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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한국의 부장들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김건희 객원기자 | kkh4792@hanmail.net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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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식의 열망


이런 불안감은 글로벌 경기 악화로 인해 제조업계 종사자들에게도 확산되고 있다. 기자가 만난 부장들은 “지금은 회사가 일정 수준의 매출을 유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기업 환경이 크게 달라질 것 같다. 국내 주요 산업들이 10년 내 막다른 골목에 닿을 것이고, 결국 이런저런 방식의 구조조정이 시도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간 한국을 먹여 살리던 주력 산업(전자, 자동차, 철강, 조선, 정보통신 등)이 흔들리고, 세계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엔저 장기화 등으로 수출길도 암울하다.

G그룹 K부장은 “몇 달 전부터 매출 부진에 따른 정리해고 시나리오가 돌고 있다. 업황이 좋지 않다고 매출 부진이 무마되는 건 아니어서, 조만간 매출 부진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한다. 요즘 바늘방석”이라고 했다. 다음은 K그룹 B부장의 말.

“글로벌 기업 환경을 예측하기 어려워지면 회사는 단기 성과에 매달린다. 그러면 프로젝트 팀이 활성화할 수밖에 없고, 기존 조직은 없어지거나 위축된다. 부장으로서는 곤욕스럽다. 그럴 때면 드라마 ‘미생’의 오상식을 떠올린다. 오상식은 멋있지만 피곤한 인물이다. 상사와 부딪치고 조직 논리에 깨져도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팀이 존속하게끔 애쓴다. ‘드라마니까…’ 하고 생각했다가도 ‘나도 후배들에게 저런 선배가 돼야 할 텐데…’라고 마음먹는다. 내게도 오상식이 품은 열망은 있다.”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미생’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가 그린 오상식 차장 캐릭터(왼쪽)와 드라마 ‘미생’에서 오상식 역을 한 이성민. 사진제공·tvN

임원은 ‘고위직 계약직원’


법적으로 정년연장을 보장한 만큼, ‘살아남은 일부’로 인해 기업문화가 바뀔 거라는 예측도 나온다. L기업 홍보팀 관계자는 “지금까지 팀장(부장)에서 팀원으로 내려온 경우는 있어도 담당(부장 혹은 상무)에서 팀원으로 내려온 사례는 없었는데, 내년부터 정년연장법이 적용되면 상무나 팀장이 팀원으로 일하는 기업문화가 자리 잡을 수도 있다”며 “내년에 회사가 어떤 인사를 할지가 직원들에겐 초미의 관심사”라고 전했다.

본사에서 큰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능력을 인정받은 금융회사의 L부장은 최근 몇 달을 버티다가 계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유는 앞의 사례들과 정반대다. 정년이 10년 남은 그에게 지난해부터 임원 승진 요구(?)가 빗발쳤지만 그는 끝까지 견뎌냈다고 한다.



“노조는 공식, 비공식 경로를 통해 나를 임원 승진시켜야 한다는 뜻을 대표에게 전달했다. 그래야 자기들 승진할 자리가 생기니까. 그런데 나는 ‘왜 벌써 임원을 달아야 하냐’며 버텼다. 3년 임원 달고 나가면 7년을 손해 보는데, 7년이면 대략 11억 원의 수입이 날아간다. 임원이 되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 경제와 고용이 불안한 요즘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하면서 굳이 승진할 이유가 없다. 결국 대표와 얘기해서 지방 계열사를 하나 맡았다.”

L부장의 말처럼, 임원이 된다고 회사를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 경영성적 분석 웹사이트 ‘CEO스코어’가 10대 그룹 96개 상장사 임원 중 2015년 정기인사에서 퇴임한 2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퇴직 임원은 평균 54.5세였다. 재임기간은 5.2년. 직급별 퇴직 연령은 상무가 53.5세로 가장 낮았고, 부사장이 55.8세, 전무가 56.2세, 사장이 58.7세였다. 어렵게 임원이 되더라도 55세 전후로 퇴사한다는 얘기다. H그룹 C부장은 “어딜 가나 승진에 욕심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 수나 정도가 과거에 비해 줄어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며 “‘기업의 꽃’으로 불리던 임원이 ‘고위직 계약직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임원 이력이 오히려 재취업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D그룹 H부장은 “최근 ‘찍퇴’ 대상이 된 임원이 하도급업체에 ‘부장 자리’라도 가겠다고 했는데, 하도급업체 회사 임원들이 ‘노동 유연성’을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며 “임원의 말로가 추풍낙엽이다 보니 부장들도 임원 승진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앞날은 암울한데, 현실은 팍팍하다. 한국의 부장들은 업무에서도 과부하를 호소한다. 현재의 부장들이 신입사원이던 시절, 그들의 눈에 비친 부장은 권한도 크고 재량권도 많았다. 부장의 넉넉한 업무추진비는 권위의 상징이었고, 회식 ‘명령’이 떨어지면 직원들은 파리떼처럼 부장 주변으로 달라붙었다. 하지만 회사 조직 체계가 팀제로 바뀌면서 부장은 책임질 일은 많아진 대신 결정권은 줄었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직장문화도 퇴색했다.

무한책임, 무차별 퇴출 오늘도 ‘生의 전쟁’ 중

한국의 부장들은 퇴직 압력 속에 ‘책임질 일은 많고 권한은 없다’며 우울증을 호소한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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