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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쇼퍼홀릭

쇼핑의 세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쇼핑의 세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쇼핑의 세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명품을 파는 매장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누구나 쉽게 매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마케팅 전략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착한 손님에 속한다. 도넛이나 감자칩 같은 걸 먹은 손으로 매장에 걸려 있는 새 옷이나 새 책을 만지지 않는다. 쇼윈도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누가 그걸 낚아챌까봐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떼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들고 있던 음료수를 발칵발칵 다 마셔버린 뒤에 매장에 들어가는 매너(! )도 갖고 있다.

물건에 손을 댄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나 매장 직원에게 ‘구매의욕지수’가 50% 이상임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 종일 서 있어서 다리가 퉁퉁 부은 매장 직원이 헛되이 내게 다가오지 않도록 무심한 듯 양 눈의 시력으로 크기를 재고, 촉감을 느끼며, 입거나 신었을 때 나의 스펙도 상상해보고 가격도 어림잡아본다. 그러므로 일단 옷이나 신발을 착용하고 거울이라는 타석에 들어서면 열에 여덟, 아홉 번은 구매로 이어지는 높은 소비 타율을 자랑한다.

‘나쁜 손님’들은 숍에 걸린 모든 옷과 창고에 있는 신발을 다 신어보고도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옷의 단점을 지적하는 이성과 몹쓸 말솜씨를 과시한다. 신용카드를 흔들며 대충 봐도 십여 벌의 옷을 골라놓은 손님을 뒤로하고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네는 숍마스터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저 손님을 버려두는 거예요? 두바이에서 온 왕녀인지도 몰라요.”

“수십 벌 사면 뭐해요. 또 내일이면 환불하러 와요. 엄마랑 딸 둘, 세 여자가 샀다 환불하는 게 일과랍니다. 뭐, 그중 한두 개는 사니까 참아야죠.”

이런 환불 전문 손님 중에는 룸살롱 오리지널 뺨치는 ‘진상’도 있다. 밀라노에서 오늘 선보인 옷을 내일이면 시장에 푼다는 도매 의류업체에서 보낸 직원이나 스파이 알바들로서, 옷을 구입해서 박음질한 실을 다 뜯어서 패턴까지 그대로 따라 그린 뒤 다시 박아 환불을 요구하는 손님들이다. 이들은 백화점이 ‘불친절 서비스’로 입소문 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한다. 환불을 거부하면 “매장으로 백화점 관계자 오라 그래” 운운하며 일장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 이에 직원들은 이들의 신용카드번호 등을 등록한 ‘진상 리스트’를 공유하고 매장 앞에 ‘디자인 복제를 위한 구매를 금한다’는 팻말을 세워놓기도 한다.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구매하지 않고 매장 직원에게 착한 손님이 되기는 누구의 말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매장 주차장부터 손님과 직원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서울 모 백화점 명품관 주차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불쾌한 첫인상을 주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주차 안내가 아니라 진입을 방해하기 위해 거기 서 있다. 이 건물에서 뭐 하나 살 것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닥여 창문을 내리게 하고 “정말 여기 온 거 맞으십니까”라고 물어본 뒤 “나올 때 명품관에서 산 영수증이 꼭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겨우 붙인 존댓말 어미가 더 듣기 싫다. 매장에 들어서면, 아니나 다를까 범죄혐의자라도 들어선 듯, 내 뒤를 졸졸 쫓으며 “무엇을 특별히 보시냐”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직원이 있다. 그는 손님의 손에 마귀라도 들린 듯, 손님이 만진 옷들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 터는 동작을 반복한다. 얼마냐는 말에 “캐시미어라 가격이 좀 높죠”라고 일단 말한 뒤 우아하게 다가와 가격을 알게된 손님의 표정이 수치와 공포로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관찰하며 즐거워하는 사디 공작의 후손도 있다(아니 상당히 많다).

내 주변엔 이런 직원들과 일대 전쟁을 벌이는 전사형 고객도 적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쇼퍼홀릭은 매장에서 불쾌한 일을 겪으면 지인과 학연, 친척 등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최고경영자 및 오너에게 그 매장 직원이 귀사의 이미지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를 반드시 전달한다. 또 매장 직원의 태도에 분개한 또 다른 이는 카드로 수백만원짜리 코트와 넥타이를 사서 선물용으로 포장하게 한 뒤 그 자리에서 환불했다. 평범한 오피스레이디인 한 여성은 월급을 받자마자 이백수십만원을 은행에서 1000원짜리와 동전으로 바꿔서 매장으로 갔다. 사무실에서 신던 1000원짜리 ‘쓰레빠’차림의 그녀가 명품 부티크 쇼윈도에 있는 옷을 입어보고 싶다고 말하자 직원이 “살 거면 꺼내드리고”라고 말한 데 대한 복수였다(명품 브랜드의 서민 자존심 상처 내기는 마케팅 전략이 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쇼핑하면서 착한 손님이 된 것이 아니다. 매장이 마감을 한 뒤 나 혼자 허겁지겁 출입문을 찾으면서 접한 직원들의 무표정함과 불친절함(그 시간 나는 고객이 아니라는 명백한 의사 표현), 직원전용휴게실에서 줄담배를 피고 있는 어린 직원의 신산한 한숨, 직원 출입구를 표시하는 노란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기계적으로 올라가는 스태프들의 입꼬리가 내게 준 공포 등등이 나를 ‘착하게’만들었다. 따라서 착한 손님의 첫째 룰은, 아름답고 친절하며 호화로운 쇼윈도에서 그들 역시 소외돼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신동아 2009년 3월 호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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