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선두주자 프랑스·일본 제치고 맨 먼저 ‘서류시험’ 합격

한국 원전, 美 수출 첫 관문 통과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입력2015-03-23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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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성적서 조작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한국 원자력계가 월성 1호기의 수명 연장을 승인받은 데 이어 또 하나의 진전을 이뤘다. 한국 원전을 미국에 수출하기 위한 ‘사전(事前) 침투’에 성공한 것. 안전성을 검사받는 본심사 통과와 세계적인 원전 회사와의 경쟁에서 이겨 원전 건설을 따내야 하는 ‘본게임’이 남아 있지만, 일단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는 평가다.

    미국은 원자력 기술의 종주국이며, 세계 원자력발전량의 30%대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원전 시장이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자부심이 매우 강해, 미국 기업이 만든 원전만 허용한다. 그런데 자국 기업에만 기회를 주면 ‘불공정’ 시비가 일 수 있기에, ‘설계인증제도’를 통해 규제한다. 따라서 미국 이외 나라의 회사가 이 인증을 획득하고 경쟁에서 이겨 미국에 원전을 짓게 된다면, 그 회사는 세계 최고의 원전 회사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보다 ‘한발 앞섰다’는 평가를 받아온 프랑스와 일본의 원전 기업은 2007년부터 설계인증을 받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만 7년을 보냈음에도 설계인증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서류 미비에 있다. 미국은 1979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에 비견할 수 있는,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를 당한 적이 있기에 원전에 대해서는 ‘안전’을 제일로 여긴다. 그 때문에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 하여금 원전을 짓고자 하는 회사로부터 원전 설계에 관한 자료를 받아, 안전성 면에서 면밀히 검토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상이 없다’는 판단이 나와야, ‘15년 한정’으로 미국에 건설해도 좋다는 설계인증을 내준다. 현재 NRC는 미국 회사인 웨스팅하우스와 제너럴일렉트릭에만 이 인증을 발급했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이후 미국은 원전을 거의 짓지 않았다. 그사이 프랑스와 일본은 열심히 원전을 지어 미국을 능가하는 기술을 갖췄다. 두 나라는 ‘세계 최고가 되자’는 목표를 갖고 미국 진출을 시도했는데, NRC가 쳐놓은 촘촘한 그물에 걸려 만 7년을 버벅거리게 된 것이다.



    선두주자 프랑스·일본 제치고 맨 먼저 ‘서류시험’ 합격
    7년간 버벅거린 프랑스와 일본

    때문에 두 나라는 미국 의회에, ‘NRC가 불공정 경쟁을 유도한다, 미국 기업에만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논란이 일자 NRC는 해결책을 모색했다. 서류 미비 판정에 대한 공정성 시비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다 제출한 회사에 대해서만 본심사를 하겠다. 본심사 기간은 3년 반(42개월)으로 한다”며, 인증 신청 때 제출해야 할 서류의 종류와 내용을 공시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때 한국은 아랍에미리트연방(UAE)에 원전을 수출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2009년 말 사상 처음으로 원전 수출 계약을 맺는 쾌거를 올렸다. 그리고 미국 공략에 착수했는데 그때는 NRC가 서류심사를 우선하는 사전심사 제도를 확정한 다음이었다.

    2013년 9월 한국은 처음으로 서류를 제출했으나, 3개월 뒤 ‘퇴짜’ 통보를 받았다. NRC는 ‘12군데에서 미비한 점이 발견됐다’고 했다. 이는 합당한 지적이었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오래전부터 본심사를 요청해온 프랑스와 일본 기업을 의식한 조치이기도 했다.

    NRC는 두 나라 기업에는 아직도 ‘서류 완비’를 통고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한국에 합격을 통보하면, 두 나라가 외교적으로 시비를 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NRC는 두 나라 회사에 대해서는 기득권을 인정해, ‘본심사에는 들어온 것으로 보고, 서류만 완비하면 본심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후발주자 한국의 급부상

    NRC 설계인증을 받는 일은 김명기 소장이 이끄는 한국수력원자력(주) 중앙연구원의 신형(新型)원전연구소가 담당했다. 이 연구소는 2014년 1년 동안 미비하다고 지적받은 12가지 문제를 보완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12월 23일 다시 서류를 제출했다. 그리고 올해 3월 5일 NRC로부터 ‘서류는 다 갖췄다. 본심사를 받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프랑스와 일본 기업도 하지 못한 서류 완비를 한국이 해낸 것인데, 이를 기자는 ‘사전 침투 성공’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진출을 위해 노력하는 프랑스와 일본의 원전 회사는 각각 아레바와 미쓰비시다. 한국 회사는 한수원과 한국전력 컨소시엄이다. 명목상 세 회사는 똑같이 본심사에 올라갔지만, 서류를 다 제출한 것은 한국뿐이니 가장 유리한 처지다. 비유해서 말하면 한국은 처음으로 원서를 낸 고3생이고, 아레바와 미쓰비시는 7년째 원서를 넣은 8수생인데, 고3생이 8수생을 제치고 앞에 나선 것이다.

    NRC는 3월부터 본심사를 한다고 했으니 약간의 준비기간을 추가하면 한국은 2018년 말 설계인증에 대한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 그런데 NRC는 관문 하나를 추가해놓았다. 주민 동의를 받는 것이다. 주민 동의는 미국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NRC는 설계인증 내인가를 받은 회사는 6개월간 공청회를 열어 자사 원전의 안전성을 주민에게 설명하고, ‘지어도 좋다’는 동의를 받도록 했다. 이 공청회에서 반대가 많이 나오지 않아야 정식 설계인증을 내준다. 따라서 최종 설계인증은 2019년 중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설계인증을 받으면 한국 컨소시엄은 미국 웨스팅하우스나 제너럴일렉트릭과 같은 자격을 가진 회사가 된다. 그러나 미국의 국수주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에, 한국은 웨스팅하우스와 협력하기로 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국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경수로)를 공급한 회사다. 반면 제너럴일렉트릭은 한국이 전혀 운영하지 않는 비등수로만 제작해왔기에 한국과 협력하려야 할 수가 없다.

    한국과의 협력은 웨스팅하우스에도 이익이 된다. 웨스팅하우스는 100만KW인 AP-1000 으로 설계승인을 받았는데, 한국이 내놓을 원전은 이보다 출력이 40%나 큰 140만KW의 APR-1400이다. 한국과 협력하면 웨스팅하우스는 100만과 140만KW 두 개 모델을 가진 회사가 된다. 100만KW짜리를 원하는 전력회사에는 자사의 AP-1000으로 도전하고, 더 큰 원전을 짓고자 하는 전력회사에는 한국과 협력한 APR-1400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2019년 설계 승인을 받는다면 APR-1400은 ‘폭풍의 눈’이 될 수 있다. 가장 많이 짓고, 가장 많이 가동했기에 안전성이 실증된 원전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아레바가 설계인증을 신청한 원전은 160만KW인 EPR-1600인데 현재 3기가 건설되고 있다(프랑스, 핀란드, 중국). 미쓰비시가 설계인증을 신청한 170만KW의 APWR은 지금까지 단 한 기도 건설되지 않았다. 신형원전은 자국에서 제일 먼저 지었어야 하는데, 후쿠시마 사고로 일본은 신규 원전 건설을 금지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 웨스팅하우스는 미국과 중국에서 각각 4기의 AP-1000을 짓고 있다. 그러나 제너럴일렉트릭이 설계승인을 받은 ESBWR은 한 기도 건설되지 않은 상태다.

    한국 원전은 가장 많이 건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에서 6기, UAE에서 4기를 동시에 짓고 있는 한국의 APR-1400이다. 이 공사들은 한국이 NRC로부터 설계승인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2019년 전후 완료될 것이므로, 2020년 이후 한국 컨소시엄은 웨스팅하우스와 더불어 설계인증을 받은 원전을 가장 많이 지어 운영해본 회사가 된다. 이러한 실적은 원전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니 웨스팅하우스와 손잡은 한국 컨소시엄은 ‘미국의 원전 랠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한국은 한국형 고등훈련기인 T-50을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T-50이 미국에 진출하고, 2020년대 중반 한국 원전이 미국에 건설된다면, 이는 한국이 미국의 핵심 산업에 진출한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의 반핵단체는 월성1호기 계속운전 승인에 대해 시비를 걸지만 세계는 조금씩 한국원전을 인정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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