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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구 톱 브랜드 파카 120년

전쟁과 평화의 목격자, 웃음과 감동의 마법사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필기구 톱 브랜드 파카 1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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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르망디의 영웅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독일군 항복문서에 파카 만년필로 서명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 일본군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 쓴 것도 파카. 소설 ‘셜록 홈스’나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도 파카로 쓰여졌다. 파카는 영국인의 자부심이다.
필기구 톱 브랜드 파카 120년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처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익혔을 이 영어 속담에서 학생들은 ‘pen’이라는 단수 보통명사는 정관사 ‘the’를 만나 추상명사가 된다고 배웠다. 그러니 ‘pen’을 ‘문(文)’ 또는 ‘지식’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펜’으로, ‘sword’를 ‘무(武)’나 ‘무력(武力)’ 이 아니라 ‘칼’로 번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문기본영어’ 같은 중고생 필독 교재의 ‘제1장 명사편’도 안 본 학생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속담이 문자 그대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곳이 딱 한군데 있다. 고급 만년필 등 필기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파카(PARKER)가 그곳이다. 현재 파카를 생산 판매 유통하는 회사는 유럽에 본사를 둔 샌포드(SANFORD)그룹이다. 파카는 샌포드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필기구 중의 하나.

영국 남동부 뉴헤이번(Newhaven)에 있는 ‘파카 펜 샌포드 유럽’ 본사 건물에 들어서면 지난 1987년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러시아 대통령이 냉전체제 종식으로 가는 상징적 조치였던 중거리핵전력협정에 서명한 후 펜을 교환하는 사진이 실린 ‘뉴스위크’가 전시되어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과 함께. 물론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손에 각각 들려 있는 펜은 명품 필기구의 상징인 파카 만년필. 세계사적 사건인 군비감축협정서에 서명하는 데 두 정상이 파카 만년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문자 그대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해석도 전혀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필기구 톱 브랜드 파카 120년

‘파카’를 생산하는 샌포드유럽 본사의 출입문. 파카를 상징하는 화살표 손잡이가 보인다.

파카 공장이 위치한 뉴헤이번은 영국 남부의 대표적인 해안도시이다. 여기서 배를 타면 프랑스 북부의 디에프까지 불과 2시간. 거리상으로도 100km가 채 되지 않는다.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연락선이 다닐 정도로 뉴헤이번은 관광지로도 널리 알려진 도시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검은 연기 솟고 기계 소리 요란한 공단 지대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담하고 조용한 공장

이곳에 위치한 파카도 공장 규모로만 따지면 그리 큰 축에 들지 못한다. 런던 히드로공항에서 기자를 태운 운전기사는 고속도로로 1시간 반 가량 남쪽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동안 기자는 내내 파카의 120년 전통을 상징하는 ‘화살 클립’이나 미끈한 머릿돌이 버티고 선 그럴듯한 본사 건물을 상상했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어느 시골마을 군부대 면회실 같은 허름한 건물 앞에 기자를 내려놓곤 “안내 데스크에 가서 면회를 신청하면 된다”는 한마디만 던지고 차를 돌려 떠나버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한 시간이면 거뜬히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공장이며 소박한 분위기의 사무실이 파카의 화려한 명품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였다. 글로벌 톱 브랜드를 생산해내는 심장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검소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기는 ‘철판 잘라서 볼펜 뚜껑 만드는’ 일이 엄청난 설비나 공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120년을 이어온 명품 브랜드라고 해서 공장 또한 ‘명품’일 필요도 없다.

게다가 영국사람의 기질이 드러내고 과시하면서 바꾸기보다는 옛것을 소중히 지켜가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뉴헤이번의 파카 공장은 1941년 이곳으로 옮겨온 뒤로 60년 넘게 별다른 변화 없이 한 자리를 지켜왔다.

기자를 안내한 프로그램 매니저 데이브 루더만(Dave Ruderman)은 올해로 파카에 29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고답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변화’와는 거리가 먼 영국사람의 기질이 파카의 120년 전통을 이어온 밑거름이 된 셈이다.

뉴헤이번의 파카 공장에선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다. 철판을 자르거나 스프링을 만들거나 잉크 카트리지를 만들고 조립하는 일련의 공정에서 사람이 하는 일이라곤 이따금씩 기계가 이상 없이 돌아가는지 점검하는 일뿐이다. 라인 내부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제품의 이상 여부를 점검하고 하나하나 상자에 담는 마지막 공정이다.

이곳에선 50, 60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공들이 제작과 사용 테스트를 거친 만년필과 볼펜을 하나하나 육안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이상 여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 검사단계를 거치면 상자에 담아내는 일만 남게 된다.

모든 공정이 자동화된 마당에 마지막 점검 작업을 굳이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기자가 잠깐 만져보았던 펜 한 자루도 그대로 상자에 담지 않고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지문을 정성스레 닦은 뒤 다시 포장했다. 이렇게 ‘지루하고도 반복적인’ 작업을 계속하는, 어찌 보면 자동화 공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생산라인의 몇 배나 되는 시간을 들여가며 느릿느릿 일하는 이들이 파카의 명품 이미지를 지켜나가는 숨은 공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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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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