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CDMA 신화의 그늘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5-04-01 15:4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대한민국 인구 4623만명. 이중 절반이 넘는 2640여만명이 휴대폰을 갖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휴대폰은 몽땅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로 운용된다. 단말기도, 시스템도, 서비스도 다 그렇다. 가히 ‘CDMA 공화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다.

    그래서일까, 국민들은 CDMA라는 매우 까다로운 전문 통신기술 용어를 마치 자동차의 기어나 클러치처럼 심상하게 생각한다. 증시며 수출 동향, 정보통신산업에 관심이 많고 일간지 경제면을 꼼꼼히 챙겨 읽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아예, CDMA 중심 이동통신이 반도체를 밀어내고 한국 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총아로 등극한 형국이다.

    이래서야 좋든 싫든 CDMA라는 용어와 그 뒤의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다.

    ‘CDMA 띄우기’에 앞장선 곳은 청와대, 그리고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장관 양승택)와 삼성전자다. SK텔레콤, 한국통신, LG텔레콤, LG전자 등 기타 관련 대기업들은 오히려 그 뒤를 따라가며 ‘꺼리’를 제공하는 모양새다. 업계에선 CDMA와 부처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정통부의 조직 보존 논리, 양승택 장관의 남다른 ‘소신’, 여권의 ‘성공한 정보통신 대통령’ 만들기 시나리오 등이 합쳐져 지금의 ‘CDMA 편애’현상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과연 CDMA 이동통신은 그토록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넓은 시장을 갖고 있는 21세기 한국 경제의 꼭지점인가. 그렇다면 왜 IMT-2000사업자 선정 당시 기업들은 CDMA 기반의 ‘동기식’이 아닌 GSM(시분할접속 방식)에 기반한 ‘비동기식’ 서비스를 하겠다고 사투를 벌였는가.



    SK텔레콤·한국통신이 비동기식 사업자로 결정된 마당에도 왜 여당과 정통부는 CDMA 띄우기에 열을 올리고, 동기식 사업자인 LG텔레콤에 각종 ‘특혜’를 주려 발벗고 뛰는 것일까.

    CDMA, 장밋빛 미래는 있는가

    지난 8월30일 청와대에서는 대규모 수출전략회의가 열렸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그것도 이동통신산업 하나만을 주제로 한 매우 이례적인 자리였다. 정부 인사로는 이한동 국무총리, 진념 재경부장관, 양승택 정통부장관, 이기호 경제수석 등이, 산업계에서는 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사장, 구자홍 LG전자 부회장,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 등 130여 개 업체 대표가 참석했다.

    공식 주제는 이동통신이었지만 사실상의 주인공은 CDMA였다. 양승택 정통부장관의 보고는 온통 CDMA 이동통신 산업의 ‘장밋빛 미래’를 강조하는 데 바쳐졌다. 세계 이동통신 시장의 80%는 CDMA가 아닌 GSM 계열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간단히 무시됐다. 삼성전자 단말기 수출의 63%를 CDMA가 아닌 GSM이 담당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됐다. 수치는 적어 놓았지만 그런 ‘현실’을 반영한 GSM 수출 진작책이나 비전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

    양장관은 이날 회의에서 ‘모바일 비전 2005’라는 이동통신 수출 지원책을 발표했다. 이동통신 분야에 향후 3년간 2000억원을 투입하겠다는 것. 이 야심 찬 계획의 주력부대 역시 CDMA다. 그를 위해 선보인 것이 ‘환태평양 CDMA 벨트’와 ‘CDMA 실크로드’라는 신조어. 쉽게 말해 태평양 연안국에 CDMA를 퍼뜨려 우리 시장으로 만들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러시아를 거쳐 동구·서유럽·아프리카까지 장악하겠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살펴보면 정통부의 ‘의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한 예로 ‘세계 이동통신 표준 주도’라는 장을 보자.

    첫째, 국제 표준화기구 활동에 적극 참여하겠다며 세 단체를 열거해 놓았다. ‘CDMA개발그룹’, ‘통신산업협회’, ‘CDMA민간표준화단체’등. 여기에 유엔의 전기통신 공식 전문기관이자 범세계 전기통신 표준화 조직인 ‘국제전기통신연합’은 웬일인지 빠져 있다. CDMA 관련 조직만 강조해 놓은 것이다.

    둘째는 ‘중국·일본·인도 등과 차세대 이동통신 표준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것. 이를 통해 아시아권의 표준을 선도하겠다는 복안인데, 사실 중국 시장의 99.3% (2001년 2월 기준)는 GSM 등 타 방식을 선택하고 있고, 일본 역시 비동기식 IMT-2000을 준비중이다. 인도의 40여 개 사업자도 대부분 GSM이다.

    양장관은 심지어 통신국제단체 중 하나인 ‘CDMA개발그룹’의 주장을 빌려, 국내 업체들이 3세대(IMT-2000) 전 단계로 이미 서비스 중인 2.5세대 CDMA(CDMA-2000 1x)를 동기식 IMT-2000이라 못박으며 그 기술 개발에 매진하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이런 식이라면 왜 IMT-2000 사업권을 두고 나라가 들썩이도록 그 난리를 피웠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한마디로 GSM이 발전한 비동기식, 그것도 우리나라 이동통신 시장의 85%를 장악하고 있는 SK텔레콤과 한국통신이 선택해 2~3년 안에 상용화하기로 국민과 약속한 기술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시와 폄하로 일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이미 동기식 IMT-2000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러니 비동기식 서비스는 일찍 시작할 이유가 없고, 심지어 불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의도마저 풍겨나온다.

    이에 대해 회의에 관여했던 한 업계 인사는 “한마디로 꿈 같은, 현실성이 미약한 이야기들”이라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이번 회의는 정통부의 CDMA 편애에 ‘국익 추구’란 정당성의 가면을 씌우기 위한 작업에 다름 아니었다. 업체들도 그런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대로 맞춰갈 수밖에 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세계 CDMA 시장 현황’이란 제목의 그림이다. 세계 전도를 그려놓고, 아이슬란드와 아프리카·유럽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에 ‘CDMA 색깔’을 입혀놓은 것. 한 업체 임원은 “과장된 부분이 많다. 러시아나 아프리카, 유럽,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등에 색을 칠해 놓은 건 좋게 말해 희망사항에 가깝다.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정통부에 자료를 요청했다. 세계 CDMA 시장에 대한 통계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대륙별 CDMA 사용자 수 외에는 다른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듯 부실한 자료로 대통령에 올리는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냐고 물었다. 관계자는 “업계 도움도 받고…” 하며 말끝을 흐렸다. 또 다른 담당자는 “더 자세한 자료가 있으면 우리한테도 좀 달라”고까지 했다. 결국 업계를 수소문해 자료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알게 된 실제 상황은 정통부 보고서와 차이가 컸다.

    에 나열된 국가 외에 CDMA를 선택한 곳은 거의 없다. 또 채택 국가 중 한국, 아이티를 제외한 대부분은 복수 표준을 선택하고 있다. 에 나온 국가들의 CDMA 점유율 평균이 22.3%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 휴대폰 수출 63%는 GSM

    정통부는 종종 “우리나라는 CDMA 종주국이다, 이쪽 시장이 GSM보다 좁은 건 사실이지만 다국적기업들과 싸우느라 용의 꼬리가 되는 것보다는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편다. 우리나라 이동통신산업 수출의 실상은 어떨까.

    에서 보듯 이동통신 산업 수출 실적이 가장 탁월한 분야는 CDMA가 아니라 GSM 단말기다. 중국·홍콩에만도, 올 상반기 CDMA 휴대폰 수출량은 4만8000대, 116억원어치였지만 GSM 단말기는 144만9000대를 팔아 543억5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CDMA 단말기보다 5배 가량 많은 액수다. 삼성전자의 경우 전체 이동통신 수출의 63%를 GSM 단말기가 차지하고 있다.



    통신 장비의 ‘꽃’은 단말기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규모가 워낙 큰데다, 한번 뚫린 시장에는 지속적인 납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시스템 수출 규모는 전체 이동통신 수출액의 6.8% 수준. 그나마 세계시장의 85%를 차지하는 GSM 쪽은 전혀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중국 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삼성전자의 CDMA 시스템 중국 진출은 올 상반기 최대 경제뉴스 중 하나였다. 대통령까지 나서 세일즈 외교를 펼친데다 중국 이동통신 시장의 엄청난 잠재력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시장에서 CDMA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이번 수출건 역시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을 쓰는 업계 인사가 적지 않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도 “적자인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시중에는 “적자액이 500억~6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시장 진입을 위해 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한 때문이다. 낙찰 순위도 루슨트테크놀로지(27.4%)→모토롤라(25.7%)→노텔(16.8%)→에릭슨(15%)→중흥통신(8.6%)에 이어 6위(7.5%)에 그쳤다.

    LG전자는 아예 낙찰에서 탈락했다. 여기에는 씁쓸한 뒷얘기가 있다. 낙찰 순위 5위를 기록한 중국 업체 중흥통신은 3년 전부터 LG전자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연구원들이 설립한 모 벤처기업으로부터 CDMA 기술을 배워왔다. LG전자는 중국에 CDMA 서비스가 시작될 경우 중흥통신과 제휴해 현지 합작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입찰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중흥통신이 돌연 태도를 바꿨다. LG전자는 부랴부랴 수신그룹이란 업체와 손잡고 입찰에 참여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기술만 전해주고 팽(烹)당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해외 유력 기업과 중국 내 업체들 사이에 한국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넓지 않다”고 말한다. ▲현지 업체의 무리한 기술이전 요구 ▲합작 진출만 가능 ▲완제품 수출 불가 등 까다로운 조건이 많은데다 국내 기업간 과당 경쟁, 그로 인한 ‘자살 가격’ 등 난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협적인 건 중국 내부 역량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점. 1999년 중국 시장에 대한 현지 업체 점유율은 3.7%에 불과했지만 2000년에는 15%로 증가했고, 2003년에는 45%, 2005년에는 80%까지 올라갈 것으로 중국 정부는 전망하고 있다. 결국 ‘CDMA 수출 입국’ 신화의 시험대인 중국 시장에서 우리 업체들은 소문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것이다.

    다른 국가들의 경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3년간 정통부는 중국 외에도 호주·인도·사우디아라비아·인도네시아·베트남·몽골·모로코·캄보디아에 CDMA 수출 길을 트기 위해 장·차관 방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계약을 맺은 것은 중국·호주(2억달러)·인도(1억6000만달러)·인도네시아(1400만달러)·몽골(300만달러) 정도다.

    상황이 이런 만큼 많은 전문가들은, 시스템보다 경쟁력이 월등히 높은 단말기 수출에 진력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 등 국내 장비업체들의 경쟁력은 단말기에서 나온다. 2세대 및 2.5세대에서 쌓은 실력을 더욱 배양해 3세대(IMT-2000) 세계시장에 도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비동기식 기술 축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난 5월 정통부 산하 ETRI는 3세대 시장에서 ‘동기식’의 점유율이 40%에 이를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 회사를 비롯, 세계적 조사기관들은 2세대와 마찬가지로 3세대에서도 2(동기) 대 8(비동기) 비율이 유지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한 유명통신업체 한국 지사장의 말이다.

    참고로, 올 상반기 삼성전자의 세계 휴대폰 시장(GSM+CDMA) 점유율은 6.7%다. 노키아(35%)→모토롤라(14%)→에릭슨(7.5%)→지멘스(6.8%)에 이어 5위를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높은 휴대폰도 아직 갈 길이 먼 셈이다.

    정통부는 왜 이토록 ‘CDMA 띄우기’에 골몰하는 것일까. 업계에서는 가장 큰 이유로 ‘정통부의 조직 보존 논리’를 든다.

    정통부 공무원들은 대체로 ‘CDMA 신봉자’들이다. 특히 양승택 장관은 ETRI 재직 시절 CDMA 상용화를 진두지휘한 사람 중 하나다. 그래서 업계에선 “양장관은 비동기식에 적대적 감정을 품고 있다”는 말까지 떠돈다.

    “CDMA는 정통부의 상징이다. 오늘의 정통부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자 최대 치적이기도 하다. CDMA를 부정하는 것은 곧 정통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 정통부 사무관의 말이다.

    1995년 본격적인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를 앞두고 정통부와 업계는 ‘CDMA냐 TDMA냐’를 두고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당시 야당 보좌관이던 김모씨는 “관련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 보좌관으로부터 ‘우리 방에 1억원이 든 돈가방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논쟁은 체신부가 1991년부터 ETRI가 기술 개발에 참여하고 있던 CDMA를 단일표준으로 못박으면서 끝이 났다.

    체신부는 “이미 유럽 쪽에서 선점한 TDMA, 즉 GSM 방식으로는 승산이 없다. 위험이 따르더라도 새로운 표준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워낙 파격적인 결정이었던 탓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구설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91년 맺어진 ETRI와 퀄컴 간 공동기술개발협약서에 증인 자격으로 등장한 박헌서씨의 존재가 문제 됐다. 퀄컴의 의뢰를 받은 박씨가 당시 여권 2인자인 모씨를 통해 ETRI와 퀄컴 간 계약을 이끌어냈다는 것이었다. ETRI와 퀄컴 간 협약서 내용마저 퀄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돼 있어 업계에선 그 협약서를 ‘노예문서’라 부른다.

    한 업계 인사는 “다행히 CDMA가 성공적으로 상용화되고 숙원이던 첨단산업 수출 길까지 열리자 정통부는 크게 고무됐다. 산자부에 반도체가 있다면 정통부에는 CDMA가 있다는 식이었다. CDMA는 정통부 소속원들이 갖는 자신감의 원천이 됐다”고 설명했다.

    표준 논쟁은 IMT-2000 선정 과정에 다시 한 번 불거졌다. 정통부의 예상 혹은 바람과는 달리 SK·LG·한국통신 3사가 모두 비동기식을 원한 것. 이에 대해 정통부는 여러 이유를 내세워 업체의 결정을 번복하려 사력을 다했다.

    당시 선정 작업에 참여한 한 업계 인사는 “정통부에 들어가 비동기식 얘기를 하면 역적 취급을 받았다. 동기식(CDMA) 선택만이 선(善)이요 애국이었다. 업체들은 정통부로부터 (동기식을 선택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통신업계 인사 모두가 익명으로 처리돼 있는 것도 이러한 정통부 정서와 무관치 않다. 밉보여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표준 결정에 또 하나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 것은 삼성전자의 태도였다. 국내 CDMA 시장에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내수시장의 안정을 위해 동기식 사업자가 꼭 필요했다. 게다가 LG전자가 수년 전부터 비동기 기술 개발에 힘을 쏟아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과 달리, 비동기식 쪽으로는 별다른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삼성전자는 IMT-2000 선정 과정 깊숙이 관여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정통부는 ‘표준은 업계 자율에 맡긴다’는 거듭된 약속을 저버리고 ‘1동기식 2비동기식’이라는 기준을 제시했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SK·한국통신(비동기식), LG(동기식)가 사업자로 선정됐다.

    ‘IT 대통령 만들기’

    상황이 일단락된 다음에도 정통부가 노골적인 CDMA 편애를 멈추지 않는 건 요즘 일고 있는 산자부-정통부 통합 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CDMA라는 ‘간판 스타’의 건재야말로 정통부 조직 보존의 필수요소다.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도 개입해 있다. 김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을 흔히 정보통신(IT) 중심 경제 발전과 햇볕정책이라고 한다. CDMA는 ‘IT 대통령 만들기’의 핵심 아이템이다. 정통부와 여당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한 대형 통신업체 임원의 분석이다.

    또 하나 제기되는 문제가 통신산업의 구조조정이다. ‘신동아’는 올 3월호에 하나로통신 신윤식 사장이 ‘통신산업 3강 구도 구조조정’ 내용을 담아 청와대에 직보(直報)한 문건을 특종보도한 바 있다. 당시 ETRI 원장이던 양승택 장관은 여러 사람에게 “그 문건은 내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문건의 주 내용은 ‘국내 통신산업을 SK텔레콤, 한국통신, 포스코+LG텔레콤+하나로통신 등 3강 구도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포스코가 통신시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신 LG텔레콤 단독으로 동기식 사업권을 따낸 것. 그러나 양장관의 ‘3강 구도 재편’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는 ‘3강 중 하나는 반드시 CDMA 회사여야 한다’는 ‘소신’이 깔려 있다. 결국 양장관의 CDMA(동기식) 강조는 LG를 명실공히 3강 구도의 한 축으로 키우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최근, 정통부가 출연금 분납 조건·비대칭 규제 등 동기식 사업자를 위한 ‘당근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지난 7월 청와대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나 큰 파장이 예상된다. 이는 정통부가 사업자 선정 전 이미 ‘차별 지원’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요즘 통신업계는 LG텔레콤에 대한 특혜 시비와 ‘비동기식 IMT-2000 서비스 연기론’으로 시끄럽다. 일시출연금 완화, 주파수 대역 및 식별번호 우선선택권 등 LG텔레콤에 대한 ‘특혜’는 예의 동기식 지원 정책과 맞닿아 있다. SK와 한국통신의 ‘심기’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3사는 물론 삼성전자, LG전자, 기타 통신 관련 중소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가 비동기식 연기론이다. 정통부는 ‘비동기식 기술 개발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이미 서비스중인 2.5세대 CDMA 서비스가 사실상 IMT-2000 수준에 도달해 있으므로 서비스를 연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뜻을 숨기지 않고 있다. ‘CDMA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동기식 사업자인 LG텔레콤의 시장 점유율이 20%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정통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정통부는 동기식 IMT-2000 1x(2.5세대)와,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한 형태인 EV를 이동통신 분야 월드컵 대표주자로 선발했다고 밝혔다. 주관사가 비동기식 서비스를 할 한국통신 그룹의 KTF임에도 오직 CDMA만으로 월드컵을 치르겠다는 것. 지난해만 해도 정통부는 2002년 월드컵을 기해 IMT-2000 서비스를 상용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월드컵을 통해 우리의 앞선 이동통신 기술을 세계에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계획서엔 비동기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는 공동개최국인 일본의 NTT도코모가 올 10월, J-phon이 2002년 6월을 목표로 비동기식 IMT-2000 서비스인 W-CDMA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정통부의 거듭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2.5세대 CDMA는 3세대보다 전송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며, 국제 로밍은 아예 불가능하다.

    또 정통부는 사업권 배부의 조건으로 2~3세대간 로밍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동기식 사업자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비동기식에는 치명적이다. 쉽게 말해 CDMA인 2세대 휴대폰과 비동기식인 3세대 휴대폰 사이에 호환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인데, 비동기 사업자로서는 그와 관련한 신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서비스를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연기론에 관해서는 SK텔레콤이나 삼성전자도 정통부와 뜻을 같이한다. 국내 이동통신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SK로서는 IMT-2000 서비스 개시와 함께 시장 구도가 재편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2.5세대의 서비스 기간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야만 ‘본전’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동기식 서비스를 시작하려면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이 역시 뒤로 미루고 싶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삼성전자도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5세대 장비 및 휴대폰을 충분히 팔고 비동기식 기술을 개발할 시간이 필요하다.

    ‘CDMA 마피아’의 원죄

    한국통신의 입장은 조금 미묘하다. ‘만년 2위’ 자리에 머물고 있는 한국통신으로서는 IMT-2000 서비스 개시야말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민영화를 위해서는 기업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여기에도 서비스 개시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문제는 한국통신 계열사인 KTF 역시 2.5세대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투자비조차 회수하지 못했다는 것. 특히 같은 한국통신 계열사끼리지만 ‘덩치’를 키워 KT아이콤을 흡수통합할 ‘꿍꿍이’를 갖고 있는 KTF가 연기론에 무게를 더 두고 있어 경영진의 판단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정통부와 대형 서비스 업체, 장비업체들이 저마다 계산에 따라 미적거리는 사이 고통 당하는 건 IMT-2000 서비스에 투자한 중소·벤처 기업들이다. 돈은 들어갔는데 사업은 언제 시작될지 기약이 없다. 특기 비동기식 사업자에 투자한 업체들의 경우, 사실상 동기식 우대정책인 정통부의 2~3세대간 로밍 의무화 조항에 밀려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이에 한국아이티중소벤처기업연합회는 청와대와 정통부에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제출할 계획이다. 애초 9월10일 경 제출할 예정이었으나 ‘국정감사나 끝나고 보자’는 정통부의 뜻에 밀려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정통부의 지나친 CDMA 편애가 통신산업을 죽이고 있다”며 “하루라도 빨리 비동기식 서비스를 시작해 국내 중소기업들이 관련 기술, 애플리케이션 및 콘텐츠를 개발·응용·테스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통신산업뿐 아니라 경기 회복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장기 경기 침체로 국가 경제가 위협받고 있는 요즘, IMT-2000 사업에 대한 적극적 투자는 적지 않은 경기 부양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CDMA는 분명 뛰어난 기술이다. 우리 경제와 통신산업 발전에도 막대한 기여를 했다. 연세대 박한규 교수는 “CDMA를 단일 표준으로 택한 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다. 한 가지 기술에 모든 돈과 인력을 투자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도약이 가능했다. CDMA 성공은 분명 신화”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그늘이 너무 크고 짙다. 이제 지금까지의 성공에 안주하기보다 또 다른 모험에 뛰어들 때가 온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통신산업 발전을 선도해 온 정통부가 특정 기술표준에 집착해 업계의 우려와 원성을 사고 있다는 점은 깊이 고민해볼 일이다. 적어도 국민들로부터 ‘CDMA 마피아’라는 굴욕적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