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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브렉시트 & 대처리즘

‘애매모호한 영국’ 안개 낀 늪에 빠지다

  • 이명재 | 아시아경제 논설위원

‘애매모호한 영국’ 안개 낀 늪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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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브렉시트 ‘분노 투표’ 예견한 영화들
  • ● ‘뭔지 모르지만 잘못된 방향’ 인식 확산
  • ● 혼돈과 방황 키워가는 ‘영국 딜레마’
‘애매모호한 영국’ 안개 낀 늪에 빠지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에서 탈퇴 표가 쏟아져 나온 지역 중엔 예전에 탄광이던 곳이 많았다. 그것은 일종의 ‘분노 투표’였다. 그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영화 몇 편이 있다.

코미디물 ‘풀 몬티(The Full Monty)’부터 보자. 1997년 작인 이 영화의 제목 ‘풀 몬티’는 영국 속어로 ‘홀딱 벗다’는 뜻이다.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 중년 남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제목 그대로 옷을 벗고 스트립쇼 무대에 서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남부 요크셔 주의 탄광이다.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라는 영화도 탄광을 배경으로 한다. 탄광 노동자의 아들 빌리가 발레리노가 되는 이야기인데, 강경 노조원이던 아버지가 아들을 무용학교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고 파업 대열에서 벗어나 조업에 참여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두 영화가 탄광과 광부들을 배경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탄광업은 영국에 매우 특별한 산업이다. 영국 제조업의 번영과 쇠퇴, 경제적 변천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산업이다. 영국 산업혁명의 동력을 제공한 주역이었으나 이제는 명맥만 근근이 유지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영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지하 탄광이 폐쇄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켈링리’라는 이름의 이 탄광은 영화 ‘풀 몬티’의 배경이 된 요크셔 주에 있다. 이곳에서 일해온 한 광부가 목이 멘 듯 하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52세의 이 광부는 탄광 폐쇄가 “한 시대의 종말”이라면서 “우리는 이번 주에 역사가 된다. 영국은 석탄 위에 세워졌다”고 했다. 자부심과 긍지, 그래서 그만큼의 비애가 담긴 말이다. 광부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실의와 좌절감, 그것이 이번 브렉시트 가결을 이끌어낸 주요인 중 하나였다.



‘영국 정신’ 위한 전쟁

탄광업의 몰락은 산업구조의 고도화, 탄소 배출 오염원이 되는 화석연료의 사용 축소 움직임 등이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흐름과는 다른 요인들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대영제국의 태동을 이끈 석탄산업이 정점을 찍은 것은 1910〜1920년대다. 당시 영국의 탄광업 종사자는 120만 명, 석탄 생산량은 2억9000만t(1913년)에 달했다. 그 후 석탄은 석유, 천연가스, 바이오연료 등 다른 자원에 자리를 내주며 쇠퇴해갔으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84년부터 1년간 이어진 마거릿 대처 정부의 탄광 폐쇄였다.

‘철의 여인’ 대처 총리가 밀어붙인 탄광산업 폐쇄에 맞선 탄광 노조는 완패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탄광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파업이 “미래를 위한 전쟁일 뿐 아니라 영국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권력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선 대처는 의회 연설에서 “광부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에 의한 통치’를 ‘폭도들에 의한 통치’에 양도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영국의 정신’을 ‘폭도’와 ‘적’으로 가차 없이 몰아붙인 것이다. ‘대처리즘’엔 그런 인식이 깔려 있었고, 이는 1980년대 이후 지난 30여 년간 영국 사회가 걸어온 신자유주의의 행로가 됐다.

영국 노동자들은 화가 많이 났다. 1996년에 개봉된 영화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도 영국 속어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뜻이다. 이 영화도 탄광촌이 배경이다. 가상의 북부 탄광촌에서 일자리를 잃게 된 광부들이 ‘브라스 밴드’를 통해 공동체의식과 희망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영국 산업의 몰락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탄광업이지만, 다른 제조업 노동자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번 국민투표 개표 직후 브렉시트 찬반 성향이 해당 선거구가 지닌 인구 구성의 특질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노동자층에서 60%가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했고 중부 공업지대에서 탈퇴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드러나 노동자들의 깊은 불만을 짐작게 했다.



‘현재’에 대한 거부감

‘내비게이터(The Navigators)’에서도 노동자들의 힘겨운 처지를 엿볼 수 있다. 리얼리즘 작가인 켄 로치 감독이 요크셔 지방의 철도건설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제목 ‘내비게이터(항해자)’는 19세기에 영국의 수로와 철도 공사에 동원된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민영화 과정에서 철도 노동자들에게 닥쳐온 현실이 험난한 파도를 헤쳐가는 항해와도 같다는 의미가 담겼다.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한 철도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민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근무 여건이 갈수록 열악해지면서 자신들에게 찾아든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차츰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머리와 함께 몸으로 오는 것이어서, 노동자들은 과중한 노동에 하나둘씩 병으로 스러지고 죽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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