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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인 성공학|한국아스텐 문재식 대표

돈벌고 환경지키는 아스팔트 재활용 개척자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돈벌고 환경지키는 아스팔트 재활용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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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고 싶다고? 그렇다면 쓰레기더미를 뒤져라!”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다. 한국아스텐엔지니어링(전화·02-3438-7500) 문재식 사장(文在植·46)은 말 그대로 쓰레기더미에서 연간 500억 원의 매출을 일궈낸다. 더욱이 이 회사는 부채율이 0%다. 지난해엔 신기술을 바탕으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되기도 했다.

많은 중소기업이 일감 부족으로 공장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느니 문을 닫느니 울상인데도 이 회사는 최근 중국과 3년간 9000만 달러어치의 ‘슈퍼 아스텐 쿡’(廢아스팔트 재생기) 3000대를 수출키로 계약했다. 수출물량이 너무 많아 아예 중국 현지에 공장을 지어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그래서 중국측과 각각 20억 원씩 투자, 오는 4월부터 지린성 창춘(長春)에 공장을 짓고 공장이 완공되는 대로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주차장 공사를 앞두고 있다.

1994년 7명의 직원으로 서울 뚝섬 야적장에서 컨테이너를 사무실 삼아 출발한 이 회사는 설립 6년 여 만에 이렇듯 급성장했다. 한국아스텐은 지난해 서울 삼성동에 4층짜리 새 사옥을 마련했고 충북 음성에 대지 80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어 이전했다. 여기에다 나이 마흔다섯에 늦둥이 아들까지 봤다는 문사장은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와 꿈만 같다”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

문재식 사장은 남들이 외면한 곳에서 길을 찾았다. 그는 불법매립이다, 토양오염의 주범이다 해서 걸핏하면 골칫거리로 거론되던 폐아스팔트를 100% 재활용해 자원절약과 환경오염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독창적인 기술로 다른 이들이 가지 않는 길을 공략, 국내 폐아스팔트 시장을 석권한 그는 96년 환경부로부터 ‘신한국인상’을 받았고, 98년에는 10대 벤처기업으로 선정되면서 벤처대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기름때 묻은 벤처사장

흔히 벤처기업이라고 하면 깔끔한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는 화이트칼라를 연상하기 쉽지만, 문사장은 그런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그는 1년 365일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공사 현장을 누비는, 자칭 ‘공돌이’ 벤처기업가다. 쓰레기를 자원으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환경산업을 일궈낸 창의적인 사고가 도전적인 벤처정신을 짐작하게 할 따름이다.

한국아스텐엔지니어링이 생산하는 제품은 슈퍼 아스텐 쿡 043(1t), 086(2t), 7000F(7t) 등. 이 밖에 대형 공사에 사용되는 20t, 30t형도 만들고 있다. 슈퍼 아스텐 쿡은 고정식인 30t짜리 외에는 모두 이동식으로 공사 현장 어디에나 가지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특히 겨울철 공사에 이점이 크다. 아스팔트 시공에 적절한 아스콘 온도는 150∼170℃. 그런데 영하의 날씨에선 공장에서 아스콘을 만들어 현장으로 싣고 가다간 도중에 식어버려 아스팔트를 깔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슈퍼 아스콘 쿡은 현장에서 바로 제품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어 전천후 시공이 가능하다.

문재식 사장은 아스팔트가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전쟁터도 예외가 아니다. 96년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일 때도 카탈로그 한 장 달랑 들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니 도로가 파괴됐을 것이고, 파괴된 도로는 언젠가는 복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예상대로 그는 두 대의 기계를 팔고 나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독종’이라고 했다. 문사장의 성공신화를 들은 중국 동북사범대학은 최근 그에게 3년간 객원교수로 강의해달라고 제의하기도 했다.

폭력조직 전전

문사장은 1955년 광주 양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부친이 위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그때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임신하고 있었다. 결국 서른여덟의 어머니는 유복녀까지 1남 4녀를 혼자 떠맡았다. 쌀장사를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던 그의 집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 됐다.

그는 차츰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키워갔다. 왜 내겐 남들에게 다 있는 아버지도 없고, 함께 싸워 줄 형제도 없고, 거기에다 가난하기까지 하단 말인가. 그는 골목에서 싸움질을 일삼는 반항아로 성장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끝까지 덤벼들었다. 그래서 그가 유년시절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배가 고팠다거나 싸우다 맞은 장면뿐이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집 텔레비전에서 김기수 선수의 권투경기를 보게 된다. 글러브를 끼고 주먹을 날리는 걸 보는 순간 바로 저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날 체육관에 달려가 등록했다. 자신을 방어할 목적으로 배운 권투는 훗날 학업까지 중단하고 건달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권투를 배우면서 그는 싸움판에서 ‘맞는 아이’가 아니라 ‘때리는 아이’로 변해갔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엔 뒷골목 주먹패들이 탐내는 인물로 자랐다.

그는 광주의 5년제 공업고등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2학년을 다니다 말고 중퇴했다. 그 후에는 폭력조직에 들어가 건달 생활을 시작했다. 아예 집을 나와 여관을 전전하며 밤낮이 바뀐 삶을 살았다. 그러던 74년, 그에게 방위소집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항상 자신의 삶에 회의를 갖고 있던 그는 ‘지금이 손뗄 기회’라는 생각에 서둘러 입대했다.

1년 6개월을 복무하고 76년 다시 광주로 돌아왔지만 딱히 배운 것도, 기술도 없다보니 갈 곳은 과거에 몸담았던 조직뿐이었다. 그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몇 년을 보내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어 신군부의 대대적인 폭력조직 소탕작전이 벌어지자 ‘건달 문재식’은 일본으로 피신했다.

일본에서 도망자 문재식을 기다린 것은 힘겨운 노동과 외로움이었다. 오사카에 짐을 푼 그는 교토, 나카야마 등지를 돌며 웨이터 일에서부터 용접, 선반, 재단, 재봉, 피혁가공 등 먹고 살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고통이 더 컸다. 그래서 늦은 밤 숙소에 돌아오면 자신과 대화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하루 12시간씩 진이 빠지게 일해봐야 자신의 삶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약을 먹고 죽으려고 수면제를 사러 갔는데 말이 돼야지요. 손짓 발짓 해가며 말했는데도 약사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러다 나중엔 신경질을 내면서 쫓아내더군요. 결국 약을 못 사서 죽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택한 방법이 물에 빠져 죽는 거였어요. 그런데 오사카에 있는 다리 위로 올라가 뛰어내리려 했더니 환한 달빛 아래로 시퍼런 물 속이 그대로 들여다 보이는 겁니다. 겁이 나서 도저히 못 뛰어내리겠더군요. 아마 그날 밤에 달만 안 떴어도 뛰어내렸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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