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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쇼퍼홀릭

1000만원짜리 시계에 열광하는 까닭

  • 김민경 동아일보 위크엔드팀장 holden@donga.com

1000만원짜리 시계에 열광하는 까닭

1000만원짜리 시계에 열광하는 까닭
만일 ‘현대남녀쇼핑백서’ 같은 것을 작성한다면 남자와 여자가 가장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항목에 남자의 시계와 여자의 구두를 써넣을 것이다. 할인카드 없이는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 사지 않는 여성이 100만원이 넘는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사고, 사철 양복 2벌에 만족해 마치 사무용품 같은 인상을 주는 평범한 남성이 1000만원에 육박하는 크로노스위스 기계식 시계 같은 시계를 사는 일이 벌어진다. 남녀는 서로의 쇼핑 행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된장녀, 잘 보이지도 않는 신발에 100만원을 쓰다니 제정신이야?’ ‘구닥다리 모양의 시계 하나가 1000만원이라니…싸구려 티셔츠 소매에 가려 보이지도 않잖아!’

그러나 여자의 구두와 남자의 시계는 같은 물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남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 둘째 외모나 노화라는 실존적 한계를 초월한 물건이라는 점 때문이다. 못생긴 여성도 자신의 발에서 빛나는 섹시한 하이힐을 바라보며 ‘인생의 밝은 면’을 찾고, 늙고 배 나온 남성도 손목 위에서 쉬지 않고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을 보며 자신이 성취한 세계를 확인한다. 그래서 구두와 시계는 자기에게 주는 선물이자 성적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는 환상이기에, 이런 욕망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의 하이힐이 점점 더 건강에 나쁘고 불편한 방향으로, 남성의 시계가 부정확하고 전근대적인 형태로 ‘진화’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얼마 전 독일에서 만난 한 기계식 시계(용두를 돌려 태엽을 감는 시계)를 만드는 장인이 이런 얘기를 했다.

“7세 때부터 시계공방에서 일했다. 1980년대에 값싼 일본 쿼츠 시계가 전세계를 휩쓸자 사장이 날 불러 기계식 시계를 더 이상 만들 필요가 없게 됐다고 말했다. 나는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전문가였지만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그때 몇몇 사람이 날 찾아와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시계가 단순히 시간을 재는 ‘타임키핑’ 도구가 아니라는 생각을 나눴던 거다. 그래서 용기를 낸 나는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고 나만의 공방을 만들었다. 이제 그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다. 쿼츠 시계를 팔던 다국적 대자본이 다시 기계식 시계공방을 사들이려고 안달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 시계는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계는 다음 자손에게 물려주는 정신이고 우주이며, 내겐 자식이다.”

외모도 아인슈타인을 닮은 이 시계 장인은 이 정밀한 기계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200여 개의 톱니와 나사로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실제로 요즘 시계 브랜드의 마케팅 포인트는 정확성이라든지 패셔너블한 디자인에 맞춰져 있지 않다.

‘Against all trends(모든 유행에 맞서다)’ ‘당신은 무엇으로 이뤄지는가’ ‘진정한 사치란 우리가 시간과 순간을 선택하는 것’ 등등. 최근 시계 광고 카피는 인생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정의다. 디자인도 기계 자체의 원형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다. 용두와 문자판이 회중시계만큼 커지고 있으며 궤종시계처럼 소리를 내서 어두운 곳에서도 시간을 알 수 있게 하거나 톱니들과 심장의 펌프처럼 움직이는 코일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스켈레톤 등이 인기 있고, 중력을 반영하여 오차를 줄인 뚜르비용이나 음력을 보는 문페이즈, 시침과 분침을 분리한 레귤레이터 등을 장착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Grande Complication) 시계’는 시계 컬렉터의 꿈이 됐다.

시계는 나와 우주의 관계를 기록하는 기계지만, 최소 수백만원에서 수억원대에 이르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는 과시적 효과를 동반한다. 요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의 가장 큰 소비자는 중국, 러시아와 중동 사업가들이란다. 남자에게 이것만큼 약발 잘 듣는 선물이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성공한 남성들의 손목에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예전에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잡고 손금을 봐주었듯, 지금은 여자가 남자의 손목을 잡고 시계를 본다. 시계를 통해 그의 취향과 미래를 본다. 초고가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가 늘 긍정적인 건 아니다. 탐욕스러운 소장자와 아름다운 기계의 극적인 대비 또한 자본주의 시대의 볼 만한 풍경이란 얘기다.

신동아 2007년 11월 호

김민경 동아일보 위크엔드팀장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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