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불붙은 金의 전쟁

금괴 사재기, 골드뱅킹, 금 카드깡…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ns@donga.com

    입력2003-06-24 19: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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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붙은 金의 전쟁
    수백 개의 금은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울 종로구 봉익동의 한 귀금속상. 금을 사고 싶다는 고객이 전화를 걸어와 대뜸 이렇게 묻는다.

    “금이 ‘키로’에 얼마요?”

    금 1kg?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금이라면 그저 한 돈, 두 돈, 기껏해야 한 냥, 두 냥이지, 무슨 횟감도 아니고 금 1kg에 얼마냐니.

    흔히 보는 한 돈(1돈쭝)짜리 아기 돌반지의 무게는 3.75g이다. 6월11일 현재 24K 순금(순도 99.99% 이상) 1돈쭝 도매시세는 5만5000원 안팎. 여기에 부가가치세 10%를 붙이면 소매가는 6만500원이 된다. 금 1kg이면 약 267돈이니, 도매가는 1468만원, 소매가는 무려 1615만원에 이른다.

    더 놀라운 것은 종업원의 반응이다. 그 비싼 금을 kg 단위로 사겠다며 값을 물어왔는데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받는다.



    “도매가로 키로에 1470(만원) 나오구요, 현금이면 1400(만원) 안짝에 사실 수 있어요.”

    종업원에 따르면 지난해 연말 무렵부터 이런 문의전화가 자주 온다고 한다. 대부분은 시세만 물어보고 말지만, 요즘 이곳 종로 일대 금은방에선 어둑어둑한 저녁 나절에 빳빳한 현찰을 다발로 싸들고 와서 골드바(gold bar) 같은 금괴류를 사가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고 한다.

    종로4가의 한 귀금속상 직원은 “올 초부터 수천만원에서 억대의 금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불쑥불쑥 찾아오곤 해서 1000∼2000돈쭝 정도의 물량은 늘 준비해놓고 있다”고 전했다.

    골드바는 최하 3돈쭝짜리부터 거래되기 때문에 소액 투자자들도 많이 사간다. 금돼지, 금송아지, 행운의 열쇠 등도 인기 품목이다. 불황 탓인지 예물용 장신구 등 금 가공제품을 주문하는 고객은 전보다 줄었지만, 투자 목적의 골드바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

    외환위기 이후 최고 시세

    올 들어 국내 금 시세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가를 잇달아 경신했다. 지난해 12월초 1돈쭝당 5만원에 턱걸이했던 금 도매시세는 두 달 만인 지난 2월초 5만7000원까지 치솟았다. 이라크전 이후 한때 주춤거리는 듯했으나 최근 들어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국제 금 시세도 연일 ‘금값’을 톡톡히 했다. 2월초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는 금 선물(先物) 가격이 1온스(31.1035g)당 380달러까지 올라 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라크전이 시작되면서 기세가 꺾였지만 곧 회복됐다. 5월19일에는 6월 만기물이 전일 대비 2.7% 급등한 1온스당 364.40달러로 장을 마쳐 지난해 8월 이후 하루 상승폭으로는 최고기록을 세웠고, 이틀 후에는 370달러선을 돌파했다.

    금 시장은 수요가 주도하는 시장(demand-driven market)이다. 금값이 공급보다는 수요에 의해 훨씬 더 크게 변동한다는 뜻이다. 채광 등으로 시장에 신규 공급되는 금의 양이 연간 전체 공급량의 2%에 불과하다 보니(나머지는 각국 중앙은행 보유 금이나 퇴장[退藏] 금 중에서 시장에 나온 것) 금값 변화는 사실상 불변에 가까운 공급보다 수요에 훨씬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불붙은 金의 전쟁

    2001년 이후 국제 금 시세 추이

    최근 들어 금값이 요동치고 있는 것도 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등 금을 소재로 하는 산업용이나 치과(齒科)용, 금 장신구 업자들의 가공용 수요처럼 투자목적과 무관한 부문을 예외로 하면 사람들이 금을 사들이는 이유는 다음의 몇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첫째, 정정(政情)이 불안하거나 전운이 감도는 ‘정치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금은 가장 안정적인 투자수단으로 꼽힌다. 이런 경우 투자자들은 돈을 벌겠다기보다는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금을 산다. 구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사태, 레이건 미 대통령 피격사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사태 등 국제적 긴장이 고조된 시기에 금값은 수요 증가로 폭등했다.

    둘째, 금리, 환율, 주가 등이 투자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금은 리스크 헤징을 위한 투자 포트폴리오 수단으로 활용된다. 금리 하락기에는 금융상품에 투자하기보다 금을 사서 들고 있는 편이 기회비용 면에서 더 유리하다. 증권시장이 침체하면 기관투자가들은 주식 투자 비중을 낮추는 대신 금 투자 비중을 높여 주가의 추가 하락에 대비한다.

    또한 금값은 미국 달러화 가치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가 약세일 때는 일반적으로 유로화나 엔화 가치가 상승하므로, 유럽 국가와 일본 등지에서는 가치가 상승한 자국 통화로 금을 매입하고 달러 보유 자산을 매각한다.

    셋째, 금은 특히 일부 부유층에게 ‘사회적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은 보유 및 이동 상황이 사실상 ‘공개’되어 있다. 수사기관이나 세무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재산을 금으로 바꿔놓는 순간 사정은 달라진다. 통화(通貨)에 가까운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소비재와 다를 게 없는 게 금의 속성. 때문에 금은 상속·증여세를 회피하거나 ‘검은 돈’을 세탁할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연말께부터 금 수요 급증을 촉발시킬 만한 요인들이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

    ‘복합 요인’이 촉발한 금 러시

    우선 북핵 문제와 이라크전쟁 가능성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국제적 긴장을 야기했다. 한 금은방 주인은 “금괴를 사는 사람은 대부분 50∼70대다. 이들은 전쟁을 체험했거나 전후의 신산한 삶을 몸으로 부대껴본 세대라 험난한 시기에 금이 얼마나 유용한지 잘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국제 금 시세는 2000년부터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려왔는데, 올 초 이라크전쟁이 초읽기로 접어들자 급등세를 보였다.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진 데 대한 일반인들의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지만, 다국적 헤지펀드나 국내 ‘큰손’들이 실제 이상으로 위기의식을 부풀려 금값 상승을 부채질한 측면도 있다. 세계대전도 아닌 데다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 확실시됐던 이라크전 때문에 금값이 그 정도로 요동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전쟁 발발 직전까지 숨가쁘게 오르던 금값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급락, 단기 차익을 노린 세력들의 ‘장난’ 흔적을 감지하게 했다.

    초(超) 저금리와 증시 침체, 미국 달러 약세 등 경제 부문의 변수들도 치솟는 금값을 방치했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예금 금리가 사실상 마이너스로 돌아선 지 오래인 데다 증시는 2년이 넘도록 ‘바닥 다지기’만 해왔고, 주식보다 안전하다는 회사채도 장기 불황 조짐에 선뜻 손이 가지 않으니 물경 300조원 규모라는 부동자금의 일부가 금을 찾아 떠난 것은 당연하다.

    미국 달러는 가뜩이나 약세가 지속돼온 마당에 얼마 전 존 스노 미국 재무장관이 달러 가치의 추가 하락을 용인하겠다고 언급해 앞으로도 금값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펀드 대부’ 조지 소로스는 이같은 정책을 비난하며 “최근 들어 미국 달러화를 팔기 시작했으며, 대신 유로화와 금을 사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선 새 정권 출범 초기에 금 수요가 늘어 금값이 오르는 경향이 있다. 새 정부는 대개 부패 청산, 민생 안정, 공평 과세 같은 기치를 내걸고 대대적인 개혁 바람을 일으키면서 부동산 투기 근절, 상속·증여세 회피 추적, 공직자 및 주변인물 재산 공개 등에 강한 의지를 보인다. 노무현 정부도 예외가 아닌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재산’인 금의 매력이 커지게 마련이다.

    이런 이유들로 금값이 큰 폭으로 올랐음에도 금 수요가 여전히 늘고 있는 것은 왜일까.

    금은 ‘가격이 상승하면 수요는 감소한다’는 경제학의 기본 상식을 종종 뛰어넘는다. 금값이 오르면 산업 부문의 금 수요는 감소하지만, 투자 수요는 오히려 증가한다. 이는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금값 상승 국면에서 조금 늦게 시장에 편승하는 데다, 수익이 나면 지나치게 오래 보유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 주식시장에서 ‘개미군단’들이 보여주는 행태와 흡사하다. 투자자들은 금값 상승을 인플레이션의 전조로 여겨 값이 오를수록 더 많은 금을 매입하고, 이것이 다시 금값 상승을 부추기는 사이클을 조성한다.

    금값에 대한 금 구매량의 탄력도는 -0.8이라고 한다. 금값이 1% 오르면 금 구매량은 0.8%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소득에 대한 금 구매량의 탄력도는 +2.0이다. 소득이 1% 늘면 금 구매량은 2% 증가한다는 것. 즉 금 구매량은 금값보다 소득에 더 민감해서, 소득이 늘면 금값이 올라도 적극적으로 금을 사들인다는 얘기다. 금에 투자할 만큼 ‘잉여 소득’이 있는 계층이라면 금값이 웬만큼 올라도 투자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환금성 노린 ‘금 카드깡’ 성행

    그렇다고 금 투자가 ‘큰손’들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금은 환금성이 뛰어나다. 금괴로 갖고 있든 장신구로 갖고 있든 필요하면 언제라도 편리하게 현금화할 수 있기에 일반인들도 큰 부담 없이 투자를 고려해볼 수 있다.

    금값이 내렸을 때 사서 올랐을 때 팔면 더없이 좋겠지만, 금값에 변동이 없더라도 금은방에 미미한 마진만 떼주면 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 금은방 마진이래봐야 1돈쭝당 1000원 미만인데, 이는 환율 변동이 없는 상태에서 달러를 사고 팔 때 은행에 무는 수수료 부담보다 낮은 수준이다.

    금괴, 즉 지금(地金)은 언제든 원하는 만큼만 나눠 팔 수도 있으므로 예금통장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1kg짜리 골드바를 가진 사람이 200g만 팔고 싶다면 정확하게 200g만 잘라 팔고 나머지는 800g짜리 골드바로 만들어 손실 없이 보유할 수 있다.

    하지만 장신구로 주로 쓰이는 18K나 14K 금은 환금성과 투자 가치가 낮다. 가령 18K는 금의 순도가 75%지만, 소비자가 제품을 살 때는 이보다 7.5%포인트 높은 순도 82.5%의 금값을 치른다. 24K 순금은 재질이 물러 가공을 해도 순도에 축이 나지 않는 데 비해 합금인 18K는 불질, 줄질, 땜질, 광내기 등의 가공 과정에서 순도의 10% 가량이 파손, 마모되기 때문. 따라서 금 한 냥짜리 장신구를 만들려면 한 냥 한 푼의 금이 필요하다.

    합금 제품은 팔 때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업자가 이를 녹여 금을 정련하면서 또 순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살 때는 10%를 더 주고, 팔 때는 10%를 덜 받게 되니 ‘패션용’이라면 몰라도 순수한 투자 목적으로는 적합치 않다.

    금의 탁월한 환금성은 ‘금 카드깡’이라는 신종 카드할인 기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현금이 달리는데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는 어려운 처지라고 하자. 이 경우 A 금은방에서 신용카드로 금을 산다. 1돈쭝 도매시세가 5만5000원이라면 부가세 10%를 붙여 6만500원을 신용카드로 18개월 할부 결제한다(금을 신용카드로 살 경우 거래 자료가 노출되므로 도매시세로 살 수 없다). 이렇게 산 금을 B 금은방에서 도매시세보다 조금 낮은 5만4000원 정도에 팔아 현금화한다. 결국 1돈쭝에 6500원을 손해 보고 판 셈인데, 이 차액은 이자로 친다. 이 정도 이자와 신용카드 할부 수수료를 부담한다 해도 연리 200∼300%에 달하는 사채 이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를 노려 신용카드 소유자와 금은방을 이어주는 브로커도 생겨났다. 전당포 업자 등이 신용카드로 금괴를 사온 사람에게 선이자를 떼고 금값을 지불한 뒤 이 금을 다른 금은방에 팔아넘겨 정상적인 거래로 위장하는 방식이다.

    ‘무자료 금’ 천국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유통되는 모든 지금에 대해 10%의 부가가치세를 부과한다. 공식적으로 유통되는 금은 일부 제련업체가 생산하는 소량의 금 외에는 거의 다 해외에서 수입된 물량이다. 가령 해외에서 정식으로 수입된 금의 가격이 100원이라면 여기에 3%의 관세와 10%의 부가가치세가 붙어 국내 판매가는 유통마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최하 113원이 된다(세공업자 등이 지금을 사서 장신구 등으로 가공해 수출할 경우에는 미리 낸 부가세를 환급해준다).

    하지만 카드깡을 하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시중에서 113원 이상을 주고 금을 사는 사람은 없다. 현금을 주면 누구라도 110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시장 유통가격이 수입 도매가격보다 오히려 낮은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금 1돈쭝 도매시세가 5만4000원이라면 금은방에선 부가세 10%와 소매 마진을 붙여 6만2000원은 받아야 이론적으로 수지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종로 일대의 금은방에선 일반 소비자도 현금을 주면 도매가인 5만4000원에 살 수 있다.

    금은방 간에 경쟁이 심해 금 자체는 원가에 파는 대신 행운의 열쇠 같은 예물 가공료에서 마진을 챙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 유통되는 금의 절반 이상이 부가세와 관세가 붙지 않은 ‘무자료 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밀수 금, 수출용 세공원료 명목으로 들여온 뒤 허위로 수출 신고를 해 부가세를 환급받고 빼돌린 금, 영세 업자들이 고금(古金)과 잡금(雜金)을 수집해 정련한 금 등이 그것. 업자들은 “무자료 금을 취급하지 않으면 가격에서 경쟁이 안 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영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한다.

    정상 수입된 금을 5만3000원에 사서 5만4000원에 파는 것이나 밀수 금을 5만원에 사서 5만1000원에 파는 것이나 마진은 똑같이 1000원이지만, 금 판매업자들은 세원(稅源)이 노출되지 않는 후자를 더 선호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일반 소비자에겐 세금계산서를 끊어주지 않으니 자료를 남기지 않고 이런 금을 팔 수 있다.

    원자재나 화폐의 성격에 가까운 지금에 아무런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은 수입단계에서부터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나라는 일부 개발도상국밖에 없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관세도 부과하지 않는다.

    한국이 ‘금 밀수 천국’이라는 오명을 덮어쓴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해외에서 100원에 살 수 있는 금을 밀수해 유통시키면 범죄 행위에 수반되는 각종 리스크 비용을 감안하더라도 108원에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113원과 108원. 아무리 단속을 강화해도 여전히 금 밀수가 성행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 ‘5원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요즘처럼 금 수요가 증가하면 밀수도 덩달아 늘게 마련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금괴 밀수 규모는 39건, 1561억원에 달해 2001년보다 40배 이상 급증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금 밀수는 사전에 확실한 정보를 얻지 못하면 좀체 적발해내기 어렵다. 금은 가치에 비해 부피가 작을 뿐 아니라 자유자재로 변형시켜도 성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밀수 품목으로 적격이다. 철제 구조물이 많은 선박에는 금괴를 숨길 곳도 많다. 기둥 안이나 선창(船倉) 밑바닥, 연료탱크 등에 금괴를 숨기고 외부를 용접하면 감쪽같다. 심지어는 금괴를 녹여 선체의 일부로 위장하거나 금을 잘게 부순 뒤 진흙에 섞어 들여오기도 한다.

    ‘태풍의 눈’, 부가세 면세

    국내 금 시장은 오는 7월1일을 기점으로 또 한번 요동칠 전망이다. 금 가공·판매업자들의 숙원이던 지금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세조치가 이날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국회는 금을 이용한 선진적인 금융거래제도 도입과 금 세공원료 거래 양성화를 위해 금융상품용, 세공원료용, 선물거래용 지금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면세해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일단 2003년 7월1일부터 2005년 6월30일까지 2년 동안만 운영해보기로 한 한시법이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다.

    경기대 유동일 겸임교수(보석마케팅)는 “부가세 면세조치로 113원에 거래되던 정상 금이 103원에 공급되면 108원짜리 밀수 금이 발붙일 여지는 좁아진다”며 “따라서 밀수는 줄어들고 세수(稅收)는 증가해 금 시장의 질서가 바로잡혀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지만 시중에 워낙 많은 양의 무자료 금이 풀려 있는 데다, 금 가공품이든 금괴든 소비자에게 판매될 때는 현행대로 부가세가 과세되므로 금 밀수가 당장 근절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들에겐 밀수 금의 가격경쟁력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더욱이 재산을 은닉하거나 상속·증여세 회피 수단 등으로 금을 매입하려는 수요가 존재하는 한 이들에게 무자료 금을 공급하면서 스스로도 탈세의 단맛을 즐기는 업자와의 ‘공생관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부가세 면세조치가 금융상품용 지금에도 적용됨에 따라 은행권에서는 이를 계기로 골드뱅킹이 활성화할 것을 기대하면서 상품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 은행들은 1989년을 전후해서도 ‘골드뱅킹’이란 이름을 내걸고 영업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종합상사들이 수입한 금괴나 금화를 은행들이 단순히 판매 대행해주고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본격적인 ‘골드뱅킹’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은행들은 정상 금만 취급했기에 시중에서 유통되는 금보다 높은 가격에 금을 팔았는 데도 일부 부유층을 중심으로 꽤 인기를 모았다. 은행들이 누구에게 금을 팔았는지 자료를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은행의 공신력이 금의 순도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이 상품의 인기는 이내 시들해졌다.

    올 하반기부터 시중은행들이 선보일 골드뱅킹 상품은 금 적립계좌(Gold Account), 금 증서(Gold Certificate), 금 대출(Gold Loan) 등이 주종을 이룰 전망이다.

    ‘금 통장’ 격인 금 적립계좌는 고객이 매달 일정 금액을 적립하면 은행이 매일 금을 사주는 것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금을 사기 때문에 연중 평균 시세에 안정적으로 금을 매입하는 효과가 있다. 금 증서는 은행이 일정량의 금을 담보로 지급증서를 발행, CD(양도성 예금증서)처럼 매매될 수 있게 한 상품. 금 대출은 은행이 해외에서 금을 빌려와 대여한 후 만기일에 금이나 현금으로 상환받는 것인데, 반도체 컴퓨터 휴대전화 등 금을 원자재로 쓰는 제조업체나 금 세공업자 등이 주고객이다. 업체가 현금을 대출받아 직접 금을 수입하는 것보다 금융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점이 있다.

    신한은행 상품개발실 강영진 과장은 “개인 투자자라면 금 적립상품에 기대를 걸 만하다”고 말한다.

    “소액으로 적금 붓듯이 금을 사뒀다가 자녀의 혼사 등 필요할 때 언제라도 찾아 쓸 수 있는 게 금 적립상품의 장점이다. 현금 적금은 금리가 빤하지만, 금 적립상품의 경우 금값이 오르면 그만큼 투자수익이 나고, 금값이 떨어지면 더 많은 금을 사 모을 수 있어 주가 하락기에 ‘물타기’를 하듯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골드뱅킹의 고민

    그러나 골드뱅킹이 단기간에 다수 고객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금융상품용 지금에 대한 부가세 면세조치가 골드뱅킹 고객과는 사실상 무관하다. 금융상품을 통해 금을 살 때는 부가세가 면세되지만, 적립된 금을 고객이 현금이나 현물로 인출하는 단계에서는 부가세가 붙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EU 국가 등은 지금을 화폐로 간주해 부가가치세를 완전 면세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부유층의 세금 탈루 등을 막기 위해 금이 개인에게 넘어갈 때는 면세 혜택을 주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고객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금 시세 차익뿐이다. 금리보다 금 시세의 변동폭이 클 것으로 예상되면 골드뱅킹 상품은 어떤 예·적금 상품보다 인기가 높겠지만, 긴 사이클에서 보면 금값은 그리 큰 폭으로 움직이지 않기에 이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골드뱅킹 상품은 일반 예·적금 상품과는 달리 당분간은 이자를 지급하기 어렵다. 예컨대 금 적립상품 고객에게 연 4%의 이자를 주려면 은행이 적립된 금을 대출, 헤징, 금 연계 펀드 등 어떤 식이로든 운용해서 6% 정도의 수익을 내야 한다. 하지만 아직 골드뱅킹이 정착되지 않은 국내 금융권에서는 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곳이 마땅치 않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국내외 다수 금융기관들이 국경과 시차를 뛰어넘어 대여, 선물, 옵션, 스왑 등 다양한 형태의 금 파생상품 거래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

    콜, 외환, 채권 등의 중개 업무를 수행해온 한국자금중개가 골드팀을 신설, 7월부터 면세금 중개 업무를 시작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92개 금융기관이 주주로 참여한 한국자금중개는 금 도매업자나 세공업자, 금융기관 등의 면세금 국내 거래, 수입, 투기 목적의 현물 또는 파생상품 거래를 중개하게 된다. 최소 거래 단위는 1kg.

    한국자금중개 이우진 골드팀장은 “매입·매도 호가 제공 시스템을 통해 가격과 거래량이 투명하게 결정되고 다수의 투자자가 참여할 수 있는 시장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금 도·소매업체는 1만5000개를 헤아리지만 금을 수입, 공급하는 종합상사는 손에 꼽는다. 이 때문에 금을 사려는 도·소매업체는 상사와 ‘안면’을 터야 했고, 금 공급의 특정 업체 편중, 가격담합 등의 폐단을 빚었다. 상사와 직거래하던 업체들이 부가세를 포탈하고 행방을 감추기도 했다. 이에 비해 자금중개를 통하면 거래가 이뤄진 뒤에야 누가 누구와 거래했는지 알게 되어 불공정거래 시비도 없어지고, 거래자가 공개되므로 세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앞으로는 종합상사는 물론, 금 관련 제조, 수출, 도·소매 업체도 자금 여유만 있으면 금을 면세로 직접 수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귀금속 중간도매상 A씨는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금을 좋은 조건에 팔겠다고 제의해와 검토 중이다”고 털어놨다.

    “그쪽 옛 왕실 후손이 국제 시세에서 5%를 깎아주겠다며 금을 비밀리에 급히 처분해달라고 했다. 항공료, 보험료, 보안업체 수송비용 등을 제외해도 3% 정도 싸게 사는 셈이 된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제련한 금이라 순도가 99.95% 수준이라는 게 좀 켕기지만, 국내에선 99.95% 이상이면 순금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유통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다.”

    낙관론 vs 비관론

    투자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금값이 앞으로도 상승세를 지속할 것인가, 금이 투자 수단으로 바람직한가의 여부다. 이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먼저 비관론. 우선 이라크전쟁이 막을 내리고 북핵 문제도 협상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등 대외 불안요소가 진정되고 있어 금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환 보유고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금으로 갖고 있는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금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을 줄이기 위해 급작스런 시세 폭락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꾸준히 금을 매각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새 금광을 발굴하고 채광 작업에 첨단 기술을 도입해온 금 생산업자들의 노력이 금 생산원가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금값 상승을 제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서울귀금속협동조합 국이중 이사장은 “금 제품 주 소비층이 점차 젊은 층으로 내려오는 추세인데, 이들은 제품의 미적 가치를 우선시하지, 환금성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양한 디자인으로 가공하기 쉬운 18K, 14K 소비는 증가하는 반면 순금 수요는 장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금이 투자 대상으로는 마땅치 않다는 얘기다.

    다음은 낙관론. 우선 북핵 문제의 향방이 여전히 오리무중이라 지정학적 리스크가 줄지 않았다는 점이 ‘금값 이상 무’ 전망의 근거로 제시된다.

    지금의 저금리·저달러 추세가 좀체 반전될 것 같지 않다는 경제적 고려도 있다. 한국자금중개 이우진 팀장은 “최근 3년간 금과 연계된 주식·채권 펀드의 연평균 수익률이 18%에 달했다”며 “금은 화폐 가치보다 훨씬 안정적인 투자수단”이라고 했다.

    금을 소재로 사용하는 첨단산업이 발달하고 이런 산업이 개도국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산업용 금 수요가 증가일로에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또한 낙관론자들은 18K, 14K 제품의 소비 증가세가 오히려 순금 수요를 늘릴 것으로 예상한다.

    “순금은 돈이 필요하면 되팔기 때문에 시장에서 돌고 돈다. 이에 비해 18K, 14K는 순도가 낮아 제값 받고 되팔기가 어려워 한번 팔려나가면 웬만해선 시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18K, 14K 제품은 24K보다 저렴하고 디자인이 다양해서 더 많이 팔린다. 따라서 ‘많이 팔리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 18K, 14K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순금이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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