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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쇼퍼홀릭

쇼퍼홀릭의 쇼윈도, TV

  • 동아일보 방송사업본부 기자 ‘holden@donga.com’

쇼퍼홀릭의 쇼윈도, TV

쇼퍼홀릭의 쇼윈도, TV

드라마 ‘스타일’에서 패션아이콘으로 등장한 탤런트 김혜수.

‘어쩌다’ ‘우연찮게’ ‘솔직히’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사들이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읽다가 이런 단어들과 마주치면, 길에서 쥐의 사체를 발견했을 때처럼, 움찔 멈춰 선 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한다(특히 ‘우연찮게’는 ‘우연하게’를 잘못 사용한 말이다).

이런 단어가 존재할 뿐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건, ‘솔직히’ ‘어쩌다’ ‘우연찮게’에 상당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의 갑작스러운 인사조치로 ‘어쩌다’ 내가 전세계의 ‘방송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쇼퍼홀릭’인 나에게 방송은 하나의 거대한 쇼핑몰이다. 혹은 노골적인 ‘바이오스피어(buyosphere)’다. 눈에 띄는 정장 슈트를 하나 사려면, 뉴스를 보면 된다. 물론 때맞춰 정장 슈트에 대한 리포트가 나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이번 가을엔 트위드 슈트가 유행’이라는 뉴스가 다뤄질 가능성은 있지만, 그 보도가 나올 즈음엔 코트를 사러 가야 할 거다.

쇼퍼홀릭이 보는 건 뉴스 앵커들이 입은 슈트다. 앵커들이 협찬받은 슈트는 이번 시즌 트렌드가 무엇인지 보여주면서, 비즈니스 퍼슨의 슈트 착용법에 대한 생생한 팁도 제공한다. 예를 들면 여성이 목선이 파인 재킷을 입을 땐 대담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한다. 시선이 목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 또 그들은 신뢰감과 자신감을 주는 헤어스타일도 제안한다. 스타일링 잘하는 앵커가 등장하는 뉴스를 보고 형광색 블라우스나 노란색 넥타이에 꽂힐 수도 있다. 여성스럽고 살짝 깜찍한 커리어우먼의 패션 아이템을 보려면 기상캐스터들의 스타일링을 참고하면 좋다.

드라마는, 방송이라는 쇼핑몰의 중심이자 셀렉션 잘된 백화점이라 할 수 있다. 방송에는 갓난아이부터 젊은층, 중년과 실버세대를 위한 각종 신상 패션 아이템들이 등장한다. 또 자동차에서 가구, 침구, 벽지 등 주거와 생활에 필요한 상품 모델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요즘 잘나가는 식당과 카페는 물론이고, 물 좋은 클럽이 어딘지도 알 수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들이 패션 브랜드에서 스타일링한 옷차림으로 ‘000 따라하기’ 식의 기사를 만들어내면서 유행을 선도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많은 시청자는 조연으로 나오는 아줌마들과 옆집 아저씨들도 매일매일 새옷을 입고 나온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들여다보면, 파리만 날리는 식당 주인으로 나오는 중년 남성 탤런트라도 유명 스포츠브랜드의 신상 먼싱웨어를 입고 있다. 그들에겐 생활의 구질한 주름 같은 게 없다. 탤런트들이 타고난 외모를 떠나 일반인과 뭔가 달라 보이는 덴 이런 이유도 있다.

요즘 쇼퍼홀릭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스타일’은 젊은 층을 위한 일종의 편집 숍인 셈이다. 많은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2009년 가을겨울 시즌 신상, 일반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하이엔드 자동차, 서울 강남에서 연예인들이 잘 가는 클럽을 패션잡지 넘겨보듯 골고루 볼 수 있다.

드라마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한 간접 광고 때문에 억지스러운 장면이 자주 나오긴 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똑같은 브랜드의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든지, 발행인이 편집장에게 또 똑같은 자동차를 선물해주겠다며 쇼룸에 가서 오락가락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속이 탈 때마다 똑같은 브랜드의 정수기에서 물을 꽤 한참 받아 마신다. 이 정수기엔 ‘얼음 기능’이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느닷없이 여주인공이 정육점에 가서 ‘협찬’ 휴대전화로 ‘후원’사가 진행하는 쇠고기이력추적제가 잘 되는지 실험해본다(중간광고 보는 셈 쳤다). 드라마 속 잡지회사는 패션화보 촬영도, 회사 행사도 인천세계도시축제에서 하느라 발행인에서 어시스턴트에 이르기까지 전 직원이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고생을 하고 있다.

드라마 완성도에 흠집을 내는 이 모든 ‘우연히’를 못 본 척할 수 있는 건, 등장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패션 아이템들이 워낙 ‘좋기’ 때문이다. 특히 김혜수가 입고 들고 신고 나오는 모든 것은 다음 날이면 화제가 된다. 패션매거진 기자들은 하늘을 찌르는 ‘오버’에 진저리를 치지만 말이다.

내가 기자인 것을 아는 미용실 언니는 날 볼 때마다 “어제 김혜수가 입고 나온 오프숄더(어깨가 드러난 디자인) 드레스 어느 브랜드죠?” “어제 신은 구두도 지미추인가요?”라고 물어본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면 머리를 말고 있는 아주머니도, 샴푸를 하는 남성도 흡, 숨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쇼퍼홀릭의 로망은 영화 ‘링’이 힌트를 준 것처럼 TV 화면 안에 귀신을 비롯한 온갖 ‘물건’과 ‘상품’들이 손에 잡을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좀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TV가 화면에 나오는 모든 제품의 브랜드, 가격, 사이즈, 숍에 대한 정보를 ‘즉각적’으로 알려주는 쇼윈도가 되는 것이다. 그 아이템을 파는 숍으로 바로 연결돼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면, 김혜수가 입은 수백만원짜리 발맹 슈트‘풍’의 5만원짜리 원피스를 파는 쇼핑몰을 연결해준다면 금상첨화겠다.

TV가 계몽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이 무슨 어리석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길 가다가 한눈에 꽂히는 아이템이 있으면 생면부지인 사람에게도 “저기, 혹시 이거 어디서 사셨는지요?”라고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고, 대답해주는-‘쇼핑공화국’의 스파이들인 그들 사이에 순간적이지만 강렬한 연대의식이 형성된다-쇼퍼홀릭에게는 꼭 필요한 TV의 진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할까. 아니, 나 같은 쇼퍼홀릭에게 뭔가를 팔아야 하는 스마트한 비즈니스 퍼슨이 이런 트렌드를 놓칠 리 없으니, 헛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어제 TV에 나온 그 옷을 입은 나와 똑같이 차려입은 나의 ‘분신’들을 출근길에서 열 명쯤 마주치는 일은 굉장히 으스스한 느낌이 들겠지만 말이다.

신동아 2009년 10월 호

동아일보 방송사업본부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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