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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

‘제2 경제위기’ 유령인가 현실인가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제2 경제위기’ 유령인가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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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F 관리체제 3년차. 온나라를 강타했던 외환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에 난데없는 제2 경제위기론이 불거지고 있다. 한국 경제는 또 다시 캄캄한 터널로 들어서고 있는가. 》
“경상수지 흑자 유지와 물가 안정을 위해 하반기에 필요할 경우 총수요 관리를 통해 경기 상승 속도를 조절하는 통화 긴축정책을 펴겠다… 아직 대내외적인 충격을 무리없이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체질이 튼튼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조조정이 지연되면 우리 경제의 대외 신인도가 다시 하락할 수 있다… 최근 금융시장에 나타나고 있는 신용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6월12일 한국은행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전철환 한은 총재가 쏟아낸 말들이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이후 통화당국이 통화긴축 가능성을 암시한 것도 처음이고, 그간 “펀더멘털이 좋다”며 한목소리로 항간의 ‘제2 경제위기론’을 잠재워온 우리 경제관료가 위기 조짐을 구체적으로 인정한 것도 처음이다.

5월 초부터 금융시장 주변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경제위기론은 S·P, 무디스 등 외국 신용평가회사들이 한국 경제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를 내놓은 데 이어 주가 폭락, 새한그룹 워크아웃, 재계 순위 1위인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꼬리를 물면서 현실감을 더해갔다. 언론은 외국 자본이 무더기로 빠져나가면서 한순간에 ‘아시아의 용’에서 경제주권을 내주고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애원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2년 반 전의 상황을 호들갑스럽게 상기시켰다.

그러다 5월 말 이후 주가가 다시 상승세로 접어들고,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 규모가 증가하고, 투신권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 방침이 결정되고, 현대그룹이 3부자 퇴진 등의 자구책을 내놓자 언론은 “무책임한 위기론이 진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며 시장 참여자들의 과민반응을 경계하는 쪽으로 논조를 바꿨다. 위기론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바짝 긴장했던 금융·증권시장은 한숨을 돌리고 낙관적인 관망세로 돌아섰다. 그런 상황에 중앙은행 총재가 다시 위기가 올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잊을 만하면 유령처럼 다시 나타나 떠도는 제2 경제위기론의 실체는 무엇일까.

위기의 징표들

위기감을 촉발한 가장 우려스러운 지표 가운데 하나는 경상수지 흑자폭의 감소. 수출 증가율이 소걸음을 계속하는 데 비해 수입 증가율은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무역수지 흑자 기조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해에는 분기당 46억∼70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지만, 올해 1/4분기에는 5억5000만 달러로 급감했다. 4월의 무역흑자도 2억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5월에는 13억7000만 달러로 올들어 최고 수준을 기록했지만, 20억 달러에 달했던 지난해 월 평균 무역흑자 규모엔 못 미쳤다(표1). 더욱이 5, 6월은 계절적인 이유로 연중 수출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달이다.

무역수지를 악화시킨 주범은 유가 폭등. 그러나 수출의 해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우리 무역구조의 취약성도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수출의 수입 유발도는 지난해의 경우 40%에 이르렀다. 100원짜리 물건을 수출하기 위해 40원어치의 원자재를 수입하는 셈. 특히 수출 주력군인 첨단 제품일수록 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 휴대전화의 경우 수출가격의 4분의 3을 부품 수입에 썼다.

수출 채산성도 악화되고 있다. 97년을 100으로 봤을 때 지난 1/4분기의 수출 채산성은 91 수준으로 떨어졌다(표2). 생산비는 계속 올랐지만 기업들이 가격경쟁력 저하를 우려해 수출가격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한국무역협회가 수출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환율이 10% 하락할 경우(즉 원화가치가 10% 절상될 경우) 수출가격(원화 표시)을 올릴 수 있다고 답한 기업은 52%에 불과했다. 이들 중에서도 6% 이상 인상할 수 있다고 한 곳은 16%뿐이었고, 나머지는 2∼4%밖에 올릴 수 없다고 답했다. 원화 절상에 따른 손실분을 기업이 떠안지 않으면 수출이 안 될 만큼 경쟁력이 낮다는 얘기다.

97년 외환위기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던 단기 외채가 꾸준히 늘고 있는 것도 걱정스러운 대목. 총외채에서 단기 외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IMF 구제금융을 받기 전인 97년 6월 57.2%까지 치솟았다가 97년 말 39.9%, 98년 말에는 20.6%로 떨어졌으나 이후 다시 증가, 지난 4월 말에는 32.9%로 늘어났다(표3).

국내 경기가 회복되면서 수입 수요가 증가하고 기업들의 단기 수입 신용이 늘어난 데다, 신용등급 상승을 기대한 금융기관들이 고금리 장기채를 저금리 단기 외채로 전환한 게 주원인이다. 단기 외채 비율이 40%대에 이르면 외부 충격에 취약, 외환위기로 빠져들 위험이 높아진다.

전철환 총재가 통화긴축 가능성을 언급한 것처럼 경기 과열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국민총생산(GDP) 성장률은 외환위기 이듬해인 98년 -6.7%로 추락했지만, 지난해 2/4분기 이후 내리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1/4분기에도 12.8%의 고성장을 지속했다(표4). 고성장은 국민소득을 올리고 실업을 줄이는 효과를 발휘하지만, 지나치면 물가 상승, 수입 증가로 인한 무역수지 악화, 외채 증가를 가져와 정상적인 성장을 저해하게 마련이다.

‘제2위기’는 내부에서 온다

그러나 이런 지표들이 당장 97년 말과 같은 외환 유동성 위기가 임박했음을 의미한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무엇보다 97년 말과는 달리 현재의 외환 보유고가 웬만한 충격은 견뎌낼 만큼 충분하다. 97년 외환위기 당시의 외환 보유고는 220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단기 외채는 무려 1000억 달러에 육박, 해외 채권자들의 채무 회수 사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지난 5월 말 현재 외환 보유고는 868억 달러, 단기 외채는 462억 달러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설령 외국인들이 단기 외채를 한꺼번에 다 찾아가는 상황이 발생해도 외환 보유고로 방어가 가능한 형편이고, 이런 형편에선 돈을 떼일 우려가 없으므로 한꺼번에 돈을 빼갈 까닭도 없다.

또한 단기 유출이 가능한 외국인 자본 중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한 자금의 비중이 지난 4월 말 현재 62%로, 외환위기 직전의 10%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이 모두 조지 소로스류의 핫머니(투기성 단기 자금)라면 이런 상황에 대출자금의 회수보다 주식 투자자금의 유출이 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의 대부분은 장기 자금이다. 이 자금은 위기가 닥쳐도 대출자금보다 훨씬 덜 민감하게 반응한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8∼11월에 빠져나간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은 전체의 10%, 대우그룹 사태가 터진 지난해 7∼9월에 흘러나간 자금도 6%에 지나지 않았다. 위기상황에 주식 투자자금이 오히려 충격을 흡수하는 범퍼 노릇을 해주는 것이다.

경상수지의 악화도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라는 게 경희대 김상국 교수(기계산업시스템공학부)의 견해다. 경상수지 흑자가 줄어든 것은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미뤄뒀던 투자를 본격화하는 한편 자금 여력이 생겨 채무 상환에 나섰기 때문이라는 것. 투자가 전년 대비 60% 이상 늘었으니만큼 설비와 원자재 수입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과소비나 과잉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수입 증가는 청신호일 수도 있다고 한다.

데이비드 코 IMF 서울사무소장도 경제위기론이 한창이던 5월24일 기자회견을 자청, “한국이 98년에 400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것은 수출이 잘 돼서라기보다 경기 침체로 수입이 너무 억제된 데 따른 것이기 때문에 비정상적이다. 경상수지 축소는 빠른 성장이 야기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파란 불’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위기의 불씨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97년의 경제위기는 그해 7월 태국에서 시작된 환란을 신호로 불과 몇 달 사이에 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지로 독감처럼 확산된 국제 단기 자본의 대출 회수 사태가 초래했다. 그러나 최근에 드러나고 있는 위기의 조짐은 양상이 다르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경영학과)는 “또다시 경제위기가 닥친다면 이번엔 외환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경제에 내재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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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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