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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企人 성공학|우성어패럴 이성림사장

재고품 창고에서 키운 드레스셔츠 명가의 꿈

  • 곽희자

재고품 창고에서 키운 드레스셔츠 명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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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경험이라곤 ‘시골 접장’ 10년이 전부. 새 직장을 찾아 무작정 상경했지만, 장부 정리도 제대로 못 하는 그에게 일을 주는 곳은 없었다. 재고의류 창고를 정리하는 바닥인생부터 시작했다. ‘정상’으로 올라서는 첫걸음이었다.》
우성어패럴 이성림(李成林·61) 사장은 직원들에게 “회사에 충성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 회사를 자기 발전의 도장으로 삼아라. 현재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더 나은 길을 찾아 떠나라”고 부추긴다. 사장이 직원들에게 이직(移職)을 독려한다?

실제로 그간 이 회사에서 일을 배운 후 독립, 경영인으로 변신한 사람은 7∼8명에 이른다. 이사장은 이들 가운데 창업자금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겐 사정이 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열린 경영’ 때문인지 우성어패럴에는 직원이 300여 명이나 되는데도 아직 노동조합이 없다. 사장이 사원들의 불편을 먼저 헤아리고 도와주다 보니 직원들도 노조를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하다.

1997년 노동부는 이 회사를 ‘노사협력우량기업’으로 선정, 인증서를 줬고 중소기업진흥공단은 이사장을 모범 중소기업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우성어패럴이 국내 드레스셔츠 판매량 1위 자리에 오른 것은 이처럼 탄탄한 노사협력의 결실인지도 모른다. 이 회사는 93년부터 영국 닥스와, 96년부터 프랑스 지방시와 제휴해 드레스셔츠를 만들어왔고, 지난해엔 자체 브랜드 ‘예작(藝作)’을 개발했다. 연매출액은 300억원대.

큰돈은 쓰고 푼돈은 아낀다

지난 3월 말,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자리한 우성어패럴을 찾았다. 300여 평의 공장 안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쳤다. 생산공정의 절반 정도는 자동화 시스템으로 이뤄지지만, 나머지 절반은 일일이 사람의 손길이 가야 한다. 고급품일수록 사람의 섬세한 손길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품은 형질에 따라 원단이 재단되고 부위별로 마름질되어 몸통, 칼라, 팔, 소매 순서로 봉제된다. 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제품은 10여 명의 직원이 두 차례에 걸쳐 품질 검사를 한다. 품질 검사는 모두 육안으로 하는데, 칼라에서 단추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펴 작은 흠집 하나라도 발견되면 모두 불량품으로 처리한다.

이 회사에서 하루에 생산되는 드레스셔츠는 3000장. 1년이면 90만장에 이른다. 불량률은 1% 정도. 이렇듯 불량률이 낮은 것은 이성림 사장의 품질지상주의 철학이 직원들에게도 심어졌기 때문이다. 필자와 함께 공장을 돌아보던 날도 이사장은 예리한 눈으로 하자가 있는 물건을 가려내 조용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렇다고 이사장에게서 날카로운 기업가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사장은 그가 한때 초등학교 교사였다는 얘기를 듣고 나면 금방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샌님 같은 외모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의례적이지 않은 겸손함이 몸에 배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업은 자기를 ‘오픈’하지 않으면 할 수 없어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비즈니스에선 인간관계를 통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 마음을 열고 진실을 보여줘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그는 20년 동안 사업을 해오면서 ‘修己而 敦本務實, 接人而 一輪赤心(자기를 닦는 데는 근본과 행동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접할 때는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라)’이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학식은 짧지만 살아오신 삶 자체가 그대로 모범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부딪히면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해결책을 찾았다”는 것.

이성림 사장은 1939년 경남 밀양시 단장면 단장리에서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결혼 후 그 역시 삼형제를 두어 3대째 딸 구경을 못 하는 집안이다.

그가 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부친은 “남자는 돈이 생기면 큰돈은 써야 하고, 푼돈은 아껴야 한다”고 충고했다. 큰돈은 반드시 써야 할 돈이니 써야 하지만, 푼돈은 낭비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말들은 지금까지 그에게 삶의 지표가 되고 있다.

교직 던지고 무작정 상경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학예회에서 늘 주인공을 맡을 만큼 노래도 잘 하고 영리했던 이씨는 4학년 때 같은 동네에 살던 말 더듬는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흉내내던 말버릇이 어느 결에 입에 배 자신도 그만 말더듬이가 되고 말았다.

집안 어른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하면 말 천천히 하라며 눈을 부라리고 혼을 냈다. 주변에서 문제 삼지 않고 내버려뒀으면 그러다 말 수도 있었는데, 자꾸만 “큰일났다” “애 저거 병신 다 됐다”며 수군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강박감에 빠져들어 정말 말더듬이가 되고 말았다.

말 더듬는 버릇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할 때까지 계속됐다. 한창 자기 성장의 밑바탕을 닦아야 할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말은 잘 못했지만 시험을 보면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아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등생이었다.

10년이 넘게 콤플렉스였던 말더듬이 버릇은 교사 발령을 받고 출근하던 첫날 일시에 해결됐다. 단 카스트의 ‘정신력의 기적’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은 정신력의 일부분이고, 정신의 깊은 부분은 수면 아래처럼 무한한 잠재력이 내재하는데, 이 잠재된 정신력을 이용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모든 것이 자기 마음과 정신력에 따라 좌우되니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신념을 가지고 도전하라는 것이었어요.”

이씨는 이 책을 읽고 말을 더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출근 첫날 단상에 올라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멋지게 인사말을 했다. ‘정신력의 기적’이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특활시간이면 말 더듬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가 교직에 몸 담게 된 것은 1957년 우연한 기회에 치른 ‘국민학교 교사 채용고시’에 합격하면서다. 그는 이후 10년간 밀양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 사이에 대학 진학을 시도하고 고등고시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제대한 후에는 모든 걸 접고 교직에만 충실했다. 그러다 30세가 되던 1969년, 그는 더 이상 교직에 전망이 없다고 생각, 떠나기로 했다.

“산업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교직의 인기도 떨어지고, 새로운 직장들이 생겨나면서 많은 교사가 교단을 떠났어요. 나보다 10살 많은 선배교사를 보니 사회에서 ‘한물 간 중늙은이’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그냥 있으면 10년 후엔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아무 대책도 없이 사표를 쓰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창고지기로 출발

그때껏 미혼이던 이씨는 전화국 말단 직원으로 있던 둘째 형 집에 얹혀 살면서 월부 책장사를 시작했다. 시골 교사로 10년을 살아온 그에게 이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이때 그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할 곳이 있고, 일 때문에 만날 상대가 있는 사람’이 한없이 부러웠다고 한다.

책 세일즈는 2년 만에 그만뒀다. 그가 갈 곳은 당시 7촌 아저씨가 운영하던 시대복장주식회사뿐이었다. 시대복장은 194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의류업체의 태두. 무역업 등록 1호로 정장과 숙녀복, 와이셔츠에 이르는 갖가지 의류를 생산하던 종합의류업체였다. 이 회사는 1960년대 말에 이미 소비자가격을 정찰제로 바꾸고 상품권까지 발행한 앞서가는 회사였다. 직원만 1000명이 넘고, 전국에 30여개에 달하는 체인점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시대 와이셔츠’와 ‘사자표 와이셔츠’는 당시 드레스셔츠 분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그는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사장을 만나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만 했다고 하면 문전박대당할 것 같아 책 세일즈도 하고 청계천에서 컴프레서 납품도 했다며 사회 경험이 많은 것처럼 그럴싸하게 둘러댔다. 사장은 일언지하에 그를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후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다섯 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사장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대뜸 “니를 도대체 어디다 쓰란 말이고?” 하고 내뱉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여기에서 물러서면 일자리 구하기는 꿈도 못 꾸게 된다 싶었다. 그는 한껏 독하게 마음먹고 쏘아붙였다.

“아저씨는 안 돌아가시고 끝도 없이 살 줄 아십니까? 제가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 민석이(사장의 아들로 당시 대학생이었다)가 사장할 때도 제가 회사에 도움이 안 되고 중요한 존재가 안 되겠습니까? 지금 일을 맡겨주시면 그때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어떤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

그는 집안에서 꽤 말발이 센 큰형님에게도 SOS를 보냈다. 큰형님이 올라와 사장을 만나고 얼마 후에 그는 구로동에 있는 창고 담당자로 발령이 났다.

1971년 겨울, 발령을 받고 구로동 창고를 찾아가니 덜렁 건물 하나에 경비 한 명과 파견 나온 대리급 직원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를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고, 무슨 일을 하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창고 문을 열어봤다. 재고품들이 먼지를 가득 덮어쓴 채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우선 재고품 묶음을 풀어 같은 종류의 옷끼리 분류했다. 그가 출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매일같이 제 시간에 나와 같은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창고에 들른 사장이 말끔히 정리된 재고품더미를 보며 “이런 물건이라면 다시 팔 수 있을 텐데… 이런 게 또 있나?” 하고 물었다.

“예. 저쪽에도 많은데 지금 정리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일을 시키던가?”

“시킨 사람은 없지만 그냥 이렇게 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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