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가난한 무지개 나라, 카지노로 빵을 굽다

남아프리카공화국

  • 송화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

    입력2010-12-02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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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00만명이 사는 나라에 카지노가 37개다. 인파로 붐비는 도심 복판에는 어김없이 번쩍이는 간판이 있다. 인종도 국적도 상관없다. 지갑 열 준비만 되어 있다면. 카지노에 모이는 현찰은 공장이 되고, 도로가 되고, 일자리가 될 게다. 24시간 불을 밝히는 마법의 공간. 남아공의 카지노가 품고 있는 건 일확천금의 꿈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이다.
    가난한 무지개 나라, 카지노로 빵을 굽다

    선시티 ‘잃어버린 도시의 궁전’ 호텔과 카지노 남아공 전역에 분포돼 있는 카지노

    우리나라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10월 중순, 가을빛에 물든 한국을 떠나 남아공 수도 프리토리아를 찾았을 때 처음 시선을 붙든 건 도심에 만발한 자카란다 꽃무리였다. 자카란다는 3m 이상 자라는 아름드리 가로수. 봄이 오면 시내 곳곳에서 선명한 보라색 꽃을 피운다. 벚꽃처럼 여린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장관. 하늘에서 보라색 꽃비를 뿌리듯 흩어져 날리다 세상 모든 것 위로 신비롭게 내려앉는다. 도로 위, 백인 운전자의 자동차 보닛 위, 그리고 트럭 짐칸에 탄 채 어딘가로 향해 가는 흑인 노동자의 머리 위에도.

    남아공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분리)는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면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의 ‘분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봄꽃이 만개한 프리토리아 거리를 걷는 사람 100명 중 99명은 흑인이었다. 창문을 모두 닫은 채 달리는 고급 승용차 안에는 대부분 백인이 타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과 세계 각국의 대사관이 모여 있는 프리토리아 거리를 쉼 없이 청소하는 이들은 모두 흑인, 낡은 트럭 짐칸에 앉아 이른 봄 더위를 온몸으로 느끼며 이동하는 이들 역시 흑인이었다.

    남아공 통계청은 올 1분기 실업률이 약 25%라고 밝혔다. 흑인의 실업률은 통계에 따라 최대 40%에 달한다. 백인의 평균 소득이 흑인의 8배가 넘는 상황에서, 남아공 국민의 43%는 하루 2달러(약 2250원) 미만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흑인들은 프리토리아 같은 백인 거주 지역에 아예 들어오지 못했다. 통행의 자유를 얻은 지금은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구걸을 한다. 낮 동안 잘 정비된 백인들의 땅에 머무르다 밤이 되면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자신의 양철집으로 돌아간다. 자유와 평등이 회복된 지 16년,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 잡은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의 깊은 고민거리다.

    잠재적인 만병통치약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선택한 수단 중 하나가 카지노라는 건 이색적이다. 기독교에 기반을 둔 백인 정권이 집권하던 시절, 남아공에서 도박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 정부 출범 무렵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약 15만대에 달하는 슬롯머신이 음성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새 정부는 출범 후 곧 도박 합법화를 논의하는 위원회를 구성했고, 1996년 ‘국가도박법(the National Gambling Act)’을 제정해 복권·경마 등 다른 사행산업과 더불어 카지노 영업을 허용했다. 미국 UC버클리대 제프리 살라즈 교수는 ‘개발과 도박(gambling with development)’이라는 논문에서 “집권 세력은 곧 도래할 수 있는 국가 금융위기를 막을 잠재적인 만병통치약으로 카지노 합법화를 활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왜 카지노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요하네스버그로 향한다. 남아공 최대의 금융 도시 요하네스버그가 속한 가우텡 주에는 카지노가 7개 있다. 최근 10주년을 맞은 몬테카지노(montecasino)도 그중 하나다. 푸른 나무와 붉은 꽃이 어우러진 정원, 잔잔한 호수 너머 보이는 황금빛 석조 건물. 몬테카지노의 첫인상은 우아했다.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운 풍경 속을 걷고 있으니 서유럽의 어느 고풍스러운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몬테카지노의 제너럴 매니저 스티브 호웰(53)은 “당신이 지금 떠올리는 곳이 아마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한 마을일 것”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카지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건축 양식으로 만들었어요. 누구든 이곳에서 그 아름다운 도시를 만날 수 있도록 세계 유수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공을 들였지요. 정원의 나무 한 그루, 건축 자재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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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공 선시티 리조트는 화려하고 다양한 시설로 유명하다. 리조트내 거리와 호텔 내부, 바다를 본뜬 수영장 등의 모습.



    2007년 리조트 안에 이탈리아 소도시의 광장(piazza)을 본뜬 야외 광장 ‘Montecasino Outdoor Piazza’를 만들고, 테라스 카페와 레스토랑까지 오픈하면서 이 ‘마을’은 유럽의 원형에 좀 더 가까워졌다. 밤이 되면 이탈리아 거리의 가로등을 연상케 하는 은은한 금빛 조명이 카지노 리조트 안팎을 두루 비춘다. 화려하고 요란한 환락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평화로운 휴양지처럼 느껴지는 이곳 안에도 물론 1714대의 슬롯머신, 76개의 게임 테이블을 갖추고 24시간 운영하는 대형 카지노가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5성·4성·3성으로 분류된 3개의 호텔과 컨벤션 시설, 15개의 스크린을 갖춘 극장, 다양한 분위기의 쇼핑센터와 1900석의 좌석을 갖춘 전문 공연장 ‘Teatro’ 등이 함께 들어서 있다. 건물 밖으로는 수백 마리 새가 날아다니는 ‘조류 공원(bird garden)’이 펼쳐진다. 고정형 애드벌룬을 타고 하늘로 올라 리조트와 조류 공원을 조망하는 어트랙션이 있을 만큼 작지 않은 규모다. 요하네스버그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들어가는 듯하던 처음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남아공의 카지노는 대부분 몬테카지노처럼 도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숙박과 쇼핑, 여가 생활을 함께 즐기는 복합 문화 공간 구실을 한다. 1996년 정부가 카지노 산업을 허용하면서 내세운 조건이 공공성과 수익의 사회 환원이었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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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골드리프시티 카지노가 투자해 건설한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아래) 백인과 비백인으로 입구가 구별돼 있는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입구.

    “남아공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려는 기업은 무척 많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인구 100만명당 한 개꼴인 40개 이상은 허가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에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카지노 운영권을 받으려면 해당 카지노가 시민들에게 어떤 점에서 기여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 카지노의 ‘Teatro’는 남아공 전체에서 가장 큰 공연장이에요. 시설도 가장 좋지요. 디즈니 라이선스 뮤지컬 ‘라이온킹’이 이곳에서 초연됐고, 지금은 아바의 ‘맘마미아’가 공연 중입니다.”

    스티브 호웰의 설명이다. 남아공의 카지노 가운데 35개가 가입해 있는 남아공카지노연합(CASA)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9년까지 남아공에서 카지노 사업자들이 건설비로 쓴 돈은 188억란드(약 3조264억원)에 달한다. 카지노 자본으로 건설한 케이프타운과 샌튼의 국제 컨벤션센터 건립비용은 제외한 액수다. 카지노 건설에 이처럼 거액이 투입된 건 거의 모든 카지노가 몬테카지노처럼 수준 높은 부가 시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 대부분의 카지노 안에 호텔과 스파, 컨벤션센터, 식당, 쇼핑몰, 극장 등이 있고, 자신만의 특성을 강조할 수 있는 시설은 별도로 있다.

    역시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골드리프시티(Gold Reef City) 카지노의 ‘플러스 알파’는 대형 놀이공원과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이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단지 누군가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고양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To be free is not merely to cast off one′s chains but to live in a way that respects and enhances the freedom of others)”이라는 넬슨 만델라의 발언으로 문을 여는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은 특히 눈에 띈다. 지난 50년간 남아공에서 벌어진 흑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의 역사를 집대성한, 국립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 그대로 ‘whites’와 ‘non-whites’로 구별돼 있는 입구에 들어서면 곧장 참혹한 과거의 기록이 쏟아져 나온다. 전시실 곳곳에서 상영되는 영상 속에서 흑인들은 욕설을 듣고, 매를 맞고, 총질을 당하고 있다. 한 전시관은 아예 천장 가득 교수대 밧줄을 걸어놓는 것으로 그 시대의 아픔을 묘사했다. 당시 흑인들이 무엇을 요구했고, 어떻게 고문을 당했으며, 어떻게 죽어갔는지, 불과 10여 년 전까지 이어진 역사인 만큼 기록은 선명하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디고 나면 이제는 승리의 역사가 이어진다. 27년간 갇혀 있던 넬슨 만델라가 출옥하며 힘차게 주먹을 치켜드는 모습, 이후 치러진 남아공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압도적인 지지로 집권하는 장면 등이 어제의 일인 듯 생생하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안내문에는 “이 박물관은 골드리프시티 카지노를 세운 ‘Akani Egoli’ 컨소시엄이 800만란드(약 12억8800만원)를 부담해 건립됐다. ‘Akani Egoli’ 컨소시엄은 이 박물관 건립 계획 덕분에 카지노 영업권을 따냈다”고 기록돼 있다. 남아공에서 카지노 산업이 담당하는 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아공 정부는 카지노 자본을 활용해 사회기반시설을 짓는다. 그리고 이것이 카지노를 허용하는 이유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쇼핑센터, 극장, 공연장, 수영장, 식당, 그리고 수준 높은 박물관까지 지금껏 돈 없는 흑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공간들이 그렇게 하나 둘 남아공 땅 위에 태어난 것이다.

    가난한 무지개 나라, 카지노로 빵을 굽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마을을 모델로 건설된 몬테카지노의 야외 광장 전경.

    남아공 정부는 카지노를 통해 흑인 고용 확대 효과도 얻는다. CASA에 따르면 1996년 이후 카지노로 인해 새로 생긴 일자리는 전국적으로 10만개에 달한다. 2009년 현재 가우텡의 카지노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만1000명. 54개 레스토랑의 풀타임 고용인이 1180명이고 14개 호텔 역시 1500명을 고용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중 절대 다수가 흑인이라는 점이다. 남아공에는 기업이 흑인을 채용하거나 승진시키면 갖가지 우대와 특혜를 제공하는 ‘흑인경제력육성(BEE·Black Economic Empowerment)’ 프로그램이 있다. 흑인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고육지책으로, 역설적으로 흑인들이 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한다. 하지만 카지노 산업 관계자들에게 이 정책은 카지노 영업권을 받기 위한 열쇠다. 더 많은 흑인을 고용하는 것은 곧 경쟁에서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부가가치의 37%는 세금

    남아공 최대의 카지노 리조트인 선시티(sun city)의 홍보책임자 헬리언 포텐슈라거(54)는 “정부는 흑인들에게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인종 간 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한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흑인이 괜찮은 직업을 갖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 직종에서 백인과 경쟁할 경우 객관적인 조건에서 뒤지는 게 보통이다. 카지노 산업의 경우 정규 교육보다 기업 내에서 실시하는 교육에 따라 실력이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흑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실제로 선시티 리조트의 피고용인은 대부분이 흑인이고, 우리 임직원들은 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카지노가 매년 내는 막대한 세금은 남아공 정부 재정에 좀 더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남아공은 실업률이 높고, 흑인 대부분이 노점상이나 영세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나라다. 세금 납부율이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카지노는 조세 저항이 없는, 가장 확실한 세원(稅源) 구실을 한다. 통계에 따르면 남아공의 카지노 업체들이 1996년 합법화 이후 2009년 3월까지 창출한 부가가치는 1430억란드(약 23조201억4000만원). 그중 37%에 달하는 410억란드(약 6조6001억8000만원)가 법인세, 도박세, 지방세 등 다양한 종류의 세금으로 정부 재정에 편입됐다.

    이렇게 걷힌 세금은 남아공에서 당장 필요한 사회 복지와 국토 정비 예산에 투입된다. 남아공 정부는 소웨토 등 과거의 흑인 주거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무료 주택 제공 사업을 벌이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와 넬슨 만델라가 살았던 소웨토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정부가 도시의 흑인을 강제 이주시켜 조성한 주거지. 사회기반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이곳에서 흑인들은 양철과 타이어로 ‘성냥갑(match box)’이라 불리는 집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도심에서 1시간도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소웨토 주민의 상당수는 나무나 쓰레기를 때 밥을 짓고 우물 물을 길어 마신다. 남아공 전역에 퍼져 있는 극빈층 흑인에게 무상으로 주택을 공급하는 건 남아공 정부로서는 시급한 복지 사업이다.

    동시에 카지노 기업들은 기업의 사회적 투자(CSI·Coporate Social Investment)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회 기여 활동을 하기도 한다. 선시티의 경우 세금을 제한 수익의 2%를 매년 사회에 환원한다. 남아공 장애인 올림픽 대표팀을 후원하는 등 방식은 다양하다. CASA는 2008년 한 해 동안 35개 카지노가 CSI로 투자한 비용은 6000만란드(약 96억5900만원)라고 밝혔다.

    공공선이냐, 공공악이냐

    이런 과정 때문에 남아공의 카지노 산업은 종종 사회 안정과 부의 재분배를 위한 ‘보이지 않는 손’으로 평가받는다. 경제적 불평등과 세수(稅收) 부족으로 ‘재정 위기’에 빠질 뻔한 국가를 다잡은 기간산업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카지노 사업자들이 이 경쟁에 뛰어드는 건 남아공의 카지노가 분명 큰 수익을 내기 때문이다. 엠퍼러스 팰리스(Emperors Palace) COO인 밥 예함(50)은 “1998년 문을 연 뒤 2008년까지 해마다 두 자릿수 이상 비율로 매출이 성장했다. 세계적인 경기 위축으로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카지노는 남아공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사업 분야”라고 말했다. 주된 고객층은 국내 백인이지만,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큰손들도 남아공을 찾는다고 귀띔했다.

    가난한 무지개 나라, 카지노로 빵을 굽다

    엠퍼러스팰리스 카지노 리조트의 정원 풍경. 도심 한가운데 잘 가꾼 숲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미국, 호주 등 해외 관광객들도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문물과 카지노를 함께 즐길 이상적인 관광지로 남아공을 꼽는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준 높은 치안, 영어 사용이 가능한 언어 환경, 그리고 백인 집권 기간에 구축된 도로망과 통신망 등 안정된 사회기반시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아공의 카지노들은 24시간 쉴 새 없이 불을 밝힌다. 번쩍이는 불빛과 시끄럽게 울려대는 음악 속에서 사람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베팅을 한다. 그럼에도 남아공 카지노가 다른 평가를 받는 건 이 나라에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리토리아 거리에서 목격된 ‘분리’의 풍경은 카지노 안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남아공 거리에서 백인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자동차나 건물 안에 있다. 텅 빈 거리는 쓸모없어 보이는 수공예품을 팔기 위해 어슬렁거리거나 그늘에 누워 쉬고 있는 흑인들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카지노에서는 인종의 역할이 반대로 바뀐다. 이번엔 백인이 쉬고 흑인이 일을 하는 모양새다. 뮤지컬 ‘맘마미아’를 보기 위해 몬테카지노 공연장을 찾았을 때, 1900석을 가득 채운 관객 중 흑인은 10명을 넘지 않는 듯 보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백인과 소수의 황인종이 모여 있는 곳에서 흑인들은 표를 받고, 좌석을 안내하고, 공연이 끝난 후 자리를 정리했다.

    카지노 게임룸의 슬롯머신과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이들, 유럽의 멋진 광장을 흉내 낸 야외 테라스 레스토랑에서 품위 있는 식사를 즐기는 이들도 절대 다수가 백인이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은 흑인이다. 흑인 정부가 카지노 산업을 허용하며 기대했던 바로 그 부분의 성취다. CASA 대표이자 ‘선시티’를 운영하는 선인터내셔널 CEO인 데이비드 코우츠트로터도 “지난 13년 동안 남아공의 카지노 산업은 지역 경제와 국가 관광산업의 성장, 안전하고 믿을 만한 여가 기회의 확대라는 면에서 국가 경제에 매우 의미 있는 존재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남아공의 카지노 산업이 순기능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구 1100만명의 도시(가우텡)에 8742대의 슬롯머신과 323개의 게임 테이블이 생겨나면서 인구의 80%가 “한 번 이상 도박을 해봤다”고 말할 만큼 ‘도박의 천국’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를 가진 백인이 게임을 즐기고 흑인들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부가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산업이 선순환하고 있지만,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사회에서 도박 중독 등의 사회 문제가 발생할 경우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외국인을 유치하라

    남아공 정부도 카지노 산업을 활성화하면서 동시에 합리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2004년 ‘국가도박법’을 개정해 이용자를 보호하고 도박 자금 대출을 제한하는 등 카지노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의 ‘National Responsible Gambling Program’을 만든 것이 그 첫걸음이다. CASA가 자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남아공 카지노 이용자 가운데 중독 등의 심리 문제를 겪은 사람의 비율은 4~6% 선. 2001년 4.2%에서 2003년 6.2%로 늘었다가 최근엔 다시 4%대를 유지하는 상태다.

    남아공 전역의 카지노 업체 대표들은 2005년 케이프타운에 모여 자율 규약(code of conduct)을 만든 뒤 게임 중독을 막기 위한 공공 교육, 도박 중독자에 대한 무료 진료, 도박 문제 발병을 막기 위한 연구 등에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남아공의 카지노에는 이용자들이 도박 중독 등의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최근 남아공 카지노 산업에 나타난 또 다른 변화는 해외 관광 시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엠퍼러스 팰리스 호텔 카지노 컨벤션 리조트는 1724대의 슬롯머신과 69개의 테이블을 보유한 대규모 카지노. 남아공에서 해외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카지노 가운데 하나다. 3성·4성·5성급 등 다양한 수준의 호텔이 있고, 대형 컨벤션센터와 쇼핑센터, 식당가, 수영장, 극장 등을 갖춘 이곳에는 최근 중국의 큰손들도 자주 찾는다. 밥 예함 COO는 “중국의 단체 관광객을 유치해 공항에서 카지노까지의 교통편과 호텔 관련 비용을 제공하고 마음껏 게임을 즐기게 하는 정킷(jucket)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면서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화교 여행객이 느는 추세”라고 소개했다. 이 카지노는 중국의 명절에 맞춰 관련 행사를 열고 컨벤션센터에 특설 링을 설치해 권투 타이틀 매치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이벤트도 벌이고 있다. 밥 예함 COO는 “남아공의 풍광을 살려 호텔 조경을 꾸미고 특산품 매장도 열었다”며 “남아공을 찾은 해외 여행객들이 굳이 다른 곳에 가지 않아도 원하는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원스톱 관광지로 꾸미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130㎞ 떨어진 필랜스버그 국립공원 옆 선시티 리조트는 이런 목표에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특징은 자체 경찰과 소방서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와 체계를 갖춘, 말 그대로 하나의 ‘city’라는 점. 요하네스버그 시내에서 선시티까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길옆으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황무지와 흑인들이 거주하는 슬럼가 등이 스쳐간다. 남아공은 남한보다 11배나 큰 국토에 남한 인구보다 적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서든 황량한 빈 땅과 극빈자 거주지를 만나게 된다. 그 풍경에 익숙해질 때쯤 나타나는 선시티는 말 그대로 별세계다.

    1500ha 규모의 리조트 안에 네 개의 고급 호텔과 세계적인 골퍼 게리 플레이어가 직접 설계한 골프 코스 등 두 개의 골프장, 초대형 카지노와 다양한 오락시설을 갖추고 있다. 케이프타운, 빅토리아폭포, 크루거 국립공원과 더불어 남아공에서 꼭 들러야 할 관광지로 통한다.

    특히 ‘잃어버린 도시의 궁전(the palace of the lost city)’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리조트의 메인 호텔 앞에 서면 고전적인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아프리카 고대 부족의 왕궁 이미지를 형상화한 이 호텔을 비롯해 각각의 호텔과 골프장 사이로는 전용 모노레일이 다닌다. 하얀 모래와 야자수로 꾸민 바다 풍경의 수영장 ‘valley of the waves’에서는 하루 종일 파도가 친다. 패러세일링 제트스키 수상스키 카누 요트 등을 즐길 수 있는 인공 해변과 364종 1만2000여 마리의 동물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필랜스버그 국립공원도 다른 카지노 리조트가 흉내 낼 수 없는 부대시설이다.

    선시티 투숙객들은 코끼리 등에 탄 채 필랜스버그 국립공원을 산책하거나, 동트기 전 애드벌룬을 타고 사파리를 즐기는 등 이 리조트가 마련한 101가지 독특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한 가지 어트랙션당 몇만원에서 수십만원 대까지 적지 않은 비용이 들지만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이다. 헬리언 포텐슈라거 홍보 책임자는 “우리는 물론 카지노를 갖고 있지만, 카지노가 선시티의 대표 시설은 아니다. 내국인 카지노 이용자들에 대한 비중을 낮추고 가족들이 함께 놀러와 즐길 수 있는 가족 휴양 시설로 성장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남아공 카지노의 미래

    남아공 국기 모양은 복잡하고 독특하다. 노란색과 하얀색 테두리가 둘러진 초록색 Y자형 띠가 가로에 놓여 있고 그 위는 빨간색, 아래는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빨강은 독립과 흑인 해방운동을 위해 국민이 흘린 피를, 초록은 농업과 국토를, 노랑은 풍부한 광물자원을, 파랑은 열린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깜장과 하양은 각각 흑인과 백인을, 그리고 Y는 통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흑백 인종과 여러 부족, 그리고 9개 주의 화합도 상징한다. 1994년 넬슨 만델라 정부 출범을 계기로 만들어진 이 국기는 남아공이 걸어온 고된 과거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먼 미래를 함께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아공 국민은 카지노가 더불어 미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자리, 공장, 도로를 만들어주기를, 그들이 먹고살아갈 빵을 구워주기를 기대한다. 세계 카지노 학자들은 남아공의 카지노 정책을 미국 인디언 주거지역 등의 카지노 정책과 비교, 분석한다. 남아공처럼 한 국가 전역에서 카지노를 이용한 경제부흥 실험이 실시된 경우는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카지노를 이용해 먹을거리를 만들려는 남아공의 실험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그 성패는 카지노 합법화를 통해 낙후한 지역 경제를 되살리고 소득 격차를 재편하려는 많은 나라에 하나의 시사점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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