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중국의 부상, 미국의 견제, 한국의 딜레마

  • 정재호·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입력2006-08-11 0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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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 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14일 밤늦게 두 정상이 전격적으로 합의한 남북공동선언은 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시켰으며 향후 남북한의 긴장완화와 관계개선, 북한의 개혁과 개방, 그리고 더 넓게는 동북아 국제정치구도의 획기적인 전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남북한 정상간의 합의사항 제1항의 내용이 ‘자주’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 관계정상화 그리고 더 나아가 분단해소 및 통일 성취라는 목표 뒤에는 주변국들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역사성과 구조가 존재한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비밀방문한 것이라든지, 남북정상회담 직후 미국의 국방장관이 한반도 통일후에도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 필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긴급 방한한 것 등을 그 단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98년 말에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민화협)에서 행한 ‘국민 통일의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북통일의 장애요인으로 남북간 체제 차이(34%)와 남북간 경제격차(21%) 다음으로 주변강국의 이해관계(16%)를 든 응답자가 많아 한국 국민 사이에도 이에 대한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간의 긴장완화, 교류확대 그리고 궁극적으로 통일을 위한 작업들이 순조롭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주변국가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가 필요하며, 최소한 이들이 적극적인 반대세력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한국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안보를 확보하면서도 주변국에 비위협적일 수 있으며 또한 동북아에서 어떻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한국이 (가능하면 북한도) 주변국들에 설득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자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설득의 대상은 한반도 주변 4강일 것이며 그중에서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설득의 효용은 친화적인 관계의 지속에서 극대화된다고 볼 때, 설득의 주체인 한국이 미국과 중국 양자에 대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중국의 등장’(the rise of China 또는 中國的起)이라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향후 미·중관계에 있어서 ‘중국위협론’과 등치되면서, 미국과 군사동맹 구조로 묶여 있는 한국에 매우 심각한 정책 딜레마를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미·중관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공통관심지역 중의 하나인 한국(다른 하나는 대만)이 미·중관계의 변화에 따라 겪게 될지도 모르는 딜레마와 한국이 채택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적 대안 및 그 각각의 유용성을 따져 본다.

    미·중관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아마도 향후 중국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는가일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아시아 및 대중 정책의 기조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천안문 유혈진압 사건이 CNN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됐을 때, 그리고 동·서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공산주의의 종말이 선언됐을 때, 중국은 소위 ‘중국붕괴론’ 또는 ‘중국분열론’이라는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시기에 미국 또한 소위 ‘동아시아 전략 구상’(East Asia Strategy Initiative, EASI)의 기조에 따라 3만명에 이르는 미군 철수 등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대아시아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소위 ‘중국부상론’ 또는 ‘중국위협론’이라는 또 다른 극단적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이러한 중국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기반하여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또한 변했다. ‘동아시아 전략보고서’(East Asia Strategy Report, EASR)와 ‘4년주기 국방정책 평가’(Quadrennial Defense Review, QDR)에서부터 최근에 작성 공개된 ‘조인트 비전 2020’(Joint Vision 2020)과 ‘아시아 2025’(Asia 2025)를 살펴보면 미국의 점증하는 대아시아 관심과 중국에 대한 경계 및 견제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우선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개념적인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중국의 등장은 이제 명확한 사실로서 (특히 동아시아의 맥락에서는) 더 이상 가상적인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흔히 중국의 등장을 ‘중국위협론’과 등치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반드시 위협적인 세력의 형성으로 간주하는 주장들의 편향성 문제와 그 잠재적인 위험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우선 ‘중국분열론’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하자.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진영에서 널리 회자됐으며 지금도 그 위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향후 10~20년 안에 정권 주체로서의 공산당 소멸이 아닌 중국이라는 국가의 붕괴 또는 분열은 그리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중국분열론이 1990년대 들어 대두됐던 가장 큰 이유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소련의 붕괴에 이은 독립국가연합 출범의 충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을 구소련과 단순비교함으로써 붕괴와 분열이라는 결말을 예상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잘못이라고 하겠다.

    먼저 구소련이 가졌던 소수민족 문제는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구소련의 경우 최대 인종집단인 러시아인이 전체인구에서 차지한 비중은 1989년에 81.5%에 불과했으며(이 통계 자체가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는 논란도 있음), 소수민족들이 지역에 따라 최대 민족집단을 이루고 있는 곳 또한 적지 않았다. 1989년 통계에 따르면 21개 공화국, 11개 자치오크루그와 49개 오브라스트 중에 러시안의 인구비중이 50%가 채 되지 않는 곳이 무려 13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중국의 경우 전체인구에서 소수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8%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소수민족의 비중이 전체인구의 50%를 넘는 곳은 32개 성급단위 중에서 티베트와 신강 등에 불과하다.

    또한 구소련에는 국가통합의 역사가 채 100년이 안되는 지역이 많았지만 중국은 극소수의 변경지역을 제외하면 그 통합의 역사가 짧게는 300여 년, 길게는 (中原의 경우) 1000년을 넘을 만큼 중국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중국분열론은 가능성 낮아

    구소련과의 체제비교적 시각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분열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분열과 왕조의 변혁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첫째 조건은 농민 봉기다. 이는 조정(즉 국가)의 정통성 및 통제능력 약화와 큰 상관관계가 있다.

    개혁 초기 호별영농정책의 성공적인 시행으로 개혁의 최대수혜자가 되는 듯했던 농민들은 1985년 이후 정부정책의 초점이 도시개혁과 연해개방으로 옮겨가면서 지속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왔다. 1990년대 들어 농촌에서의 과도한 세금이 심각한 문제로 야기되고, 여러 지역에 걸쳐 농민들의 기층정부에 대한 산발적인 저항과 봉기가 일어났다. 널리 알려진 사천성 인수현 봉기에서 보듯이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은 상당히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농촌에서의 불만과 저항이 국가로서의 중국을 붕괴 또는 분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농민의 불만이 ‘필요조건’이라면 그들의 저항이 다양한 지역에 걸쳐 충분한 힘을 갖춘 무장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충분조건’일텐데, 현재 중국의 농촌 상황을 볼 때 그 정도의 움직임은 용납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19세기 중엽 청조를 뒤흔들었던 태평천국의 난처럼 여러 지역 농민을 하나의 응집된 저항세력으로 묶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의 농촌 전파에 대해 중국정부가 극히 예민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면 대규모 농민봉기 가능성을 아주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국농민연합회 등과 같은 기능조직의 설립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중국 농민의 전국적 봉기는 단·중기적으로 그리 현실성이 없어보인다.

    역사적 관점에서 연상되는 중국분열의 두 번째 조건은 지방 군벌의 대두라고 하겠다. 이 또한 현 상황에서 그리 큰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청조의 몰락이 결국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지방 호족의 사병 양성을 허용한 데서 시작했다고 본다면, 개혁기 중국의 현 상황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1978년 이후 획기적인 분권화 조치로 인해 중국의 각급 지방정부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자율성을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율성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경제영역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중앙정부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국가통제 밖의 무장세력의 존재를 상정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중앙의 대군부 통제라고 하겠다. 정부 및 당의 행정편제상 지방의 최상급단위는 성(4개 직할시 및 5개 소수민족자치구 포함)이지만, 인민해방군의 편제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산하로 성급보다 상위조직인 일곱 개의 대군구가 있으며 그 하부에 성군구가 설치돼 있다. 지방행정 편제와 군지휘체계가 서로 맞물리지 않도록 조직돼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병력 이동과 작전에 대한 결정 권한 또한 극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개대대 규모 이상의 병력이동은 반드시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전승인이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개대대 병력이 발휘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를 감안하면 단·중기적으로 지방군벌의 등장이나 지방에서의 군사적 하극상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시나리오라고 하겠다.

    역사적으로 중국 분열을 초래했던 세 번째 조건은 외세의 침입이었다. 19세기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열강의 침탈이 없었더라면 청조의 몰락은 훨씬 더 미뤄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의 대외환경은 어떠한가?

    1949년 이후 중국의 대외환경이 지금처럼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때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 이후 전방위 대외개방과 선린우호정책 시행 결과로 중국은 대만과 국교를 유지하고 있는 20여개 나라들을 제외한 160여개 나라들과 수교했다. 그중 미국, 한국, 이스라엘, 싱가포르, 남아공,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포함한 56개국과는 1978년 이후에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이에 더해 1960년대부터 자력으로 다져온 국방력 (핵억제력 포함) 강화와 홍콩 및 마카오의 주권회귀를 통하여 중국은 최근 들어 대외관계에 한결 자신감 을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의 분열은 단·중기적으로 현실성이 그리 높지 않은 시나리오라고 하겠다. 물론 앞으로 민주화의 고통, 법륜공과 같은 신(新)전통주의적인 도전, 농민공(農民工) 실업 문제, 국유기업 개혁과 서부대개발 등 지속적 문제들이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점에서 ‘중국 분열론’에 대한 가장 큰 반증은 무엇보다도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중국위협론’ 그 자체라고 하겠다.

    ‘중국의 등장’과 ‘중국위협론’

    중국의 등장이 가상 시나리오라기 보다는 이미 상당 부분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 대륙국가의 경우, 그것도 특히 대외연계가 극히 또는 비교적 적은 사회주의 국가는 내부적인 발전 및 자체 성장의 속도와 폭을 밖에서 인위적으로 크게 변화시키거나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현재 중국의 국민총생산에서 대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34%에 달한다는 사실을 들어 중국의 대외의존도를 지적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 그 비중이 1994년의 45%와 1997년의 37%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간과한 평가다. 즉 중국 국내시장의 구매력이 커지면서 ‘도약기’에 두드러졌던 대외의존도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미국과 소련의 적극적인 방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1964년 핵무기 자체개발에 성공했으며 1979년 이후에도 경제개혁과 개방의 속도 및 폭의 조절을 통해 - 서방에 의한 인권이나 다른 이슈들과 연계된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 지속적인 고성장을 이루어 왔다.

    둘째, 1979년 이후 20년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의 연평균 실질 성장률이 10%에 다다른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일정 부분 과다계상한 결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7∼7.5%로 하향 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같은 기간 세계평균 GDP 성장률의 두 배 이상이다. 12억500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 많은 인구가 경제발전의 자산이 아닌 부담으로 작용하는 조건하에서 - 이러한 고성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것은, 그동안 인도나 러시아의 경제가 처했던 상황과 비교할 때 더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것이다.

    구매력환산 기준(PPP)으로 중국은 이미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경제총량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의 연구뿐 아니라 중국 국무원 산하 발전연구중심의 내부보고서에 실린 자체 예측에 따르더라도 이르면 2020년, 늦어도 2030년경이면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에 버금가거나 초월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중국은 이미 국제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와 G8+1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토의 유고 공습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는 유엔안보리의 사전 동의없는 군사행동이 결코 실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1999년 안보리 결의사항 1244호의 서문 첫단락에 넣게 된 것도 중국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특히 그 영역을 아시아로 제한할 경우 중국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핵심적이다. 홍콩 대만 동남아를 엮는 ‘죽의 연계’(bamboo networks) 뿐만 아니라 양안관계·남사군도·조어도·ARF 등에서 중국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 ‘두샨베 선언’을 통해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 3국 간에 결성된 소위 S-5 (Shanghai Five), 최근의 동아시아 금융위기에서 보여준 중국의 (인민폐 절하 거부와 관련한) 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4자회담 참여 결정을 통해 한반도 문제 해결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상에서 볼 때 중국의 등장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등장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이렇게 등장한 “중국이 과연 위협인가”라는 질문에 집중된다. 이 질문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크게 두 개의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부상’하는 중국은 위협적인 세력일 수밖에 없기에 반드시 ‘봉쇄’(containment)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중국이 봉쇄보다는 ‘개입과 교류’(engagement)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논의 대부분이 봉쇄 또는 교류 주체인 ‘우리’(미국을 위시한 서방으로서의 ‘we’)와 항상 그 객체로서의 ‘그들’(중국을 의미하는 ‘they’)을 상정하는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이 과연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을 채용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중국의 부상’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이루어진 학술회의는 별로 없었으며 공식적인 논쟁 또한 없었다. ‘중국의 등장’과 관련하여 발표자 모두가 한국학자들로 이뤄진 회의에서도 한국적 함의와 이에 대한 우리 나름의 전략적 대안에 대한 제안이나 평가는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중국의 부상’에 대한 논의 거의 모두가 영어로 번역하면 서방학자들의 논의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할 만큼 서방의 관점을 그대로 빼닮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포괄적 포용정책’, 다극화, 중국의 Su-27, 동풍-41, SSBN, 항공모함, 공중급유능력 등이 중국의 부상과 관련해 한국에서 바라볼 때 왜 중요한지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맥락에서 중형국가(中型國家)로서 한국이 가져야 할 시각이 과연 미국이나 강대국들의 시각과 동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이 우선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빠른 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위협으로 작동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작업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능력, 의지, 인식이 그것이다.

    우선 능력(capabilities) 부분은 앞에서도 논의했다시피 중국의 고성장이 상당기간 지속되기만 한다면 그 증가하는 재원중 부분적인 투자를 통하여 충분한 방어력 및 투사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성장 속도가 늦춰진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동원체제인 중국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능력, 의지, 인식

    중요한 것은 의지(will) 부분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은 상당히 독특한 유형과 행태를 통하여 주변국들에 자신의 힘을 투사해왔다. 예를 들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맞았을 경우 그냥 쉽게 물러나서 대국으로서의 ‘체면’(面子)을 손상시키기보다는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맞붙어 저항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이후 1년여 만에, 핵을 보유한 초강대국 미국과 국제연합을 상대로 6·25전쟁에 참전한 것은 이러한 행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당시 중국은 사천과 티베트에서 국민당과 내전을 계속하고 있었고, 수백%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9년 문화대혁명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핵무기 사용위협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군사충돌을 주저하지 않았던 진보도(珍寶島 Damansky Island) 사건 또한 중국의 독특한 행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반면에 비교적 수월한 상대에 대하여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후 상당한 수준의 절제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1962년 10월 인도와의 국경분쟁과 관련한 군사충돌의 경우 인민해방군은 인도군에 확실한 우위를 보인 후 중국이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경계선까지 일방적으로 후퇴하고 정전을 선언한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많은 중국문헌들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제한적인 무력사용 방법과 행태가 반드시 중국이 가진 ‘인덕형(仁德型)의 전략문화’를 의미한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강한 중국은 곧 위협’이라는 등식에 대하여 우리는 좀더 비교적이며 역사적인 시각을 도입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시간 대학의 전쟁원인연구그룹이 작성한 대규모 데이터를 사용하여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 하버드대학 존스톤(Alastair I. Johnston) 교수의 실증적인 연구에 따르면, 중국은 영토분쟁과 관련한 경우에 가장 빈번히 무력을 사용하였으며 자신에게 맞는 국제적인 위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군사분쟁에 개입한 경우도 많았다. 보다 중요하게는 전반적으로 국력의 획기적인 증대에도 불구하고 개혁기(특히 1990년대)에 들어 - 개혁, 개방의 성공과 함께 자신감과 국제적 위상이 제고되면서 - 중국의 군사분쟁 개입 빈도가 상대적으로 현저히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상당기간에 걸쳐 성장과 발전의 여지가 많은 중국이 나름대로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기도 전에 임의로 중국은 위협적일 것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어쩌면 서방국가들이 자신들의 근대국가 형성시기에 대한 기억을 중국에 무차별적으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인식(perceptions)의 측면이다. 곧 중국의 ‘(비)위협적’인 행태가 모두에게 똑같이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정학적, 역사적, 문화적인 변수들에 의하여 중국에 대한 인식이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 또 양자관계의 다양한 요인들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이기에 중국에 대한 획일적인 이미지 부여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더구나 우리 나름의 잘 맞는 ‘렌즈’를 갖추지 못한 채 중국의 미래에 대한 그림을 외부에서 주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어느모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중관계의 발전 그리고 한·미관계에 대한 도전

    최소한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중국은 이미 등장하였으며 또 등장한 중국이 반드시 위협이 아닐 수도 있다면, 한국에 있어서 과연 중국은 어떠한 존재인가? 그리고 이 시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가까워진 한·중관계가 한·미관계에 던지는 질문들은 무엇인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지난 20여 년간, 특히 1992년 8월24일 양국의 수교 이후 급속도로 발전했다. 우선 1950년대 이후 근 30년간 적대적이거나 상호 무관심 또는 무정책으로 특징지워졌던 양국 관계를 수교로까지 이어지게 했던 경제관계를 살펴보자.

    한·중교역은 1979년 홍콩, 싱가포르나 동경을 경유한 간접교역 1900만 달러에서 18년 만인 1997년에는 무려 1249배 증가한 237억 달러에 이르렀다. 수교 이전인 1991년에 이미 58억달러의 교역규모를 이루었던 것을 볼 때, 한·중 경제관계는 그 시작부터가 상당히 특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금융위기 영향으로 1982년 이후 한·중 교역규모가 처음으로 감소했던 1998년에도 양국은 서로 제3대 교역국의 자리를 지켰으며, 1999년에는 225억 달러 규모의 교역이 이루어져 1997년 수준을 거의 회복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92년의 수교 이후 한국은 지속적으로 대중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규모 또한 1998년에 54억 달러, 1999년에는 48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해외투자에 있어서도 그 실제 투자액 기준으로 65억 달러가 투자된 미국 다음의 제2 투자대상국이 중국(41억 달러 이상)이다. 한국의 대미 투자는 시기적 제한이 없었으나 대중 직접투자는 1988년 이후에야 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중국 투자의 급속한 성장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한국은 중국의 해외투자 제7대 대상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 중국이 갖는 정치, 외교적인 함의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중국은 한반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고 또 적지 않게 개입하고 관여해 왔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이 그러했고,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 그러했다. 또한 중국이 종래의 남북한을 지칭하는 ‘당사자 해결원칙’의 견지로부터 일정부분 벗어나 정전협정 당사자 자격으로 1997년 4자회담에 참여한 것을 보면 동북아지역 그리고 한반도에서 급증하는 중국의 영향력을 느낄 수가 있다.

    더구나 중국이 소지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상당한 수준의 대북한 영향력은 중국의 정치, 외교적인 힘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이 저간의 경제위기를 그나마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바로 중국에 의한 식량 및 에너지 무상원조 또는 ‘우의가격(友誼價格)’에 의한 유상제공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지원이 실제로 어떠한 상황 하에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구체적인 영향력으로 전환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나라도 북한에 대해 중국과 같은 잠재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1994년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막기 위하여 식량지원을 잠정 중단했으며 이것이 바로 지난 몇 년간의 북한 경제위기를 만들어낸 주요 배경이라고 한다. 이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1993~95년에 중국의 대북한 식량수출량이 중국내 식량수급사정으로 인하여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이 기간에도 수만t의 무상 식량원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북한의 경제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또 극복하게 도울 수도 있는 가장 핵심적인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필자가 이번 여름 북경을 방문하여 유력한 한 중국인사와 나누었던 대화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중·북관계가 악화된 시점이 1992년, 즉 한·중수교 시점이 아니라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임을 지적한다. 이는 중국의 대북한 실험이 김일성 생존시보다 더 자유로워진 것과 관련된 것일 수 있다는 논평이다. 이에 대하여 이 인사의 반응은 한마디로 “북한이 중국의 개혁, 개방을 매도할 때에도 중국은 일관되게 북한을 인도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를 평양당국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직전 김정일 비밀방중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의 남북정상회담 성사 배경과 관련한 일련의 ‘중국역할론’에 대한 것이다. 남북비밀협상 장소가 싱가포르 이외에는 대부분이 중국(상해와 북경)이었던 점, 3월 김정일의 평양주재 중국대사관 전격방문시 강택민의 측근이자 정치국원인 상하이(上海)시 당서기 황쥐(黃菊)와 비밀회담설, 남북정상회담 설명시 종래의 관행과는 달리 미국에는 외교부 차관이 가는 대신 중국에는 장관이 갔던 점, 정상회담을 2주일 남기고 김정일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던 사실, 김정일이 중국을 떠난 직후 중국이 4억 달러 규모의 대북한 식량 및 에너지 추가지원을 밝힌 점, 정상회담 직전인 6월 3~8일 황쥐가 한국에 있었던 점 등 여러 가지 사실과 가설들이 혼합되어 중국역할론에 대해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이렇게 한국에 있어 중국의 의미가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크다면 미·중관계의 변화추이에 따라 한국은 매우 심각한 정책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중관계가 원만하고 순조롭다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도 그리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만일 미·중관계가 심각한 갈등 국면으로 치닫게 될 경우 한국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우선 1999년 코소보사태 와중에 중국대사관이 미전투기에 피폭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 정부는 당장 이것이 예정되어 있던 4자회담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미·중 갈등이 극한 대립과 분쟁의 수준까지 이르게 되면 미국과 공식적인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의 경우 실질적인 ‘중립’이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가령 미국이 중국과의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 한국의 명확한 입장표명이나 군사지원을 요구할 경우 현재의 동맹구조 하에서 이를 거부할 명분이나 능력이 있을 것인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항에 따르면 태평양지역에서 한국과 미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했을 때 양국은 서로에 대한 방위의무를 지게 되는데, 만일 대만해협에서 미·중 군사분쟁이 발생하여 미국이 한국의 지원을 요청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측 요구를 그냥 수용할 만큼 한·중간의 다양하고도 호혜적인 이해관계는 쉽게 무시될 수 있는 수준인가?

    1998년 11월 김대중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양국간에는 ‘21세기를 향한 협력동반자관계’의 구축이 합의, 천명되었다. 중국측의 공식적인 해석에 따르면 ‘동반자관계’란 서로 적대하지 않으며 또 위험을 나누어 겪는(互不爲敵 同當風險) 협력관계를 의미한다. 특히 한·중 동반자관계에 대하여 상호 근본적인 이해충돌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미·중의 갈등시 한국의 딜레마는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성격을 갖는다고 하겠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자체적인 논의와 진지한 공론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대미, 대중인식의 양면성

    한국에서 외교 및 국제관계에 대한 공론화가 부족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국제정치적 이슈들이 일반 국민들에게 그리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특정국가나 외교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는지 여부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의 대일정책은 오히려 이의 예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한국 국민들이 미국과 중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고려와 검토는 미·중관계와 한국의 선택이라는 향후 가장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물론 일반대중의 대외인식은 상당 부분 엘리트와 다른 경우가 많으며, 이는 꼭 한국적인 상황만은 아니라 할 것이다. 1988년부터 2000년 상반기까지 13년 동안에 한국에서 이루어진 20여건의 국민의식에 관한 설문조사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추세와 함의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대미 호감도가 점점 줄어드는 반면, 대중 호감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중앙일보’(1998년 8월24일자)는 1965년 주한 미 공보원의 여론조사에서부터 90년대의 자체조사까지 두루 분석한 결과 대미 호감도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해왔음을 보도하였다. 반면에 한국인의 대중 호감도는 90년대 들어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다.

    둘째로는 연령에 따라 큰 격차를 보이는 대미 인식과 그와 정반대의 방향성을 보이는 대중 인식을 들 수 있겠다. 이는 96~98년 기간에 스탠포드대학에서 이루어진 다국간 협력연구인 ‘변화하는 동북아에서의 미·일동맹과 한·미동맹’ (America’s Alliances with Japan and Korea in a Changing Northeast Asia)에서 필자가 88~97년 기간의 여론조사를 분석해서 얻은 결과다. 대미 인식의 경우 그 호감도는 주로 연령과 비례하는데 젊은 층일수록 미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다른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면 이들 젊은 층이 핵심세대가 되는 미래에 한·미관계가 일정부분 염려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에 대중 인식의 경우, 연령 변수에 의한 영향력이 작을 뿐 아니라 50년 전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적대국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전반적인 호감도를 보여주고 있다. 더 특기할 것은 대미 인식과 비교하여 대중 인식은 나이와 거의 무관하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보처에서 1996년에 시행했던 대국민 의식조사에 의하면 10년 후 (2006년) 한국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나라로, 응답자중 20대의 19.3%와 50대 및 그 이상의 32.1%가 미국을 고른 반면에 20대 응답자의 47%와 50대 및 그 이상의 41%는 중국을 선택하였다. 1997년에 세종연구소에서 행한 의식조사에서도 주변 4강에 대한 관계설정과 관련하여 대미관계 강화가 필요하다고 한 응답자는 전체의 31%에 불과했던 반면 대중관계 강화를 선택한 사람들은 무려 56%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1999년 1월1일자)가 ‘리서치 · 리서치’에 의뢰하여 시행했던 의식조사를 보자. “21세기에 한국이 가장 가까이해야 할 국가는?”이라는 설문에 대하여 중국을 선택한 응답자는 33%였으나 미국을 고른 응답자는 22%에 불과했다. 또 ‘한국일보’가 미디어리서치를 통해 실시한 의식조사(2000년 6월9일자)에서는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하여 협력을 유지해야 할 국가는?”이라는 설문에 중국과 미국을 선택한 응답자의 비율이 45% 대 43%로 나타났다.

    전반적인 대미 호감도 감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주한미군에 대하여는 그 필요성을 상당히 인정하는 양면성을 나타내고 있다. 89~97년의 기간에 서울대학교 인구발전연구소와 세종연구소가 각각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반미감정이 상당히 고조되었던 88~89년의 경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비율이 응답자의 75%와 71%에 이르렀으나, 그 이후 대미 호감도의 지속적인 감소에도 불구하고 1990년에는 60%, 52%였고, 95~97년에는 46%, 38%로 감소하고 반대로 현행 유지를 선호하는 응답자의 비율은 높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결과에는 여러 가지 고려가 있을 것이다. 1997년 세종연구소가 행했던 의식조사에서 한국의 외교정책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핵심목표 중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일본의 군사대국화 방지’(91.1%)를 선택한 것을 감안한다면 주한미군의 기능에 대한 다방면의 고려가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북한의 위협과 경제적 고려 또한 핵심적인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일반인과 엘리트의 대중인식 격차

    한국인의 대중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한국의 대중 그리고 대미관계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대중인식이 긍정적으로 높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양면성의 배경에는 우선 중국의 ‘비공민성(非公民性)’(uncivility를 구태여 번역하자면)과 연관된 부분을 들 수 있다. 즉 중국어선단의 한국 영해 및 조업구역에 대한 빈번한 침범, 중국 대기 및 수질오염의 한국 전파, 최근 ‘마늘분쟁’에서 보인 중국의 행태 등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인권 영역에서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의 평가와는 달리 ‘탈북자’(escapees)는 있어도 ‘난민’(refugees)은 없다는, 한국 관점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을 단호히 견지하는 중국 태도를 들 수 있다.

    또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대중인식의 양면성 한가운데에는 떠오르는 중국이 과연 한국에 친근한 이웃으로 남을 것인가라는 의문점이 있다. 만일 새로이 등장하는 중국이 호전적인 강국이라고 상정될 경우 이는 곧 경계와 견제의 대상이다. 곧 미국과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 또는 새로운 위상 설정이 필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등장하는 중국이 호전적이며 위협적인 국가일 것인가라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있어서 한국인 대중들과 엘리트 사이에 적지 않은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엘리트-대중 간 인식의 괴리는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동경대를 거쳐 현재 쯔쿠바대학에 재직중인 사토 히데오(佐藤英夫) 교수는 98년의 연구에서 일본의 경우 엘리트보다는 대중들의 중국 인식이 훨씬 부정적이라는 것을 밝혔다. 99년 10월에 발표된 ‘미국인들이 바라본 아시아’(Americans Look at Asia)라는 보고서에서도 엘리트보다는 대중들의 중국 인식이 훨씬 부정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엘리트보다는 대중들의 중국 인식이 훨씬 긍정적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존재하는지 쉽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국민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정책결정의 책임을 엘리트들이 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냉전적 사고 등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때다.

    남북정상회담이 미·중관계를 바꾸어 놓은 것은 없다. 미·중관계의 핵심 현안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변화된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남북정상회담 성사 이후 한국에서 체감되는 미국과 중국에 대한 느낌이 변하고 있고, ‘자주’와 ‘통일’이 강조되면서 미국과 중국이 한국에 대하여 쏟아내는 키워드들이 예전보다는 훨씬 선명하게 비교되는 것일 뿐이다.

    사실 공식적으로는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한 주변 4강 모두가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지지해왔고 미국과 중국의 경우에는 대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평화(peace, 和平)와 안정 (stability, 穩定)이라는 핵심어까지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협상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쟁하는 두 행위자 사이에서 제3자도 최소한의 잠재적인 이익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이들 4강이 실제로 남북한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도 대놓고 이를 반박하기 어려울 뿐이다.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미국과 중국이 언급하는 ‘안정’이라는 개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미국과 중국 모두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바라지만 현상태 유지가 양자 중 누구의 영향력 하에서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해석에 따라 ‘안정’의 뜻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남북정상회담 성사 이후 자주와 통일이 부쩍 강조되면서 중국이 그동안 견지해왔던 군대의 제3국 불파견 및 불주둔 원칙과 맞물려 주한미군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최근 매향리 사건과 같은 일련의 일들과 연계되어 있는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행정협정(SOFA) 개정과도 맞물려서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1990년대 중반 소위 ‘나이(Nye) 이니셔티브’ 이후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과 영향력 유지라는 기조하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기존 동맹관계 강화와 중국에 대한 견제로 그 구체적인 조항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주일미군을 포함하여)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하여 곧바로 미·중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중국의 주한미군에 대한 인식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공적인 입장과 사적인 이해의 개념으로 분리, 진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적인 입장이란 곧 제3국 군대 파견 및 주둔에 대한 중국의 일관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주권국가인 한국과 미국 사이에 정책선택으로서의 주한미군 주둔은 “그 행위의 대상이 제3국에 미치지 않는 한” 양해될 수도 있다는 입장에 가까운 것이었다.

    반면에 필자의 다년간에 걸친 중국에서의 인터뷰 경험에 기반하여 사적인 이해의 내용을 기술해보면, 주한미군이 남북한간의 군사분쟁 - 특히 북측의 도발 - 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하는 것으로 중국측도 평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주일미군의 주둔명분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으며 만일 주일미군이 철수하게 될 경우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앞당길 수도 있다는 시각으로 중국측은 미군 기능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통일 이전 시기의 주한미군 주둔에 대하여는 중국의 사적인 이해가 상당 부분 작용할 수도 있겠으나, 그 이후 시기까지 이 논리를 확대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여러모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기조가 중국 견제에 맞추어지고 이에 따라 한·미 및 미·일동맹의 기능이 재조정될 경우, 주한미군은 한국에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남북한이 통일되어 주한미군의 주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동북아에서 소위 ‘균형자’(balancer)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때, 그 균형의 주된 대상으로 중국이 상정될 경우 또한 한국은 매우 심각한 딜레마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겪게 될 이러한 딜레마를 중국은 잘 알고 있으며 기회가 닿는대로 이를 공적으로 사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그림 그려야

    그러나 급속도로 그리고 획기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동북아와 한반도의 전략상황에 비하여 한국의 여론 주도층과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미국의 ‘균형자’론은 지나치게 일반론이거나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다. 한국이 중국과의 이해관계가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진공론’이나 ‘원교근공론’과 같은 일반론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그림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국 쪽에서 한국내의 합의에 기반한 ‘공적(公的)’인 전략’ 수립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지속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역내에 일정 부분 갈등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 전역미사일방어나 국가미사일방어계획 등이 북한이라는 행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향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또한 기존 동맹관계를 유지 및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적대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유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중이 협력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일본이 작동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미관계의 전략적 현안 중 하나가 일본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경우, 과연 한국은 어느 쪽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동맹관계에는 파트너를 돕지 않고 방치하는 ‘포기’(abandonment)의 위험성이 큰 경우와 파트너 사이의 지나친 신뢰와 개입으로 분쟁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연루’(entrapment)의 위험성이 큰 경우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위험은 반비례하기 마련이다.

    중국의 부상과 한국의 대응

    한·미동맹의 경우 현재 상황을 감안할 때, 이 두 가지 위험이 반비례하기보다는 오히려 병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199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통하여 일본의 전략적 위상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미·일방위지침개정안에 따라 자위대의 한국 인접수역 지원업무가 가능해지는 등 (과연 실제 전쟁상황에서 전투성과 비전투성의 구분이 그리 간단할 것인지도 불확실함) 한국의 장기적인 전략적 이익이 ‘포기’될 수도 있다. 또한 현재 상태로는 점차 강화되고 있는 미·일 안보협력망에 속할 수밖에 없는 한국으로서는 미·중간의 갈등 및 견제로 인해 원치 않는 분쟁에 빨려 들어가는 ‘연루’의 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최근 여러 경로를 통해 보도된 북한의 미군주둔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이 어디까지 전략적인 것이며 또 어디까지가 전술적인 것인지도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한국 자체 판단으로 북한이 안보 위협으로 상존하는 한, 그리고 신뢰구축에 있어서 그 투명성이 떨어질 경우, 특히 현재와 같은 상황 - 비대칭 군비전략의 강화와 단기전격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이 건재하며 또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력만으로 확실한 대북우세 확보가 어렵고 또 지상군 위주로 군 전력이 짜인 가운데 - 에서는 주한미군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고 할 것이다. 다만 향후 제반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의 유지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한·미 동맹관계가 현재처럼 유지되며 최소한 통일 이전까지는 미군 주둔이 확실하고 또 필요한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는 과연 어떠한 전략적 선택들이 존재하는가? 대략 일곱 가지 대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예방전(preventive wars) (2)단절(distancing) (3)속박(binding) (4)균형/봉쇄 (balancing/containment) (5)개입/교류 (engagement) (6)양다리 걸치기(hedging) (7)편승(bandwagoning)이 그것이다. 이들 각각의 유용성을 한번 짚어보자.

    첫째, 한국은 중국의 떠오름을 저지하기 위하여 예방전을 펼칠 필요도, 또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첫째 대안은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 다만 앞에서도 여러번 강조했듯이 다른 나라가 중국의 떠오름을 저지 또는 제약하기 위해 예방전을 벌일 경우 그에 ‘연루’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둘째, 지금과 같이 극히 호혜적인 대규모 교역과 투자 및 다방면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상황에 한·중관계 단절 또는 격하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총탄을 쏘고 포탄을 맞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최근의 한·중간 마늘분쟁에서 보듯이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단 두 품목의 금수조치만으로도 한국기업들이 받은 타격은 지대했다. 따라서 이러한 단절이 전반적인 영역에 걸쳐 이루어질 경우 어떤 규모의 반향을 가져올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셋째로 ‘속박’이란 한국이 중국과 양자동맹을 결성하거나 또는 중국을 주요 성원으로 하는 집단안보체제를 조직하여 상호의 위협과 분쟁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을 지칭한다. 우선 한·중 양자동맹의 경우, 통일 이전 전략환경에서는 북한 요인뿐만 아니라 기존 북·중관계, 한·미동맹 및 한·미·일 삼각공조체제로 인해 그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다자간 안보체제 경우도 그 가능성은 항상 살아 있는 대안이겠으나 앞으로도 적지 않은 기간에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안보체제에 중국이 편입되는 시나리오는 실현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실제로 중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유럽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준지역’(次區域)으로 규정하면서 집단적인 안보체제 형식이 그리 잘 들어맞지 않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한·미동맹 구조를 완전히 청산하고 중국측에 붙어 따라가는 방법을 의미하는 ‘편승’의 대안도 아직은 미국이 세계적·지역적 맥락에서 중국에 대해 힘의 우위를 견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채택하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나머지 세 가지로 보인다. 이중에서 균형/봉쇄와 교류/개입의 두 가지 대안은 어떻게 보면 한국이 이미 이슈의 성격에 따라 달리 사용하고 있는 두 개의 전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 및 통상부문에서는 한국이 중국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교류를 확대하고 있는 반면, 군사 및 전략의 영역은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예를 들어 국방장관 상호방문을 포함하는 한·중간의 점증하는 군사교류) 전반적으로 보아 여전히 미·일 축에 편향되어 언제라도 대중 봉쇄의 성격을 띨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외견상 나머지 대안인 ‘양다리 걸치기’와 매우 흡사해 보인다. 실제로 미·중 갈등이 분쟁으로까지 이르게 될 경우 이슈 영역에 따른 교류와 봉쇄의 병용은 불가능하다. 군사 및 안보의 영역 - 즉 한·미동맹의 구조 - 이 여타 영역들을 장악하게 되고, 그 결과로 한·중 관계는 악화 내지는 단절될지도 모른다.

    ‘양다리 걸치기’는 이슈영역과는 무관하게 양측 모두와 지속적인 우호를 강조하며 그때 그때 한국의 이익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보장해주는 측에 대해 선택적 지지를 상정하는 것이다. 말로 하기는 쉬워 보이나 ‘양다리 걸치기’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는 중국이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현상유지를 선호하지 않는 정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한국정부가 지금보다 훨씬 탁월한 외교력과 협상력을 발휘하여 미국과 중국에 대하여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양다리 걸치기’의 드문 예로 종래에 항상 미국의 요구에 기계적으로 반응했던 것과는 달리 군사적인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TMD구상에 한국이 불참을 선언한 것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양다리 걸치기’의 가장 큰 위험은 잘못될 경우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외교력이 관건이라고 하겠다.

    미·중관계가 실질적인 갈등 관계 내지는 분쟁 관계로 치달을 경우 - 이슈영역에 따른 정경분리나 전략적인 ‘양다리 걸치기’가 허용되지 않고 한국이 한쪽만 선택하도록 강요될 경우 - 결국 우리는 동맹이라는 구조에 지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불개입 또는 잠정중립이라는 제3의 대안 선택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손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구조적 제약이 장기적으로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작동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현 시점에서는 불필요하겠지만 2020년 또는 2030년에 가서 (최소한 동북아에서는) 중국의 힘 또는 영향력이 미국보다 월등해진다면 그때는 일곱째 대안인 편승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대미편중이라는 마찰에너지가 대중편승이라는 운동에너지보다 여전히 더 클 것인가? 이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과 준비는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과 ‘관중의 국제정치’

    지금 한국의 안과 밖에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 만남뿐 아니라 자주라는 개념이 이전과는 달리 상당히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 중국과 여러 가지 비경제분야 교류가 확대되고 있는 점, 일본과 대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TMD에 한국이 불참을 결정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MCTR)에서 허용하는 300km까지로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하는데 성공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이러한 변화들이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분석과 예측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즉 우리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군사, 외교 및 경제역량을 확보하고 대미관계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이에 미국의 커다란 큰 전략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으며 그 경우 우리가 가장 큰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98년에서야 널리 알려진 미국의 북한공격 계획이 그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1994년 여름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원천 봉쇄하기 위하여 ‘외과수술적 타격’ (surgical strike)을 계획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는 절체절명의 상황일 수도 있는 대북공격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당시 한국정부 요인들에게도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대칭적 동맹’에서 약한 파트너가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만 강조하기보다는 그러한 상수(常數) 이외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 변수(變數)를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변화는 2000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변수와 등식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 행위자가 주변 행위자들을 구체적으로 또 예민하게 의식해야만 하게끔 변화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이 중국 (러시아도 함께)과 수교했을 때, 중국은 관련국 중 가장 큰 수혜자였다. 우선 반세기 가까이 대만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였던 한국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또 한국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인 영향력을 희석시킨 반면 북한을 잃지도 않았다. 한국과의 급증하는 경제교류를 통해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일본의 우경화 및 군사대국화에 공동전선을 펼 가능성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

    한국도 중국만큼은 아니었지만 일정 부분 그 혜택을 나누어 가졌다. 북한의 중국에 대한 독점권을 상당히 약화시켰으며 중국과의 경제교류뿐만 아니라 한반도 문제해결에 대한 중국의 긍정적인 참여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쪽은 북한으로, 유일하게 얻은 것이 있다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깰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남게 되었지만 이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한·중수교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아 북·미 그리고 북·일수교가 가시권에 떠오르고 있다. 이미 교차승인의 한 축을 완성한 한국이 나머지 축의 성립을 반대할 명분도, 또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남북한과 주변 4강간에 온전한 교차승인이 이루어짐에 따라 실질적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여하는 행위자의 수가 늘어나게 될 것이고 또 고려해야 할 변수와 등식도 증가할 것이다. 즉 1990년대 초반 북한이 처했던 위치에 한국이 처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위기예방과 관리가 뛰어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불확실성이 늘어나면 그리 반길 처지가 아니다.

    더구나 대외관계의 기축을 거의 전적으로 한·미관계에만 의존해왔으며 미국적 시각과 양자적 관점을 통한 국제관계에 지나치게 익숙한 한국이 다양한 양자관계들과 새로이 떠오르는 소삼각구도, 그리고 4강 역학변화 등에 얼마만큼 기민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지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다.

    한·중간 마늘분쟁이 한창이던 몇 달 전, 베이징에서 만난 한 중국관리에게 “무역갈등이 있을 때, 아무리 강력한 대응일지라도 주로 같은 분야(농산품) 그리고 비슷한 규모의 교역대상품목을 보복 대상으로 삼는 것이 관례인데 왜 중국은 이렇게 관례를 뛰어넘는 강수를 두었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었다.

    첫째, 한국은 단순히 중국으로부터의 마늘수입과 한·중 통상관계만을 보는지 모르나 중국으로서는 한국의 긴급관세 부과가 중국농산품을 수입하는 많은 국가들에 초미의 관심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강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한국과 미국 사이에 무역분쟁이 있을 때 한국이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보여준 하나의 사례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관리의 관점으로 중국 입장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관중의 국제정치’를 이미 노련하게 이해하며 시행하는 중국과 아직도 좁고 양자적이며 단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차이를 드러낸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다양한 변화와 도전을 맞고 있다. 어쩌면 상당부분 19세기 말에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다가왔던 딜레마들이 또 다른 형태로 서서히 그 실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20세기 후반부 내내 지나치게 외부 환경에만 많은 관심과 비중을 기울여왔는지도 모른다. 외부 환경의 상당 부분이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변화하는 구조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 내부의 인식과 관념의 변화가 외적 환경의 변화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조금씩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 자체의 전반적이고도 장기적인 전략적 고려와 준비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인 고려와 준비는 1~2년 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심대한 작업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이라도 우리 자체의 역량정비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충실한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상당부분은 곧 관념과 인식의 문제다. 따라서 남북관계, 한·미동맹, 대4강 관계를 비롯한 소위 ‘현상(現狀)’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와 토론 그리고 열린 상황에서의 공론화가 바람직하다. 우리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장기적인 전략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이러한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친미, 반미, 보수, 진보 등의 이분법적인 공론(空論)은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진지한 반추 없이는 우리를 지켜보는 다양한 이해를 가진 ‘관중’들을 설득할 수도, 또 그들의 진정한 협력을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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