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LG그룹의 ‘한쪽 날개’ 허씨家 스토리

55년간 내조의 道 지킨 ‘숫자귀신’들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ns@donga.com

    입력2004-09-01 17:2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LG그룹의 55년 동업자 허씨家. 구인회 - 구자경 - 구본무 3대에 걸쳐 대권(大權)이 이어지는 동안 줄곧 ‘내조자’, ‘2인자’, ‘조언자’의 자리를 지켜온 집안이다. 그룹 곳곳의 요직에 포진했어도 결코 앞으로 나서는 법이 없었다. 큰 목소리 내지 않기로는 LG 바깥의 허씨 집안 경영인들도 마찬가지. 그들 앞에 드리운 베일을 걷어봤다.
    ”경영은 구씨 집안이 알아서 잘한다. 처신을 잘해서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

    해방 이듬해, 젊은 사업가 구인회(具仁會)에게 거액의 자본을 투자, LG그룹의 주춧돌을 놓은 만석꾼 허만정(許萬正)은 훗날 자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1947년 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를 창업한 이래 55년 동안 구씨와 허씨 일가는 대를 이어 끈끈한 동반자로 사업을 꾸려왔다. 기업은 한 집안에서 경영해도 규모가 커지고 대를 넘기면 크고 작은 분란이 불거지게 마련. 하지만 LG는 두 핏줄이 기업을 이끌면서도 좀처럼 ‘잡음’이 새나오지 않았다.

    이는 여러가지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허씨가의 안분지족(安分知足)에 힘입은 바 크다. 허씨 집안은 대등한 동업자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구씨 집안에서 구인회 - 구자경(具滋暻·77) - 구본무(具本茂·57) 3대가 그룹의 법통을 잇고 주류를 이루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허만정 ‘창업투자자’의 혜안(慧眼)을 허씨네 또한 3대에 걸쳐 충실하게 따랐던 것이다.

    7월29일, 허준구(許準九) LG건설 명예회장이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 병원은 허씨 상가(喪家)가 아니었다. ‘허씨·구씨 상가’였다. 많은 구씨 집안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빈소를 지켰다. 일본에 머물던 구본무 LG 회장은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 조문했다. 구자홍(具滋洪·56) LG전자 부회장은 5일장 가운데 3일을 빈소로 퇴근했다. 구평회(具平會·76) 그룹 창업고문도 미국에서 급거 귀국했다.



    그럴 만도 했다. 허 전 명예회장은 그룹내 허씨 일가의 좌장이었다. 구씨 일가의 수장(首長) 격인 구자경 LG 명예회장과 양가(兩家)를 대표하는 원로였다. 허만정씨의 셋째 아들인 그는 연암(蓮庵)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LG를 일으킨 창업공신. LG화학, LG상사, LG전자, LG전선 등 주력 계열사 CEO를 역임했다.

    하지만 화려한 커리어와는 달리 그의 면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소리 없이 본업에만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는 허씨 집안 경영인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허만정씨의 여덟 아들이 모두 기업인의 길을 걸었고, 그들의 아들들 또한 대부분 LG 계열사의 CEO나 임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누구 하나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언론 인터뷰에 나서는 경우도 없고, 그 흔한 자서전이나 회고록 한 권 펴낸 사람도 없다.

    LG의 허씨(김해 허씨) 가문과 구씨(능성 구씨) 가문은 기업활동으로 인연을 맺기 전에 이미 지연과 학연, 혈연으로 연결돼 있었다. 두 집안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현재는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허씨 문중은 구씨보다 약 200년 앞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허씨네는 엄청난 재산을 모아 승산마을을 영남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으로 만들었다. 인근의 고성, 의령, 사천, 함안, 산청 등지에도 많은 농토를 소유했는데, 그래서 승산마을 허씨 중엔 천석꾼이 10여 집, 만석꾼도 두 집이나 있었다고 한다. 허만정씨는 그 중에서도 첫손꼽히는 만석꾼이었다.

    허씨 집안이 이렇듯 큰 부자가 된 이치는 간단했다. “지독히도 부지런하게 일해서 벌고, 번 것은 쓰지 않았으며, 쓰지 않으니 자연히 쌓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허씨네 사람들의 근면과 절약에 관해서는 전설 같은 얘기들이 전해온다. “담뱃대에 담배를 재고 빨기는 하지만, 불을 붙이지 않고 입김만 내뿜었다” “여름에 부채를 펴고는 있지만, 부채가 상할까봐 부채 대신 얼굴을 흔들었다” “머슴들이 일하는 곳에 와서 담뱃대에 담배를 재놓고 가곤 했는데, ‘내가 언제 이 담배를 피우러 올지 모르니 쉬지 말고 일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승처럼’ 쓸 줄 아는 미덕도 겸비한 구두쇠였다. 허씨가는 이른 아침이면 쌀 한 말로 밥을 지어놓고 날마다 몰려드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끼니를 대줄 만큼 인심이 후했다고 한다. 1920년 4월13일자 ‘동아일보’는 허만정씨의 부친인 허준(許駿)씨가 “생활비만 제하고 나머지 재산을 전부 공익사업에 쓰고자 해 재산가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허만정씨도 1925년 진주에 일신여고(지금의 진주여고)를 세우고, ‘백산상회’라는 위장회사를 만들어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구씨네도 원래 천석꾼 소리를 듣던 집안이었으나, 연암의 조부가 30년 동안 청렴한 관직생활을 하면서 치부는커녕 오히려 가산을 축내는 바람에 연암이 태어날 무렵엔 300, 400석 규모로 줄었다고 한다. 1984년 출간된 연암의 일대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구씨 집안은) 큰 부자는 아니었고, 큰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허씨네가 재(財)를 가지고 얼굴을 들고 있다면, 구씨네는 기(氣)를 가지고 산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집성촌에 사는 이성(異姓) 집안인 데다 어느 한 쪽이 크게 기울지도 않는 터라 양가는 대대로 겹사돈을 맺으며 인연을 쌓았다. 연암도 만 13세이던 1920년,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허만식(許萬寔)씨의 장녀 을수(乙壽)양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보다 앞서 허만식씨의 차남인 인구(仁九)씨가 연암의 고모와 혼례를 치렀는데, 신랑이 요절하는 바람에 “기왕 맺은 인연이 아까우니 다시 한번 맺어보자”고 얘기가 됐던 것이다. 연암의 장인 허만식씨는 허준구 전 명예회장의 육촌형이다.

    그러나 최근 이 공동경영 그룹에 ‘결별’이라고까진 볼 수 없어도 ‘우호적인 분가(分家)’로 받아들일 만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LG그룹은 내년에 단일 지주회사를 출범시키겠다며 구씨와 허씨 가문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을 활발하게 거래하고 있다.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한 계열분리에 들어간 양상이다.

    계열분리가 마무리되면 구씨 일가가 전자·통신·화학·금융부문 계열사를, 허씨 일가가 건설·유통·정유부문 계열사를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해에 허창수 LG전선 회장이 LG건설 회장으로, 허명수 LG전자 상무가 LG건설 상무로, 허태수 LG증권 상무가 LG홈쇼핑 상무로 자리를 옮기는 ‘인적 분리’가 이뤄진 바 있다. 허동수 LG칼텍스정유 회장도 LG에너지 회장을 겸해 정유부문에서의 입지가 강화됐다.

    그룹측은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지주회사로 나아가기 위한 양가 대주주들의 지분정리 과정에 불과하다”며 “회사가 쪼개지는 게 아니라 두 집안이 함께 지주회사로 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급작스런 그룹 분할 가능성은 낮지만,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경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양가의 지분율에 따른 ‘교통정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물론 이 작업이 끝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LG의 한 임원은 “두 집안의 계열분리가 이렇듯 시간을 갖고 잡음없이 소프트 랜딩(연착륙)한다는 것도 아무 기업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LG의 오늘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것일까. 생전에 연암은 자손들에게 이런 충고를 남겼다고 한다.

    “한번 사귄 사람과는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말라.”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그 무렵 서당뿐이던 승산마을에도 신학문을 가르칠 보통학교가 들어섰다. 신학문에 관심을 보인 것은 허씨 집안이 먼저였다. 허준구 전 명예회장의 동생인 허완구(許完九·66) (주)승산 회장은 “우리 집도 구씨네처럼 보수적인 유교 집안이었지만, 자식들을 일찍부터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보내는 등 신학문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말한다.

    연암도 처가의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학을 배우던 연암은 이미 외지에 나가 새 바람을 만끽하고 돌아온 손위 처남 허선구(許善九, 훗날 ‘중외일보’ 사장)씨 등의 권유로 초립을 벗고 머리를 깎은 뒤 결혼 이듬해인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학했다.

    보통학교를 마친 후에는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처가에서 학비를 댔다. 하지만 얼마 후 장인이 갑작스레 타계하는 바람에 학비 지원이 끊겨 연암은 중앙고보 2학년을 마치고 낙향했다.

    허씨 일가에서 구씨네와 처음으로 비즈니스 관계를 맺은 것은 연암의 막내 처남인 허윤구(許允九)씨다.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나온 윤구씨는 ‘선만물산’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만주에 마늘과 명태 등을 수출하고 콩 등을 수입해 팔았다. 1937년, 진주에서 포목상을 하며 목돈을 손에 쥔 연암은 무역업에 관심을 가져 선만물산에 투자했다. 연암은 이를 계기로 만주를 드나들면서 안목을 넓혔다.

    하지만 10년 후에는 허씨네가 구씨네에게 사업 밑천을 댔다. 1945년 11월 연암은 직접 무역업에 뛰어들 요량으로 부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혼란기인 데다, 물건을 실어오려고 일본으로 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는 등 액운이 겹쳐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을 허송하고 있을 때 허만정씨가 3남 준구씨를 데리고 부산까지 연암을 만나러 왔다. 당시 24세로, 도쿄에서 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준구씨는 연암의 동생인 철회(哲會)씨의 맏사위라 허만정씨와 연암은 사돈 사이였다. 연암과 마주앉은 허만정씨는 대뜸 용건부터 털어놨다.

    “내가 사돈의 사업역량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일이니 청을 들어주소. 이 아이를 맡기고 갈 터이니 밑에 두고 사람 만들어주소. 사돈이 하는 사업에 내가 출자도 좀 할 작정이오.”

    연암은 사돈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돈이 투자한 돈을 밑천으로 ‘아마스구리무’라고 불리던 화장 크림 판매업에 뛰어들어 꽤 많은 이문을 남겼고, 이듬해인 1947년에는 크림을 직접 생산하는 데 성공, LG화학의 전신인 락희(樂喜, LUCKY)화학공업사를 설립해 LG그룹의 역사를 열었다. 허준구 청년은 락희화학공업사 이사 자리에 앉아 그 역사의 한 장을 쓰기 시작했다.

    허씨 집안에도 여러모로 실속있는 투자였다. 사업 성공에 따른 투자수익도 컸거니와, 준구씨를 시작으로 허씨 집안 젊은이들이 잇달아 LG 경영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시운(時運)도 따랐다. 1950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면서 지주들은 정부에 땅을 내놓고 지가증권을 받았다. 그러나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지가증권은 휴지조각으로 변했고, 그 바람에 많은 지주들이 몰락했다. 다행히 허씨네는 워낙 땅이 많았던 데다 농지개혁 이전에 상당량의 농지를 처분해 연암의 사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허만정씨 슬하의 8형제 중 장남은 고 허정구(許鼎九·1911∼99)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이다. 보성전문 법학과를 다니며 일찍이 세상의 변화를 목도한 그는,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나 지으며 지주로 편안히 살아가는 삶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부친으로부터 사업자금을 얻어내 마산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했다. 장남이 사업을 하겠다고 대처로 나가자 부친을 모시며 가산(家産)을 돌보는 일은 차남 학구(鶴九·1912∼99)씨의 몫이 됐다. 이 때문에 허만정씨는 장남과 차남의 길은 이미 정해졌다고 보고 셋째 아들을 연암에게 의탁했던 것이다.

    허정구씨는 LG 경영에 참여한 대부분의 친족들과는 대조적으로 삼성그룹의 창업멤버가 된 인물이다. 한국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허탈해 있던 그는 부산에 피난해 있던 삼성의 이병철(李秉喆)·조홍제(趙洪濟)씨를 만나 의기투합했다. 세 사람은 어린 시절 산 하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울리던 처지.

    정구씨는 이씨의 권유로 삼성물산 전무를 맡아 훗날 삼성의 주력사로 성장한 제일제당(1953년)과 제일모직(1954년) 창업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이후 1961년 세 사람이 결별할 때까지 이병철씨는 제일모직 사장, 조홍제씨는 제일제당 사장, 허정구씨는 삼성물산 사장으로 그룹을 이끌었다. 삼성을 나온 후에도 조씨는 효성그룹을, 허씨는 삼양통상을 창업해 각자의 길을 걸었다.

    신발, 장갑 등 스포츠용품 전문 제조업체인 삼양통상은 현금 흐름과 재무구조가 좋기로 소문난 회사. 지난해 2287억원 매출에 16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고, 부채비율은 35%에 불과하다. 한때 전세계 나이키(NIKE) 신발의 80% 가까이를 OEM으로 생산, 공급했을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허씨는 1999년 타계하기 며칠 전에 자신이 보유한 56억원 상당의 주식을 회사에 기증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삼양통상은 현재 그의 장남인 허남각(許南珏·64) 회장이 경영하고 있다.

    허만정씨의 여덟 아들 중 창업 초기부터 LG에 몸담았던 이는 차남 학구씨와 3남 준구씨, 그리고 4남 신구(愼九·73)씨 세 사람이다. 형 정구씨 대신 고향집을 지키던 학구씨는 동생 준구씨보다 5년 늦게 LG에 합류했다.

    1951년 락희화학공업사는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사출성형기와 금형 등을 발주하고 부산 범일동에 공장 부지를 마련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러느라 일손이 달리자 연암은 본가를 지키던 학구씨를 불러들여 아들인 구자경 이사와 함께 공장 건설업무를 맡게 했다.

    공장이 완공돼 빗이며 칫솔 등을 생산하기 시작한 뒤에도 허학구 전무와 구자경 상무는 밤낮없이 공장을 지키며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두 사람은 직함만 전무와 상무였지,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막일꾼과 다를 바 없었다. 겨울밤에도 비좁은 다다미방에서 군용 슬리핑백에 몸을 구겨넣고 새우잠을 잤고, 새벽 5시에는 일어나서 상인들이 오기 전에 빗은 2000개, 칫솔은 500개 단위로 포장해놔야 했다. 학구씨는 훗날 LG전선 부사장 등을 지냈으며, 연암의 타계로 1970년 구자경 회장이 취임하자 정회(貞會)씨 등 연암의 형제들과 함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준구씨는 “금전을 관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숫자에 밝았다고 한다. 연암이 장부란 장부는 죄다 그에게 떠안기면서 “지출과 관련된 건 모두 준구한테 물어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초기부터 판매·구매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화장 크림을 만들어 팔 때는 고무신 바람으로 거래처를 누비고 다니며 수금을 했고, 1950년대 중반에 첫 국산 치약을 생산했을 때는 판로를 열기 위해 직접 리어카에 치약을 싣고 시장으로 뛰어다녔다.

    크림이 너무 잘 팔려나가 그 원료로 쓰이는 글리세린이 바닥나자 온 부산 바닥을 훑고 다닌 것도 그였다. 각종 유지공장 창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군 부대에서 한두 병씩 흘러나오는 물건과 약방 진열장에 놓여 있던 물건까지 샅샅이 찾아내 크림을 만들었다. 그후 라디오, 흑백TV 등 LG가 국내 최초로 잇달아 내놓은 제품도 그가 판매를 주도해 그룹 성장의 토대를 닦았다.

    그는 최고경영인 자리에 오른 후에도 변함없이 꼼꼼하게 ‘현장’을 챙겼다고 한다. 32년 동안 그를 보좌하며 함께 일했던 LG전선 권문구 부회장의 회고.

    “1977년 7월, 경기도 안양에 하루 480mm의 폭우가 쏟아져 LG전선 안양공장이 2m 가까이 침수됐다. 기계들도 죄다 오수(汚水)에 잠겼다. 곧 녹이 슬어 못쓰게 될 판이었다. 그때 LG전선 허준구 사장이 꼬박 두 달 동안 밤낮없이 복구작업을 진두 지휘했다. 낮에는 예비군복에 장화 차림으로 악취가 진동하는 물 속을 헤치고 다녔고, 밤에는 직원들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격려했다. 그룹의 자본주이자 최고경영자가 그렇듯 몸을 던져가며 일하는 걸 보고 다들 혀를 내둘렀다. 덕분에 주변 공장 중에서 가장 빨리 재가동에 들어갔다. 나는 그때의 과로가 고인의 수명을 몇 년쯤 단축시켰다고 본다. 실제로 당신은 복구작업이 끝난 직후 가벼운 뇌졸중 증세를 보여 수술을 받았다.”

    기업의 흥망을 결정짓는 세 가지 요소는 사업 선택과 자원 배분, 그리고 인력 배치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 기업들이 제 의지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력 배치뿐이었다. 개발경제시대에 사업 선택과 자원 배분은 사실상 정부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의 경영조직은 중앙집권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를 기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스태프가 제 기능을 발휘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기업도 성장하고 선택의 폭도 확대되면서 전문 스태프의 기능이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대기업들은 잇달아 기획조정실을 설치했다. LG도 1968년 기조실을 만들었다. 연암은 주저없이 허준구 사장을 초대 기조실장에 앉혔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스태프였기 때문이다.

    허실장은 이듬해 연암의 지시에 따라 국내 민간기업 중 최초로 증권거래소 상장을 통한 LG화학의 기업 공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매출이 급성장해 시설 확장이 시급한데, 자본 증가율이 이를 따르지 못하니 기업 공개는 불가피했다. 지금은 상식적인 얘기지만, 당시만 해도 많은 임원들이 “회사를 공개해 일반 투자자의 자본을 끌어들인다는 건 회사를 팔아먹는 것과 다를 게 없다”며 펄펄 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허실장은 치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완벽한 계획서를 만들어 연암의 기업 공개 의지를 굳혔고, 이는 결과적으로 LG가 현대기업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연암이 준구씨의 동생 신구씨를 불러들인 것은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초여름께였다. 연암은 휴전이 멀지 않은 눈치라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고, 그래서 서울에도 락희의 거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5월에 동생인 구태회(具泰會) 전무를 선발대로 보내 을지로에 사무실을 냈지만, 구전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연암도 인력 충원이 시급하다는 건 알았지만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락희의 도약 여부를 결정지을 서울사무소에 아무나 갖다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암이 고심 끝에 떠올린 사람이 신구씨였다. 무엇보다 피붙이나 다름없는 준구씨의 동생이라 믿을 만했고, 운동을 많이 해 체력이 뛰어나고 재능도 출중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신구씨는 부산대를 졸업하고 조선통운에 근무하고 있었다.

    멀쩡한 직장에 잘 다니고 있던 신구씨는 “장사라고는 근처에 가본 일도 없다”고 주저했으나, 연암은 “자네 뒷조사 다 해봤다. 그만하면 일 하겠더라”며 두 말 않고 기차표를 쥐어줬다. 이튿날 야간열차 편으로 서울에 입성한 신구씨는 해가 뜨기가 무섭게 럭키 칫솔과 플라스틱 빗 보따리를 둘러메고 남대문시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니 ‘락희화학 업무부장’이 돼 있었다.

    신구씨는 한국 최초의 합성세제인 ‘하이타이’ 개발의 주역이다. 1962년 동남아 출장을 다녀온 그는 간부회의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콕에 갔을 때 강가에서 빨래하는 것을 봤는데, 이상한 가루를 타니까 거품이 나면서 때가 말끔히 빠졌습니다. 물어봤더니 미제 합성세제라고 해요. 우리처럼 양잿물에 끓이고 방망이질하고 비틀어짜는 빨래 방법에 비하면 얼마나 세련됐는지…. 우리도 그 합성세제라는 걸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전기세탁기가 보급되지 않은 데다, 당시 럭키는 빨래비누를 대량 생산해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던 터라 허신구 상무의 제의는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허상무는 그래도 계속 몰아붙였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 절대로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1년을 설득한 끝에 연암으로부터 “사람이 이렇게 집념을 갖고 우길 때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는 것 아니겠나. 자네 말대로 해보자”는 허락을 받아냈다.

    1966년 3월 안양에 첫 합성세제 공장이 들어섰고, 허상무가 밤잠을 설치며 직원들을 독려한 끝에 마침내 ‘하이타이’가 첫선을 보였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하이타이는 창고에 쌓여가기만 했고, 제품이 나온 지 한 달도 못돼 광고비 3000만원만 날리고 생산을 중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허상무는 “소비자가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소비자를 찾아가면 된다”며 배짱을 부렸다. 오히려 신문, 라디오, TV 등 전 매체로 광고공세를 확대했고, 도매상에서 구멍가게까지 직원들을 침투시켰다. 영업사원 판매교육도 직접 맡았다. 주택가 골목을 찾아다니며 주부들 앞에서 하이타이로 세탁하는 방법을 시범해 보이도록 가르쳤다. 그 자신도 외판원들 사이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빨래를 해보였다.

    그러자 주부들의 입소문이 이어지면서 몇 달 뒤부터 하이타이는 없어서 못파는 제품이 됐다. 럭키는 하이타이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견·모직섬유 세탁용 세제, 주방용 세제, 두발용 세제 등을 잇달아 내놓아 히트시켰다. 덕분에 다음해에는 합성세제 공장 시설을 두 배로 확장해야 했다.

    신구씨는 이렇듯 강력한 추진력과 뚝심으로 LG그룹이 성장기에 사업영역을 넓혀가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외환거래가 자유롭지 못하던 1950년대엔 은행에서 한도를 정해놓고 수입업자들에게 선착순으로 정부 보유 달러(KFX)를 팔았는데, 신구씨는 한겨울에도 매일같이 담요 너덧 장을 둘러쓰고 새벽부터 은행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는 럭키 사장, 금성사 사장, 금성사 미국법인 사장, 럭키석유화학 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1995년 구자경 그룹 회장이 아들 구본무 회장에게 대권을 이양하자 구회장과 형 준구씨 등 창업멤버들과 동반 퇴진했다.

    신구씨의 동생 완구씨도 한때 LG에서 근무했다. 1961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LG에 들어갔지만, 얼마 안지나 그만뒀다. 그는 “회사에 집안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뛰쳐나왔다”고 한다. “부리부리한 형님들이 만날 ‘네가 뭘 안다고 나서냐’고 호통을 쳐대며 입도 뻥긋 못하게 해 기가 질렸다”는 것.

    그는 회사를 나온 후 선박대리점 등을 경영하다 1969년 대왕육운을 설립, 화물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나중에 허씨가의 고향 이름을 따 사명을 ‘(주)승산’으로 바꿨다.

    승산은 LG그룹 계열사들의 화물운송 을 전담하며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한때 LG의 위장계열사로 의심받기도 했지만, 허완구 회장 일가가 회사 주식을 100% 가까이 보유한 반면 LG 대주주나 계열사는 승산의 주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허회장은 LG가 한창 사세를 확장할 때 얼마 간의 투자를 했는데, 나중에 이를 돈으로 돌려받는 대신 그룹의 운송사업 부문을 떼어받았다고 한다.

    지난해 승산은 계열 종합물류회사인 (주)SLS, 승산통운, 여수화물 등을 통해 약 600억원의 매출실적을 기록했다. 허회장의 아들인 용수(榕秀·34)씨가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부친을 도와 경영을 챙기고 있다.

    승산은 국내 매출보다 해외 매출이 몇배나 많은 독특한 기업이다. 1991년 승산은 경영난에 빠진 미국의 철강 가공업체 파웨스트 스틸(오리건주 유진 소재)을 인수해 사업을 해외로 확장했다. 당시 490만달러를 투자해 경영권을 인수했는데, 인수할 때는 외형이 3500만달러 정도였으나 현재는 2억5000만달러 규모로 성장, 모기업인 승산보다 커졌다. 승산은 파웨스트 스틸 지분 83%를 보유하고 있지만, 승산 임직원은 한 사람도 파견하지 않고 현지 인력들에게 경영을 일임하고 있다.

    허완구 회장 아래로는 ‘승(承)’자 돌림의 세 동생이 있다. 허승효(許承孝·59) (주)알토 사장, 허승표(許承杓·56) (주)미디아트 회장, 허승조(許承祖·52) LG유통 사장이 그들이다.

    허승효 사장이 경영하는 알토는 조명기구 디자인, 생산, 수입, 시공 등을 일괄 수행하는 전문업체. 아셈(ASEM) 타워 정상회의실과 컨벤션센터, 인터콘티넨탈 호텔, 서울역사, 인천공항 여객터미널, LG 강남타워 등의 조명시스템을 설계, 제작했다. 숭례문, 보신각, 비원, 동십자각 등의 문화재 조명설비도 이 회사의 작품이다.

    허승표 회장은 축구인에서 경영인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연세대와 서울은행 축구선수로 활동했으며, 1974년에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잉글랜드 프로축구 3부리그 아스날에 입단해 뛰었다. 은퇴 후에는 (주)승산에서 근무하다 1990년 삼영프로덕션을 인수, 회사 이름을 ‘미디아트’로 바꾸고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공중파 및 CATV 프로그램 제작, 국내·외 비디오 유통, CF 편집 등이 미디아트의 주업무. ‘내셔널 지오그래픽’ 비디오의 한국 판권도 갖고 있다. 허회장은 1991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허승조 사장은 1978년 LG상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무역, 영업, 기획, 유통부문을 두루 거쳤다. LG상사에서 유통사업부문장, 마트부문장, 영업본부장을 거친 뒤 2000년 LG백화점 사장에 임명됐다. 지난해 7월 LG백화점과 LG상사 할인점부문, LG유통이 통합하면서 통합법인인 LG유통 사장에 올라 LG그룹의 유통부문을 총괄하게 됐다.

    허준구 전 LG건설 명예회장 형제들의 아들 중에도 LG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의 차남인 동수(東秀·59)씨는 LG칼텍스정유 회장 겸 LG에너지 회장. 허회장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화학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1973년 LG정유(당시 호남정유) 사장 보좌역으로 입사한 이래 30년간 한우물을 판 한국 정유업계의 ‘얼굴’이다.

    입사 21년 만인 1994년 사장에 올랐는데, 그 이듬해 ‘테크론’이라는 상표를 내세워 국내 최초로 휘발유의 브랜드화를 시도, 시장점유율을 크게 높였다. 화공학 박사 출신인 데다 미국에서 석유회사 셰브론 산하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한 적도 있어 이론적 배경과 현장경험을 겸비한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허준구 전 명예회장의 아들 5형제는 모두 LG 경영인이다. 장남 창수(昌秀·54)씨는 LG건설 회장, 차남 정수(正秀·52)씨는 LG기공 사장, 3남 진수(進秀·49)씨는 LG칼텍스정유 부사장, 4남 명수(明秀·47)씨는 LG건설 상무, 5남 태수(兌秀·45)씨는 LG홈쇼핑 상무다.

    허창수 회장은 사촌형인 허동수 회장과 함께 LG의 ‘허씨 3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고려대 경영학과와 미국 세인트루이스대 경영학석사 출신으로 1977년 그룹 기조실 과장으로 입사했다. LG상사 홍콩, 도쿄지사 등에서 오래 근무해 국제경제 흐름에 정통하다고 한다.

    1995년 그룹 회장에서 물러난 구자경 회장은 허준구 당시 LG전선 회장이 자신과 동반 퇴임하자 그 자리에 허창수 LG산전 부사장을 앉혔다. 세 단계나 수직 상승한 파격 인사였다. 허씨가의 리더로서 구본무 회장과 쌍두마차를 이루게 한 것이다.

    더욱이 이번에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그의 위상은 한층 더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그룹내에서 구본무 회장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으며 구회장과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동관 30층을 나눠쓰고 있다.

    정수씨가 경영하는 LG기공은 1999년 허씨 일가가 인수, LG그룹에서 계열분리됐다. 그래서 ‘LG’라는 회사명은 쓰고 있으나 엠블럼은 LG그룹과 다르다. 금성통신공사의 후신으로, 정보통신 및 전기-전력 공사, 환경사업을 벌이고 있다.

    허신구 창업고문의 장남 경수(京秀·45)씨는 LG전자 미국 법인과 도쿄 사무소 등에서 근무하다 독립, 창업했다. PVC, 가스배관, 온돌 파이프 등을 생산하는 코스모산업을 모기업으로, 코스모양행, 코스모소재, 코스모레저, 드림스포즈 등을 계열사로 경영하고 있다. 2000년 자본금 45억원으로 설립된 스포츠·레저 전문 쇼핑몰 드림스포즈에는 삼촌의 회사인 (주)승산도 출자했다.

    그의 동생인 연수(秊秀·41)씨는 1987년 LG에 입사, LG상사 미국 새너제이 지사와 싱가포르 법인 등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40세의 나이에 상무(싱가포르법인장)로 전격 발탁됐다.

    현직 임직원인 허씨 집안의 직계 자손들에다 계열사 지분을 가진 특수관계인까지 포함하면 LG에는 200여 명의 허씨가 사람들이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여느 기업의 주주명부는 대개 한 장을 넘지 않지만, LG 계열사의 주주명부는 서너 장씩 된다고 할 정도다.

    이는 허씨 일가에 자손이 번성했을 뿐 아니라 구인회 창업회장이 친인척들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LG가 성장하던 시기엔 구직난이 심했다. 그래서 구씨와 허씨 집안의 친인척은 물론, 얼굴만 겨우 알고 지내던 고향 사람들까지 취직을 부탁해왔다. 하지만 연암은 한번도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고 그때마다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너 아무개 집 자손 아니가. 열심히 기술 배우고 일 잘해야 된데이. 그래, 내일부터 나와 보거라….”

    그러다 보니 부작용도 나타났다. 무엇보다 ‘조타수’가 여럿인 탓에 계열사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경우가 잦았다. 친인척 특수관계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 그룹의 모토가 ‘인화(人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의견을 모으느라 앞뒤를 너무 재다 보니 LG의 기업문화에는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정신과 패기, 개척의지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듣곤 했다. 일반 주주들의 이해관계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한 채 친인척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계열사 합병과 분리를 거듭한다든가, 시장(市場)의 상식에 반하는 주식 자전거래로 투자자들의 실망과 분노를 자초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성바지들 간에 그렇듯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는데도 지금껏 LG에서 심각한 정도의 불협화음이 들려온 적은 없다. LG의 한 임원은 이를 빗대 “부작용은 있었지만 스캔들은 없었다”고 했다. 혹자는 “국제 경영학계의 연구대상”이라고까지 한다.

    그 배경에는 ‘역할분담의 미학’이 있다. 구씨 집안은 대개 사업확장, 공장건설 등 굵직굵직한 바깥일을 챙긴 반면, 허씨 집안은 재무, 영업, 판매 등 꼼꼼한 손길을 요하는 안살림에 주력했다. 사업을 키우며 경영을 주도한 것은 구씨네였지만, 기업이라는 생명체에 피를 돌게 한 것은 허씨네였던 것이다.

    허준구 전 명예회장이 그랬듯, 허씨 집안 사람들은 유달리 숫자에 밝고 성격이 치밀했다. 살림꾼으로선 더할 나위없이 적격이었기에 구씨 집안의 신뢰도 두터웠다.

    이런 성향은 근검절약이 몸에 밴 허씨네의 가풍에서 기인한 듯하다. 허씨네는 그 어렵던 시절에도 고방에 쇠고기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손님들을 접대할 만큼 부자였지만, 손님이 먹다 남긴 고기는 뼈만 남을 때까지 며칠이고 식구들의 밥상에 오를 만큼 알뜰했다. 경제교육도 철저했다. 허완구 회장의 회고.

    “서울로 유학간 정구형님과 학구형님이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올 때쯤이면 며칠 전부터 쇠고기 곰탕을 끓여내느라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면 고깃국 냄새도 맡기 전에 선친께서 두 형님을 사랑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지난 학기에 보내준 학비의 용처를 하나하나 정산했다. 1원이라도 계산이 맞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서울에서 승산마을까지 오는 데 20시간씩 걸리던 시절이었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가뜩이나 피곤한 두 사람이 ‘정산 고문’을 마치고 방을 나올 때쯤이면 지칠 대로 지쳐 곰탕엔 손이 가지도 않았다.”

    구씨네가 주(主)를, 허씨네가 보(補)를 맡는 불문율은 대를 이어 엄수됐다. 일찍이 허만정씨가 당부한대로 허씨가의 경영인들은 ‘2인자’ ‘내조자’ ‘조언자’의 위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허준구 전 명예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은 50년을 한 직장에서 부대낀, 둘도 없는 동지요 친구였다. 틈만 나면 허물없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회사에서 허회장은 구회장에게 더없이 깍듯했다. 나이는 허회장이 두 살 위고 LG에 몸담은 것도 4년 먼저였지만, 한 발짝도 구회장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LG전선 권문구 부회장은 “사진기자들이 갑작스레 카메라를 들이대기라도 하면 허회장은 구회장을 돋보이게 하려고 본능적으로 슬쩍슬쩍 뒷걸음질을 쳤다”고 한다.

    구본무 회장에 대한 허창수 회장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허회장도 아버지처럼 앞에 나서지 않고 뒷전에서 실무를 챙기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허회장은 구회장이 참석하는 그룹 행사나 국·내외 산업현장 시찰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구회장을 돋보이게 한다.

    어른들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켜왔더라도 후손들이 늘어나면 그런 집안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나올 법도 하다. “내가 어딜 봐서 구씨네 아무개보다 못하냐”는 유의. 이따금 그런 불만이 터져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증폭된 적은 없다. 허씨가는 구씨가 못지않게 보수적인 유교 집안이다. 위계질서가 엄격해 손위 사람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한다. 젊은 축들이 이런 저런 불만을 털어놓다가도 어른이 소리 한번 지르면 끽소리 못하고 복종한다는 것. 제 아무리 외국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똑똑이라도 독불장군은 살아남지 못하는 분위기다.

    자손이 많다 보니 연상의 조카, 연하의 삼촌이 허다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조카가 자신을 ‘자네’라고 부르는 젊은 숙부님에게 깍듯이 머리를 조아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살아 있기에 허준구 전 명예회장이 많은 동생과 조카들을 일사불란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씨네가 55년간 안분지족의 도(道)를 지켜온 것은 지금껏 구씨네가 허씨네를 예우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던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창업 초기부터 두 집안 원로들은 매년 주주총회를 열기 전에 모여 가족 중 20세가 된 성인에게 새로 주식을 배분하고, 상호 간의 주식 보유 비율을 가족회의에서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한다. 만장일치로 정해야 뒷날 불화가 생길 염려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때 정해진 비율이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연암은 사업을 확장하느라 이익금을 죄다 시설투자에 쏟아부을 때도 고리의 사채까지 끌어와 허씨네에게 배당금을 줬다고 한다.

    또한 연암 시절부터 중요한 의사결정은 두 집안 원로들이 함께 참여하는 운영위원회에서 이뤄졌으며, 지금도 그룹내 최고 의사결정 과정에는 구씨가와 허씨가 인사들이 동수로 참여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