모여들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많은 참석자들은 먼저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건강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초부터 현대를 둘러싸고 불거진 새로운 관심사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주인공은 박세용(朴世勇·60) 인천제철 회장. 과연 박회장이 이날 행사에 참석할지, 심기는 어떨지에 많은 이의 관심이 쏠렸다.

‘패밀리’만 살아남는다?

박회장은 그룹 종합기획실장, 현대상선 회장, 현대종합상사 회장,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 굵직굵직한 자리를 거쳐온 현대의 대표적 전문경영인. 현대라는 울타리를 넘어 한국의 대표적 전문경영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지난해 12월30일 구조조정본부장에서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전격 전보됐다. 그 배경에 대해 갖가지 억측이 분분하던 차에 닷새 후 박회장은 돌연 인천제철 회장으로 발령받아 충격을 더했다.

그를 현대자동차로 보낸 것은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 때문이고 인천제철로 옮긴 것은 강원산업과의 합병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게 현대측의 해명이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그룹 최고위급 경영인을 불과 닷새 만에 두 번이나 인사조치한 것은 박회장이 현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상식 밖의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정몽구(鄭夢九)·정몽헌(鄭夢憲) 회장 형제의 파워게임에서 박회장이 새우등 터진 격이 됐다는 둥 현대의 구조조정 작업이 끝나면서 그의 ‘용도’가 폐기됐다는 둥 뒷소문이 무성했다.

중동 건설붐 시절, 경쟁업체들의 음해로 교도소까지 갔던 박회장은 당시 교도소에서 배운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지난해 해외 로드쇼를 통해 현대그룹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시킨 주역이다. 그는 차분한 성품과 투명한 눈빛, 유창한 영어로 현대의 구조조정 계획을 설득력 있게 런던과 뉴욕 금융가에 전달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해외 언론들도 그를 신뢰, 현대에 대한 우려의 시각을 거뒀다. 9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주영 명예회장을 위해 발 벗고 뛰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박회장이었던 만큼 연말과 연초, 두 차례에 걸친 인사는 의혹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박회장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저녁 6시 직전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이 행사장에 들어설 때까지 그는 현대 임원들과 밝은 표정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평소 말을 아끼는 편인 박회장이 그처럼 대화를 주도하는 것부터가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정몽구 회장은 영빈실에 있던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인사한 후 박세용 회장과 김형벽(金炯璧) 현대중공업 회장,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 유인균(柳仁均) 현대강관 회장과 함께 행사장 입구에 도열해 외빈들을 맞았다. 얼마 후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 회장이 입장하자 박회장은 그를 정명예회장에게 안내하면서 자리를 떴다. 정몽구 회장과 함께 있는 자리를 애써 피하려는 듯했다.

박회장의 경우에서 보듯 오너가 여전히 전권을 휘두르고 있는 한국의 기업구조에서 전문경영인의 좌표는 너무도 불안해 보인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갖췄더라도 ‘패밀리’의 일원이 아니면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게 우리나라 전문경영인의 현실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미약하나마 변화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제위기 이후 성과 지상주의가 급속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우리나라에도 전문경영인 시대가 싹을 틔우고 있다.

국내 4대 재벌인 SK그룹에서 전문경영인 출신의 손길승(孫吉丞·59) 회장이 그룹 총수에 오른 것은, 비록 ‘과도기 회장’이라는 시각이 있긴 해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로 기록될 만하다. 또한 김정태(金正泰·53) 주택은행장은 스톡옵션을 받는 전문경영인 책임경영제를 국내 은행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벤처 성공시대를 연 메디슨의 이민화(李珉和·47) 회장은 오너이면서도 실무형 전문경영인의 자질을 겸비한 경우다.

무서운 주주들

전문경영인 시대의 도래는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로 인식되고 있다. 국내 기업은 물론, 유수의 다국적 기업들과도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 오늘날, 어떤 경영방식이 생존에 더 효율적일 수 있는가는 개별 기업의 선택에 달려 있다. 유능한 전문경영인이 단지 오너와 혈연관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팽(烹)당하는 것도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전문적인 사업 지식과 비전을 갖췄다면 굳이 오너라고 해서 경영일선에서 배척할 까닭이 없다.

증권시장이 성장하고 외국인들의 투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도 전문경영인 시스템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태일 상무는 “요즘은 주주들이 경영실적을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오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또한 계열사들의 독립경영이 웬만큼 확보돼 주주들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이를 그룹 차원에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본격적인 한국 진출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기업들의 소유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과거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단기 수익을 챙기는 데만 열중했지만, 투자규모가 커지면서 이제는 긴 안목으로 자신이 투자한 기업의 경영실태와 지배구조를 주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삼성전자의 경우 외국인 투자지분이 50%를 넘는데 이들이 이건희(李健熙) 회장의 영향력을 문제 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마련한 ‘선진 공시문화 정착 방안’은 증권시장의 발달에 힘입어 바뀐 경영인관(觀)을 잘 보여준다.

금감원은 이 방안에서 벤처기업들이 최고경영자의 학력이나 경력 같은 주요 인적 사항을 공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경영자가 ‘과거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상세하게 기록하게 했다. 기업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잣대의 하나가 바로 전문경영인의 자질이라는 뜻에서다. 이 규정은 기술과 아이디어 등 인적 자원이 기업 성장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벤처기업에 우선 적용하겠지만, 머지않아 대기업에까지 확대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경영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데는 재벌 총수의 독단 경영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한몫하고 있다. IMF 위기가 업계 전반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했을 때 국민들은 경제위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가 기업 오너들의 ‘황제경영’에 있음을 알게 됐다. 이들이 단기 차입금을 끌어들여 무모한 투자와 신규 사업 진출을 남발한 결과 고금리 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수많은 기업이 무너졌고, 직원들은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거리로 내몰렸다.

최종현과 손길승

현재 워크아웃 상태에 있는 A그룹에서 임원을 지낸 K씨는 황제경영의 실상을 이렇게 전한다.

“회장말고는 계열사의 매출액이나 순이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룹 총 매출액은 물론 각 계열사의 매출액도 회장이 즉흥적으로 정했고, 계열사끼리 서로 기업 내용을 알지 못하게 했다. 회장이 ‘올해 매출액 성장률을 몇%로 해야겠다’고 하면 계열사 사장들은 그것에 맞춰 매출 목표를 수정했다.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장이 말하는 수치는 회사의 부실을 숨기고 은행과 여론을 속일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회장은 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50대 임원들에게 예사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미친놈’ ‘너 같은 놈한테 월급 주는 내가 바보야’ 같은 폭언은 단골메뉴였다. 임원들은 어떻게 하면 당장 회장에게 욕을 먹지 않을까만 궁리할 뿐, 곪아터지고 있는 회사 사정을 알리고 대안을 직언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업 총수들이 모두 전횡과 독단경영을 일삼았던 것은 아니다. 오너가 전문경영인과 완벽한 팀워크를 발휘해 기업을 살찌운 사례도 적지 않다. 고(故) 최종현(崔鍾賢) 전 SK그룹 회장과 손길승 현 SK 회장의 관계가 그 한 예. 두 사람 사이에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저한 상명하복 관계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

노태우(盧泰愚) 전대통령의 사돈이기도 한 최회장은 김영삼 정부 초기에 이른바 6공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에 소환된 그룹총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최회장은 검찰에서 6공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는지, 그 대가로 특혜를 받았는지에 대해 집중 추궁당했다. 누구를 시켜 정치자금을 제공했는지도 수사 대상이었는데, 당시 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최회장을 보필했던 손회장이 ‘심부름꾼’으로 거론됐다.

그러자 최회장은 검사에게 “손실장은 내 아랫사람이 아니라 내 친구이자 동업자”라며 그를 감쌌다. 최회장의 진술이 검찰 관계자를 통해 바깥에 알려지면서 비자금 사건으로 잔뜩 움츠리고 있던 재계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최회장은 그 전부터도 전문경영인에 대한 철학이 남달랐다. 최회장의 출근시간은 오전 11시였다. 그리고는 두세 시간 회장실에 머물다 오후 2∼3시면 퇴근했다. 최회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회사에 오래 있으면 계열사 사장들이 내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일을 못 하게 된다. 전문경영인들이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야 스스로 판단해서 경영노하우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업무에서도 최회장은 그룹 차원의 신규 사업 등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을 뿐 웬만한 일은 대부분 사장 전결로 처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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