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웨이팅 리스트

  • 김민경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7-01-05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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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팅 리스트
    새해, 새달, 새로운 아침엔 뭔가 새로운 것을 기다리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진 않을까,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이렇게 해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진 않을까 등등. 새로운 것을 기다리는 일에는 언제나 약간의 초조함과 설렘, 낭만적 환상이 있다. 쇼퍼홀릭에게 새로운 판타지의 절정은 ‘웨이팅 리스트(대기자 명단)’가 될 것이다. 대학 합격자 명단에도, 패밀리 레스토랑에도 웨이팅 리스트가 있지만 쇼퍼홀릭에게 웨이팅 리스트란 ‘목표’에 이르는 중간 과정이 아니라 ‘목표’ 그 자체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일상에 한바탕 폭죽 같은 것이며,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킹카(또는 퀸카)를 차지하기 직전의 쾌감이고, 회사에서 졸다가 유럽 출장을 통보받았을 때의 흥분 같은 것이다.

    웨이팅 리스트는 1년에 두 번, 4대 도시에서 패션쇼가 열리고 전세계 패션전문가들과 트렌드세터들에 의해 ‘머스트해브’ 아이템들이 지명되면 전세계 쇼퍼홀릭들이 그 앞에 헤쳐 모여 줄을 서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원래 웨이팅 리스트란 ‘현재는 재고가 없지만 재입고 때 물건을 구입할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쇼퍼홀릭의 소유욕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를 들이대는 명품 브랜드의 공공연한 비밀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결국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을 구입하려는 이번 시즌 ‘트렌드세터’의 명단이다. 여기에 이름을 올리려면 한여름에 케이블TV나 패션지를 통해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지명된 겨울 부츠를 보고 재빨리 매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런데 전세계 쇼핑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머스트해브’ 아이템에 대한 경쟁이 나날이 치열해지고 있다. 전엔 쇼퍼홀릭들도 나라마다 취향이 달랐는데, 지금은 전세계가 하나의 유행으로 수렴된다. 올 겨울 전세계 대도시 어디에서나 레깅스와 호피 무늬와 샤넬의 커다란 코코카바스 백을 든 여자들이 활보한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물건은 보지도 않고 돈부터 내야 이름을 올려주는 경우가 늘고 있다(다행히 환불은 해준다). 마네킹 같은 모델이 완벽한 메이크업을 하고, 런웨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한 순간에 충동구매를 결정짓는 웨이팅 리스트는 한국의 아파트 선분양제에서 힌트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올 가을/겨울 시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머스트해브’ 아이템들은 현금을 준대도 웨이팅 리스트 접수를 거부하고 있다. 웨이팅 리스트가 전세계적으로 너무 길기 때문이란다. 이름을 올리는 데 중요한 것은 물론 ‘돈’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머스트해브’ 아이템을 알아보는 안목이다. 시즌마다 수백개의 웨이팅 리스트가 만들어지지만, 진짜 트렌드로 이어지는 것은 한두 개에 불과하므로. 천신만고 끝에 이름을 올려 구입한 물건이 재고정리 세일 때 팔려 나가는 기분 나쁜 경우도 많다. 그래도 쇼퍼홀릭은 성탄절의 산타처럼, 설날의 태양처럼 새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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