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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특파원 리포트|‘잃어버린 10년’ 현장체험기

일본열도를 울린 야마이치증권 사장의 통곡

  • 권순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일본열도를 울린 야마이치증권 사장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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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일본 서점가에는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다룬 책들이 잇따라 선을 보였다. ‘잃어버린 10년’이란 2차대전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1980년대 말까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달려오던 일본이 급격히 추락한 1990년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들에서 일본의 각계 전문가들은 ‘전후 세계경제의 최우등생’이던 일본이 왜 90년대에 몰락했으며, 부활의 전략은 무엇인가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90년대 중에서도 97년부터 99년까지의 3년 간은 일본의 위기가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97년 본격화한 내수 침체와 금융 불안은 한때 ‘일본발 세계공황’의 우려까지 불러일으켰다. 엔화 가치와 주가의 동반폭락이 아시아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 경제위기는 공고해 보이던 하시모토 류타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오부치 게이조 정권을 탄생시켰다. 99년부터 일본경제가 다소 회복조짐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90년대 말의 3년 간은 한일관계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난 시기였다. 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양국 관계는 최소한 정부 차원에서는 ‘새로운 동반자 관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두 나라가 국민 차원에서도 진정한 우호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일 어업협정을 둘러싼 숨가쁜 줄다리기와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편입에 따른 경제위기도 이 기간에 있었다.

필자는 97년 2월 중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일을 시작했다. 우연히도 97년은 한일 양국의 경제위기가 본격화한 해였다. 이 때문에 전후 최악으로 불리는 90년대 말 일본 경제위기와 한일관계의 중대한 전환기를 다른 사람보다는 비교적 생생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렇게 특별한 기간에 일본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돌발변수가 없는 한 ‘초읽기’에 들어간 귀국을 앞두고 3년 간의 도쿄생활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려고 마음 먹게 됐다.

97년 11월 한 달의 특별한 의미

97년 11월은 일본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달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전후 일본경제를 지탱해왔던 금융시스템이 산사태처럼 무너져내린 시기였다. 이달 초 일본 상장증권사로는 처음으로 산요증권이 회사갱생법 적용(한국의 법정관리)을 통해 사실상 도산했다. 이어 100년의 역사를 자랑해온 홋카이도척식은행이 도시은행(시중은행) 중 최초로 무너졌다. 이 은행의 도산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1주일 뒤인 11월24일 일본 4대 증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증권이 경영난으로 자진폐업을 결정했다. 세 금융기관의 붕괴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깊숙이 파고들면 결국 80년대 거품경기 때 발생한 부실채권이나 자산 등의 거품 후유증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서 경영난이 악화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야마이치증권의 도산은 일본 금융구조를 뿌리채 뒤흔들 만큼 커다란 파문을 낳았다. 자진폐업 결정 당시 회사의 부채규모는 3조2000억엔(계열사 포함하면 6조3000억엔), 고객예탁금 규모는 23조9600억엔으로 전후 최대 규모의 도산이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등지에서도 야마이치증권 도산은 주요 신문의 1면 머릿기사와 방송의 헤드라인뉴스를 장식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일본 경제에 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커질 때였다. 야마이치증권 도산은 한국의 IMF 구제금융 신청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필자가 도쿄에서 일하는 동안 지겨울 정도로 자주 써야 했던 일본 경제 관련 시리즈기사를 처음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야마이치증권 도산을 떠올리면 지금도 한 장면이 뇌리에 선명하다. 11월24일 자진폐업 신청결정을 발표한 노자와 쇼헤이 사장의 기자회견 광경이다.

처음에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던 그는 “사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저를 포함한 경영진이 나빴습니다. 사원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7500명의 사원과 그 가족을 생각하면 괴롭고 미안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선량하고 능력있는 우리 직원들의 재취직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제발 도와주십시오”라며 울부짖었다. 물론 그런다고 그가 경영파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야마이치증권 사원 중에도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60세에 가까운 사나이가 직원들의 앞날을 부탁하며 통곡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찡했던 것도 사실이다.

야마이치중권 도산은 가뜩이나 불안 조짐을 보이던 엔화 가치와 닛케이주가를 동반폭락세로 몰아넣었다. 일본정부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자금을 투입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무디스를 비롯한 국제신용평가기관은 일본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기관의 신용등급을 낮춘다고 차례차례 발표했다. 98년에도 일본 금융불안은 국제사회의 핫이슈로 1년 내내 초미의 관심을 모았다.

일본 열도 엄습한 ‘하시모토 불황’

금융 불안과 함께 내수 침체에 따른 심각한 불황도 일본열도를 엄습했다. 내수 부진의 직접적 계기는 97년에 하시모토 내각이 취한 일련의 재정 재건정책. 하시모토 내각은 97년 4월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한 것을 비롯해 이 해에 보험료 본인 부담분 인상, 공공투자 축소 등의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90년대의 잇따른 경기부양책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하시모토 내각의 재정재건은 결국 대실패로 끝났지만 방향 자체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타이밍이었다.

여기서 잠시 90년대 일본경제의 궤적을 살펴보자. 일본의 90년대는 80년대 후반 거품경기의 붕괴로부터 시작됐다. 거품이 꺼지면서 90년 1월부터 3월까지 석달간 닛케이주가가 1만엔 가까이 급락했다. 같은 해 여름부터는 땅값도 급전직하했다. 이른바 ‘자산붕괴’의 신호탄이었다. 거품경기 속에 흥청댄 ‘파티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92년부터 ‘헤이세이(현재 일본 연호) 불황’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이 시작됐다. 일본정부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때인 92년 8월 10조7000억엔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불황 타파를 위한 적극적인 재정지출에 나섰다. 이에 힘입어 95∼96년 일본 경제는 회복조짐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95∼96년의 경기회복은 응급환자에게 앰풀주사를 놓아 잠시 기력을 되찾게 한 것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잠시 햇볕이 내리쬐는 ‘인디언 여름’과 같은 것이었는데도 일본은 겨울이 완전히 지난 것으로 착각했다.

거품경기 때 대출을 방만하게 했던 금융기관들은 거품경기 붕괴로 떠안은 부실채권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일본 국민들 역시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국민 부담을 늘리는 일련의 재정 재건정책은 소비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부와 금융기관 그리고 기업은 문제 해결을 미루기만 했다. 주가와 땅값이 다시 오를 것이라는 안이한 기대 때문이었다. 정부는 불황의 근본원인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적자국채에 의존하는 경기부양책을 잇따라 내놓아 재정적자만 늘렸다. 그나마 부양책은 정치권과 관료의 이해를 반영해 구태의연한 공공사업확대에 집중투입됐다. 정보통신산업과 생명공학, 환경산업 등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는 극히 미미했다.

더 큰 문제는 경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잘못된 상황판단이었다. 소비세율 인상으로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던 97년 7월 일본 경제기획청이 내놓은 ‘97년 경제백서’는 당시 일본 정부가 얼마나 상황을 잘못 보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제백서는 “일본경제는 90년대 초반 일본을 곤경에 몰아넣었던 거품경제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개인소비와 설비투자 등 민간주도에 의한 자율회복이 본격화했다”고 선언했다. 또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소비세율 인상 및 공공투자 억제로 경기회복 속도가 일시적으로 둔화하더라도 지속적 경제성장을 막을 만큼 큰 영향은 없다고 단언했다.

지나와서 생각해보면 엘리트 관료들이 어떻게 이런 엉터리 같은 분석을 했을까 의아할 정도지만 당시의 일본 분위기는 그랬다. 하시모토 총리는 금융불안과 내수침체가 누구의 눈에도 뚜렷하게 보였던 97년 10월까지도 “일본 경제의 문제점은 일시적이며 곧 회복 기조로 돌아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정 재건법률이 일본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금융불안이 극심했던 97년 11월이었다. 일본에서 ‘하시모토 불황’이란 말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경제실정으로 침몰한 하시모토 내각

필자는 이 과정을 취재하고 기사를 송고하는 과정에 많은 교훈을 얻었다. 우선 정책, 특히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명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정확한 상황 판단과 시기 선택이라는 점이다. 하시모토 총리는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소비세율 등을 인상했다. 그러나 결국 경기만 망친 것은 물론 98년 4월 16조6500억엔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아 재정적자를 더 늘렸다.

정부가 내놓는 관변자료의 한계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새삼 깨달았다. 일본 정부는 97년 경제백서 발표 후에도 계속 월례 경제보고서 등을 통해 일본 경제 침체는 일시적이며 곧 자율적 회복 기조에 접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한국보다 관료의 질이 높다는 일본이 이랬다. 일본 관료들보다 권력을 훨씬 더 의식하는 한국 관료나 관변연구소의 경우 그 위험성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최근 3년간 도쿄에서 송고한 기사 스크랩을 정리하다 97년 일본 경제백서를 소개한 기사를 보면서 앞으로 기자생활에 뼈아픈 교훈으로 삼을 것을 다짐했다.

98년 7월12월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참패했다. 참의원 정원 252명중 절반인 126명을 새로 뽑은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44석을 얻는데 그쳤다. 교체대상 의석 중 선거전에 보유한 61석과 비교해도 17석이나 줄어들었다. 참의원 전체 의석으로 따지면 자민당은 선거전 119석에서 102석으로 격감했다. 임기를 1년2개월 남겨 놓고 있던 하시모토 총리는 선거에 파하자 책임을 지고 전격사퇴했다.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던 당일만 해도 자민당 참패와 하시모토 퇴진을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경기침체와 금융불안이 가중되긴 했지만 권력에 순종적이고 변화를 본능적으로 꺼리는 일본 국민의 보수적 성향을 감안하면 교체대상 의석 중 최소한 60석 이상, 많으면 절반 이상을 획득하리라던 것이 일본 언론의 지배적 관측이었다. 그러나 투표가 끝난 밤 8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각 방송이 출구조사를 통해 예상한 선거결과는 ‘국민의 반란’을 예고했다. 많은 일본 국민이 “하시모토 내각의 경제실정(失政)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야당에 표를 몰아달라”는 민주당과 공산당 등 야당에 몰표를 던졌다. 사회당(현 사민당)이 선풍을 일으킨 88년 참의원 선거에 견줄 만한 이변이었다.

야당의 선전과 자민당의 참패를 불러온 또다른 요인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투표율이었다. 하시모토 내각에 불만을 느낀 부동층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가면서 투표율은 3년 전 실시한 참의원 선거 때보다 14%포인트 이상 높아져 58.8%에 이르렀다.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이용해 고정표로 승리를 거두려던 자민당의 선거전략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하시모토는 최종 개표결과가 나오기도 전인 7월13일 새벽 선거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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