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나는 판다. 고로 존재한다”

  • 김기영 hades@donga.com

    입력2005-05-06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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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 IMF위기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과거를 짚어보면 다가올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97, 98년의 경제위기를 돌아보면 유난히 영업직에서 두드러진 실적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매장을 찾는 발길이 뚝 끊어진 소비위축의 시대에는 반대로 고객을 찾아가는 영업에 활로가 있었다. 서민경제에 주름살이 깊어 가는 요즘, 영업으로 활로를 개척해온 판매왕들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의 반열에 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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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진 이사(45·대우자동차판매 종로지점)는 유명인이다. 97년, 98년 두 해에 걸쳐 대우자동차 판매왕에 오른 이후 지난해 4월에는 샐러리맨의 ‘별’이라는 이사에 오르면서 다시 한 번 화제의 인물이 됐다. 고졸 출신 영업사원으로는 업계 최초의 이사 승진이었다. 지난해 8월에는 MBC-TV ‘성공시대’의 주인공으로 선정돼 방송에도 출연했다.

    ‘성공시대’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방송에 얼굴을 내민 게 3∼4차례, 방송에 출연한 뒤로는 길을 가던 사람들도 그를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다. 강연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요즘엔 자동차 업계뿐 아니라 다른 업종의 세일즈맨들도 그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다. 한마디로 박 이사는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이 와중에도 박 이사는 자동차 영업사원이라는 본래 업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2000년에도 대우자동차 판매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지난 한 해 박 이사가 판 자동차는 모두 186대. 2위보다 딱 1대를 더 팔아 99년 잠시 빼앗긴 판매왕 자리를 되찾았다. 대우자동차라는 회사는 어려운 처지지만 대우차의 판매왕인 박 이사의 연봉은 1억원을 웃돈다. 그러니까 대우자동차에서는 흔치 않은 억대연봉자인 셈이다.

    지금은 성공한 세일즈맨의 상징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그의 ‘무명시절’은 서럽고도 길었다. 덕수상고를 졸업한 박 이사는 관리직 사원으로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덕수상고를 졸업하면 은행 등 금융권으로 진출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실력이 모자라 대우자동차에 지원서를 냈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대우차와 인연을 맺은 사연이다.



    “영업은 아무나 하는게 아냐”

    상고 출신이라 박 이사는 관리부 경리파트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직원들의 급여를 관리하던 중 일반 사원보다 영업직 사원들이 훨씬 높은 급여를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한 만큼 보상받는 영업직의 매력을 숫자로 확인한 뒤, 박 이사는 윗사람들을 졸라 영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163cm의 작은 키에 왜소해 보이는 체구, 한없이 선량해 보이는 얼굴…,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의 결심을 말렸다. “영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다시 생각해봐.” 심지어 영업파트에서조차 그를 의아한 눈으로 봤다. 그러나 한번 세일즈맨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박 이사를 말릴 사람은 없었다.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자동차 판매 일선에 나섰다. 82년의 일이었다.

    영업 현장에 나선 처음 몇 달, 박 이사는 별로 신통치 않은 세일즈맨이었다.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청계천 1가에서 9가까지 몇 번씩 오가며 전단지를 뿌렸지만 그를 찾는 전화는 없었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게 영업인데 아무리 열심히 돌아다녀도 단 한 대도 팔지 못하는 기막힌 현실이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이처럼 소득도 없이 다리품을 팔고 다니던 어느 날, 매일같이 전단지를 돌리는 그를 측은하게 본 청계천의 어느 업소 사장이 “영업한 지 얼마나 되느냐”며 박 이사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이곳은 경기(景氣)가 좋지 않으니 경기 좋은 곳에 가서 차를 팔라”고 충고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성공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경우였다. ‘그러면 어디가 경기가 좋을까? 어디 가면 차를 살 사람이 있을까?’ 영업사원이라면 당연히 했어야 할 고민을 박 이사는 한참 헛발길을 한 다음에야 시작했다.

    그때부터 경제신문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어느 분야가 경기가 좋은지 아는데는 경제신문을 탐독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문을 읽던 중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수해로 인해 흉작이라 채소 값이 급등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거다”며 무릎을 쳤다. 청과물시장을 찾아가야 차를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길로 당장 전단지를 챙겨서는 당시 서울 용산에 있던 청과물시장을 찾아갔다.

    큰비가 내린 직후라 신발에 배춧물이 들 정도로 시장 바닥은 질퍽거렸다.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차가 팔릴 것 같지 않았는데 전단지를 돌린 다음날 아침 ‘놀랍게도’ 자동차 값을 묻는 전화가 3통이나 걸려왔다. 며칠 뒤 처음으로 트럭을 팔았다. 그 후로는 승승장구였다.

    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도 박 이사는 신문을 꼼꼼히 읽는다. 돈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 뿐 아니라 고객과 만나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더라도 막히지 않으려면 신문 정독은 영업활동을 위한 필수적인 준비라고 믿고 있다.

    학연·지연은 철저히 피한다

    청과물시장에 자리잡고 차를 팔기 시작한 뒤 1년 반 동안 박 이사는 100여대를 팔아 영업사원으로는 성공적으로 데뷔무대를 장식했다. 잔치가 있으면 사비(私費)를 들여서 막걸리에 돼지머리를 돌리고, 시키지 않아도 나서서 노래도 부르면서 얼굴을 익혀 나갔다.

    이렇게 맨투맨으로 접촉한 결과 박 이사의 고객은 대부분 개인고객이다. 한 번 거래를 맺은 개인이 주변사람을 소개해주고 또 그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넓혀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알게 된 박 이사의 고객만 무려 6000여 명. 박 이사는 남들처럼 학연이나 지연 등 1차적 인간관계에 기대지 않았다. 오히려 아는 사람들에게는 차를 사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일상적 만남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이사의 이런 영업전략은 IMF라는 위기상황에서 오히려 빛을 발했다. 실제 박 이사가 대우자동차 판매왕에 오른 것은 지난 97년 이후, 즉 한국 경제가 심각한 몸살을 앓고 난 이후다. 법인을 상대로 수백 대씩 차를 팔던 영업사원들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차를 거의 팔지 못했다. 하지만 평소 개인 고객을 개척해온 박 이사에게는 위기가 곧 기회가 된 셈이다.

    2000년 12월까지 19년 동안 박 이사가 판 자동차는 모두 2598대. 99년 5월에는 한 달에 무려 57대를 파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숱한 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한 박 이사의 판매전략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박 이사는 가급적 날씨가 궂은 날 고객을 찾아다닌다. 비가 오고 태풍이 몰아칠 때 고객을 찾아가면 일단 상대방이 감동을 받는다. “이렇게 궂은 날 찾아오다니 정성이 대단한 걸” 하며 평소 문전박대하던 고객도 비바람을 맞으며 찾아온 박 이사에게 커피라도 한잔 대접하는 너그러움을 보인다. 이렇게 상대방이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차 팔기는 그만큼 쉬워진다.

    또 궂은 날에는 의사결정권자인 ‘높은 분들’도 외출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 마련. 따라서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구매결정권자를 만나기가 그만큼 쉬워진다는 얘기다.

    박 이사는 까다로운 고객일수록 더 정성을 다해 응대해준다. 그런 고객이 서비스에 만족을 느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번을 만나더라도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자신을 가꾸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양복을 차려입더라도 검은 와이셔츠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는 식으로 나중에 다시 만나도 ‘검정 셔츠의 대우차 영업사원’으로 상대가 기억할 수 있게끔 하라는 것이다.

    “자존심은 신발장에 벗어두고 출근합니다”

    옷뿐만 아니라 행동도 남과 다르면 좋다고 한다. 가령 남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인사법을 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실제 박 이사는 지금도 누구를 만나든 머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행동이 고객에게 은근히 감동을 준다는 게 박 이사의 지론이다.

    “옛말에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이 영업에서는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저는 아침에 출근할 때 자존심은 신발장에 벗어두고 나온다는 심정으로 영업에 임합니다.”

    억대 연봉을 받으며 고졸 출신으로는 업계 최초로 이사가 됐지만 박 이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대우자동차가 부도 위기에 처한 현실이 그것이다. 박 이사는 “경쟁사 영업사원이 부도 소문 퍼뜨리고 다니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객들마저 ‘대우차 곧 망한다는데 애프터서비스가 되겠어’라며 차 사기를 꺼려할 때 정말 사기가 떨어진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영업능력 있으니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은 어떠냐”는 말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택한 직장입니다.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대우자동차 박노진’이라고 나를 소개하고 다녔고 고객들과도 그렇게 관계를 맺어왔는데 이제 와서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박 이사는 마치 무슨 보물단지라도 보여주듯 조심스럽게 서류철 하나를 보여주었다. 표지에 ‘불만고객 리스트’라는 글자가 인쇄된 이 서류에는 고객의 불만사항이나 문제제기가 적혀 있고 이에 대한 처리과정이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이 서류철을 넘기면서 박 이사는 “신차를 인수한 뒤 불만을 제기한 고객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기록을 남기며 관리한다”며 “이렇게 일일이 문제점을 체크하고 처리하는 과정이 곧 고객만족이고 새로운 단골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말하지 않았지만 불만고객 리스트에는 박 이사의 성공비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비결은 바로 ‘정성(精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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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요…, 제가 이런 인터뷰를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석이 과장(35·현대자동차 천안서부영업소)은 인터뷰 내내 이 말을 되풀이했다. 처음 한 번은 인사치레려니 했는데, 여러 차례 반복하자 그의 겸손은 꾸민 것이 아니라 몸에서 우러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그의 다소곳한 태도를 신뢰하는 고객들이 이 과장과 계약하길 원했고, 그 결과 그는 지난 한해 모두 222대의 자동차를 판매했다. 한달 평균 18.5대, 공휴일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계약서를 작성한 셈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 과장은 현대자동차 전체 판매왕은 아니다. 이 과장 외에도 지난해 현대자동차에는 270여 대를 판 영업사원도 있고 240대 넘게 판 사원도 있다. 판매대수만 보면 이 과장을 능가하는 사원이 3명이나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측에서는 이 과장을 현대자동차의 ‘실질적인’ 판매왕으로 추천했다. 현대자동차측은 “실제 판매대수로는 이 과장이 4위를 기록했지만, 1∼3위를 차지한 사원들의 경우 렌트카 업체 등으로부터 한번에 20∼30대를 계약하는 등 꾸준한 고객관리로 올린 실적으로 볼 수 없으므로 실질적으로 이석이 과장이 판매왕이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성공한 세일즈맨이지만 이 과장은 한때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의기소침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과장의 왼쪽 눈 주변에는 교통사고로 인한 흉터가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학사장교 입대를 앞둔 90년 초, 화물트럭에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했으나 좀체 원래 모습을 회복하지 못했다. 얼굴에, 그것도 눈 주변에 큰 상처가 있다 보니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꺼려했다.



    의리의 해병전우회

    해군학사장교 교육을 마치고 이 과장은 해병대 장교로 복무한 뒤 93년 제대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취업에 나섰으나 얼굴에 상처가 있는 이 과장을 흔쾌히 채용하겠다는 회사는 없었다. 거듭되는 입사실패로 이 과장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현대자동차에서 합격증이 날아왔다. 이 과장은 “다른 회사는 모두 나를 외면했는데 채용해준 현대자동차가 고마워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알아준 회사에 보답하겠다는 심정으로 처음 영업활동을 시작했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거리로 나섰으나 그에게 차를 사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천군만마(千軍萬馬)와도 같은 원군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친목회 가운데 최고의 결속력을 자랑하는 해병전우회였다.

    “93년 11월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데 그해 연말까지 그레이스와 엘란트라를 각각 1대씩 전부 2대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사준 분이 해병대 중사로 제대한 해병전우회 회원이었습니다.”

    사실 연고판매만큼 세일즈맨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 과장의 경우 해병전우의 도움은 그 후 그의 자동차 세일즈맨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신도 당당하게 차를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소득이었다.

    본격적인 세일즈맨 생활 첫해인 94년 이 과장은 회사에서 제시한 목표인 72대 판매를 달성했다. 94년 연말 이 과장은 송년회식 자리에서 영업소 직원 모두 앞에 나서서 자신의 새해 포부를 밝혔다. “내년에는 반드시 우리 영업소에서 3등 이내에 드는 실적을 올리겠습니다.” 이 과장의 큰소리를 참석자들은 신입사원의 객기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95년 연말 결산 결과 이 과장은 모두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해 영업소 내 1등 사원이 187대를 팔았는데 이 과장은 128대를 팔아 당당히 3위를 차지한 것이다.

    95년의 성공은 그 후 이 과장의 영업활동에 모범이 됐다. 스스로 마음속에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일했다. 예를 들면 96년까지 충남 지역에서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판 기록이 209대였는데 이 과장은 이 기록을 깨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영업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판매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그러나 209대는 좀체 돌파하기 힘든 장벽이었다. 이 과장은 97년부터 99년까지 3년 연속 충남지역 판매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180대에서 190대 사이를 오르내렸을 뿐 200대 고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과장도 앞서의 대우자동차 박노진 이사처럼 법인 영업보다는 철저히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차를 팔아왔다. 200대 이상 자동차를 팔려면 한꺼번에 수십대를 사주는 법인 고객이 있어야 하는데 결국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보내고 말았다.

    2000년 이 과장은 마침내 200대 고지를 넘어섰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던 ‘200고지’를 넘어선 비결에 대해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잘한 것이 꾸준히 누적돼 좋은 결실을 맺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매번 차를 팔 때마다 고객이 조금의 불편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이런 그의 성실함이 소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손님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식적 멘트’말고 그만의 판매 노하우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거듭 판매왕이 된 비결을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여전히 싱거웠다.

    “몇 년간 해봤지만 판매에는 왕도(王道)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노하우입니다.” 이 말 끝에 이 과장은 “영업도 이제는 전문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즉 차를 팔면 이 세상 누구보다 차에 정통하겠다는 각오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장은 “영업사원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자동차의 구조와 판매제도에 대한 지식을 갖췄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최대의 판매무기로 삼고 고객들을 설득해온 까닭에, 이 과장은 지금까지 영업활동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시기를 “제품 자체의 결함 때문에 고객에게 불신을 받았을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 현대자동차의 ‘실질적 판매왕’ 이석이 과장의 꿈은 무엇일까. 그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야무진 꿈 두 가지를 소개했다. “현대자동차 본사에 가면 ‘명예의 전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동안 회사 발전에 공을 세운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명실상부한 전국 판매왕이 돼 이곳에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습니다.”

    첫째 희망을 말할 때 다소 들떠 보이던 이 과장의 목소리가 둘째 꿈을 소개할 때 잦아들었다.

    돈보다 목표달성이 먼저

    “처음에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나를 받아준 회사가 고마워 회사에서 정년까지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이름을 남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자동차 제조사 직영 영업소와 영업사원을 없애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자동차 판매시스템이 딜러 체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평생직장보다는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합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딜러로 나선다면 그 분야에서도 성공하고 싶습니다.”

    현대자동차 내에서도 손꼽히는 판매도사인 이 과장의 연봉은 7200만 원 가량. 판매왕치고는 억대 연봉에 못 미치는 것이 오히려 이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 과장은 “지금까지는 돈보다는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재미에 정신 없이 일을 해왔다”며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이다.

    한없이 겸손하고 수더분한 영업사원 이석이 과장. 그의 성공비결은 상대방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평범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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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보험왕은 이미 예영숙 팀장이 예약해놓았습니다. 1등은 정해졌고 누가 2등을 하느냐가 오히려 더 관심사일 겁니다.”

    삼성생명의 보험왕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회사 관계자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삼성생명 소속 보험설계사가 대략 6만여 명인데 그들 가운데서도 마땅히 견줄 만한 경쟁자가 없는 1등 설계사라는 소개에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삼성생명측이 보내온 자료를 보면서 그만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2000년 1월부터 12월까지 한 해 신계약 건수만 608건으로 월 51건. 같은 기간 거둬들인 보험료가 무려 130억원. 이를 월 단위로 쪼개면 한 달에 평균 10억8300만원. 예상 되는 연봉이 7억5000만 원으로 월 6300만 원꼴….

    보통 보험업계의 회계단위는 매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삼성생명의 2000년 회계연도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2000년 1월부터 12월까지 만을 따로 잘라내 설계사들의 실적을 비교한 결과, 예영숙 팀장(여·42·삼성생명 대구지점 대륜영업소)과 견줄만한 경쟁자는 없다는 것이 삼성생명측의 설명이다.

    지난해 예 팀장은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2000년 5월 삼성생명 연도상 시상식에서 연도대상 수상자로 선정돼 주위의 부러움을 산 데 이어 10월에는 저축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2000년 11월 현재 삼성생명 지역본부여왕 9연패의 대기록도 세웠다.

    이에 앞서 지난 98년에도 삼성생명 전국 여왕상을 받았고 그해에는 고액 연봉을 받는 보험인들의 세계 기구인 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 백만불 원탁회의)의 정회원에 가입하는 영광도 누렸다. 이듬해인 99년에는 대구방송이 선정하는 ‘보험 신지식인’에 뽑히는 등 다채로운 수상경력을 쌓았다.

    한마디로 예 팀장은 보험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삼성생명 홍보팀이 언론에 배포한 소개자료에는 예 팀장을 ‘움직이는 영업소’로 표현하고 있다. 예 팀장 한 사람의 보험 영업실적이 웬만한 영업소의 전체 실적을 능가한다는 데서 붙인 별명이다.



    연봉만 7억5000만원 추정

    이런 화려한 수식어의 주인공인 예 팀장은 우연히 보험설계사가 됐다고 한다. 삼성생명 입사 전까지만 해도 예 팀장은 시(詩)를 즐겨 쓰는 전업주부였다. 국영기업체 간부인 남편과 두 아이의 뒷바라지로 하루 해가 뜨고 지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여성이었다. 그러던 93년 늦은 봄 어느 날 남편이 가입한 보험의 내용이 궁금해 보험사를 찾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보험을 판매하러 다니는 설계사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회사를 방문해보니 교육프로그램이 있기에 보험상식이나 배워볼까 해서 등록을 했는데 그게 오늘날에 이른 계기가 됐어요.”

    대부분의 보험설계사들이 남의 권유로 이 일을 하게 된 데 비해 예 팀장은 철저히 자기판단에 따라 보험설계사가 됐다. 어떤 일이든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판단에서 시작할 때 효율이 높은 법. 예 팀장은 출발에서부터 남들과 다른 자세와 각오, 방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유지율 99%의 신화

    예 팀장은 무작정 아는 사람을 찾아가 보험에 들라고 떼쓰는 식의 영업을 하지 않는다. 판매에 앞서 고객의 직업, 취미, 생활환경, 가족사항, 성격까지 필요한 사항을 꼼꼼히 확인하고 체크한다. 그리고는 고객의 사정에 따라 저축형 플랜, 연금형 플랜, 보장성 플랜 등으로 나눠 가입을 권유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즉 고객의 처지와 조건에 따라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당사자에게 꼭 필요한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심한 배려 속에서 상품을 권유받은 고객이 감동하는 것은 당연하고 나아가 주변 사람을 소개해주는 소개계약으로 이어진다. 7년간 보험설계사 생활을 하면서 예 팀장과 이렇게 인연을 맺은 고객은 1000명이 넘는데 이들 모두가 한번 보험에 가입하면 좀처럼 해약을 하지 않는 고객들이라고 한다.

    “강요가 아니라 자기 필요에 보험상품을 선택했기 때문에 해약률이 낮을 수밖에 없죠. 저희 고객들의 보험 유지율은 99%라고 자신합니다.”

    예 팀장은 고객을 설득하고 계약이 성사되면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보험설계사들이 계약을 하고 나면 ‘이젠 끝, 다음 목표를 찾아 출발’하는 데 반해 예 팀장은 본격적인 고객관리를 계약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철저한 사전준비와 설득으로 계약을 성사시킨다고 해서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93년 입사 초기 예 팀장은 1건의 개인연금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9개월이나 꾸준히 고객을 방문하며 공을 들인 적 있다. 즉 한 번 시작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끈기 역시 보험설계사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자질이라는 것이다.

    예 팀장은 자신의 영업철학을 “만나면 무언가 도움이 되는 설계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보험 영업인이 아니라 고객의 금융컨설턴트 노릇을 할 정도로 전문 식견을 갖춰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갖추기 위해 예 팀장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자기계발에 투자하고 있다. 어떤 고객을 만나더라도 ‘눈높이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기본. 그래서 신문 읽기는 설계사 입문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은 일과라고 한다. 이런 노력 덕택에 예 팀장은 경제에서 프로야구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만물 박사로 통한다.

    고객 개척 등으로 분주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예 팀장은 자신의 팀원 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예 팀장이 사원을 관리하는 주 포인트는 기본자세와 상품교육, 그리고 배우자인 남편 면담이다. 설계사들의 활동에 가장 큰 장애는 남편들의 반대인데 그럴 경우 예 팀장은 배우자를 직접 만나 설득해 협력자로 만든다. 팀 회식 때도 식사 이외에 따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평소 소신 때문이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없다고 하던가. 이런 훈련을 거쳐서인지 예 팀장의 팀원들도 자연스럽게 우수 설계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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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옥 상무(여·40·웅진코웨이개발 8350지구장)의 하루는 충북 제천-청주간 국도에서 시작된다. 집이 있는 제천에서 청주까지 2시간이 넘는 길을 자가운전으로 달려 최근 문을 연 청주지부에 도착하면 아침 8시10분. 이때부터 최 상무는 30분 단위로 나뉜 하루 일과를 소화해야한다. 그리고 밤 10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는 하루를 보낸다.

    바쁜 시간을 비집고 인터뷰에 나선 최 상무는 시종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왜일까? 정수기 판매왕으로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까닭에 유복한 삶이 즐거워서일까. 그러나 이런 ‘통속적’ 이유로 설명하기에는 최 상무의 ‘웃음철학’에 남다른 깊이가 있었다.

    지금부터 3년 전 최 상무는 신장이 좋지 않아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했다. 염증으로 제 기능을 잃어가는 왼쪽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한 뒤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수술후유증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수술 부위의 부기가 빠지지 않은 탓에 임신부처럼 배가 불러 외출하기조차 불편했다. 남편과 아들들이 집을 나서면 하루종일 무기력하게 집을 지키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의 권유로 정수기물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얼마 뒤 거짓말처럼 옆구리의 부기가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최 상무는 “다른 어떤 동기보다 본인 스스로 제품의 품질에 확신을 가질 때 영업에 자신감을 갖는데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고 말했다.

    스스로 정수기 물의 효능에 믿음을 가지면서 웅진코웨이개발을 찾았고 제천지부에서 본격적인 정수기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정수기판매업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지난 현재, 최 상무는 충북과 인근 강원·경북지역에 9개 지부를 둔 8350지구 지구장이다.

    그의 직할 지부인 제천지부는 최 상무가 직접 회사를 꾸리고 사원들을 교육시키며 키워왔는데,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이곳의 총매출액은 15억8684만원이었다. 한 달 평균 매출액이 1억4426만원으로 웅진코웨이개발 일반 지부의 6배에 해당하는 실적이다. 제천지부 영업사원은 모두 20여 명. 이들이 한 달에 100대 이상의 정수기를 판매한 결과다.

    한쪽 신장을 잃고서 되찾은 자유

    여기서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 몇 가지. 첫째는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인 제천시에서 어떻게 전국 최고의 정수기판매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또 제천시를 중심으로 충북지역은 물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굳이 정수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인데 어떻게 이 고장에서 정수기 판매왕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최 상무는 “모든 영업이 그렇지만 마케팅 포인트만 제대로 잡으면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상무는 제천시가 물이 맑은 것은 사실이지만 인근에 시멘트 공장과 채석장이 있어 물에 석회질이 섞여 나온다는 점에 착안, 정수기를 설치하면 석회질이 걸러진 정말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을 핵심 판매전략으로 설정했다.

    “웅진코웨이개발 본사에서도 제천에서 이렇게 판매실적이 높은 데 대해 놀라는 눈치예요. 그런데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제천이 소도시이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치과가 많다는 점이 눈에 띄더라구요. 치과가 많다는 것은 물에 석회질이 섞여 나오기 때문인데 정수기가 이를 해결해줄 수 있다며 소비자들을 꾸준히 설득했습니다.”

    제천시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최 상무는 주변 지역으로 지부를 넓혀갔다. 99년에는 충주 원주 청주 음성 영주 등지에 지부를 개설해 모두 9개 지부를 둔 지구장으로 승격됐다.

    ‘제천에는 치과가 많다’

    최 상무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남편인 이광원씨도 이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남편이 지부장으로 있는 청주지부도 만만찮은 판매실적을 올리고 있다. 최 상무의 지난해 수입은 3억여 원. 웅진코웨이 관계자는 “남편의 수입까지 합하면 4억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웅진코웨이 등 국내 정수기 판매회사들은 개인별 판매왕을 뽑지 않는다. 자동차나 보험과 달리 본사가 지역 영업소를 직접 관리하지 않고 대신 딜러조직을 오래 전부터 활용한 까닭에 영업실적도 딜러 단위로 평가하고 수상도 딜러조직을 이끄는 대표자에게 한다.

    그러니까 최 상무는 그 자신도 영업을 하지만 자신이 이끄는 판매조직을 대표하는 딜러인데 ‘상무’라는 직함도 지구장급 판매조직을 이끄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직함이다.

    이런 영업 시스템 때문이라도 최 상무와 같은 딜러조직의 대표는 영업능력 외에도 조직관리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조직원들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신명나게 영업활동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 상무는 어떻게 조직원들이 즐겁게 일하면서 영업실적을 최대로 올리 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 7시부터 퇴근시간까지는 판매사원들이 그날 가져온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사원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면 어떻게든 해결방안을 보여주는 게 조직을 이끄는 리더라는 게 최 상무의 생각이다.

    낮에는 판매사원들이 미처 둘러보지 못하는 틈새시장이 있을까 해서 이곳 저곳을 직접 방문하고 예비고객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판매사원들에 정보를 알려줘 실적을 올리도록 독려한다.

    최 상무는 신나는 직장을 만들고 자신의 리더십을 키우기 위한 투자에도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에는 제천의 대원과학대 레크리에이션 강사과정을 마쳤다. 굳이 레크리에이션 과목을 택한 것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판매사원(최 상무는 ‘식구들’이라는 표현을 썼다)들을 재미있게 해줄 수 있어야 영업실적도 올라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 꿈은 사장님”

    지난해 9월에는 제천 세명대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 본격적인 경영수업도 쌓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책 읽기를 소홀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세일즈 분야와 경영 관련 서적, 그리고 틈틈이 신간소설도 읽는데 지금도 1주일에 3권 이상은 독파하고 있다고 한다.

    억대 수입을 올리는 성공한 세일즈맨이 됐지만 최 상무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다고 한다. 이왕 시작했으니 방문판매업계 최고의 판매왕이 되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웅진코웨이개발에 도진문 사장님이란 분이 있어요. 그분도 방문판매 세일즈왕 출신이신데 그분 같은 사장님이 돼 보는 게 목표입니다. 10년 이내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힘든 줄 모르고 움직이고 있어요.”

    최 상무는 누구를 만나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조금만 얘기를 나눠보면 그 웃음 뒤에 감춰진 야무진 도전정신과 미래에 대한 낙관을 엿볼 수 있다. 정수기업계의 독보적 판매왕 최 상무의 성공비결은 아무도 흉내내기 어려운 낙천적 인생관과 강인한 도전정신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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