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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25일|미국大選, 그 각본없는 드라마

무너진 아메리카의 자존심

  • 이형삼 han@donga.com

무너진 아메리카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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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모범적인 민주국가'이자 첨단 과학기술 부국임을 자부하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 불씨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플로리다 사태'는 국가적으로 커질 수도 있다.
제43대 미국 대통령선거를 나흘 앞둔 11월3일, 기자는 플로리다주 오렌지 카운티 선거감독위원회를 방문했다. 오렌지 카운티의 빌 카울즈 선거감독관은 투표절차와 개표과정,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시범 실시된 인터넷 투표 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려줬다. 오렌지 카운티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한쪽도 우세를 장담하지 못하던 접전지역.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선거감독관에겐 우문(愚問)이란 걸 알면서도 “당신은 누가 당선되기를 바라느냐”고 장난삼아 물었다. 카울즈 감독관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한 마디를 던지고 자리를 떴다.

“고어든 부시든 상관없다. 누가 당선되든 제발 큰 표 차이로나 이겼으면 좋겠다. 플로리다 주법은 후보간 표차가 0.5% 이내일 경우 재검표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재검표에 들어간다면 며칠밤을 새워야 할지 모른다….”

노련한 선거전문가의 직감이었을까, 아니면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다른 곳도 아닌 바로 플로리다주에서 사상 초유의 대선 재검표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카울즈씨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덕분에 기자는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짜릿함을 맛봤다.



‘Too Close To Call’

기자는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21개국에서 온 22명의 언론인, 정치인들과 10월17일부터 약 4주간 미국의 대통령선거 전후상황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수도 워싱턴D.C.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매사추세츠 등 정치적 비중이 높은 몇 개 주를 돌면서 정치인과 정당 관계자, 정치학자, 정치 컨설턴트, 언론인, 민간 정치활동기구 관계자, 선관위 간부, 그리고 다양한 집단과 계층의 유권자들을 만나 그들이 이번 선거를 보는 시각과 선거에 임하는 자세 등을 들어봄으로써 미국 정치·선거시스템의 윤곽을 파악하는 기회였다.

투표는 11월7일 저녁 8시에 마감됐다. 예전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개 투표가 끝난 뒤 한 시간쯤 지나면 승부의 향방이 드러났다. 뉴욕 플로리다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등 대통령 선거인단 수가 많은 동부지역은 서부지역보다 3시간 이르기 때문에 서부지역의 투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국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만큼의 개표가 이뤄지곤 했다. 그래서 서부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공화당과 민주당지부는 이번에도 투표마감 직후인 8시30분과 9시(동부 시간으로는 11시30분과 자정)에 각각 당선축하파티를 갖기로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승부는 예측불허였다. 플로리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테네시 아이오와 아칸소 워싱턴 뉴멕시코 등 경합지역은 물론, 당초 부시 후보의 우세지역으로 꼽혔던 오하이오 뉴햄프셔 네바다 애리조나, 고어 후보의 우세지역으로 점쳐졌던 미네소타 미시간 등지에서도 접전이 계속되면서 두 후보가 확보한 선거인단 수는 밤새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가닥이 잡힌 것은 동부 시간으로 8일 새벽 2시 무렵. 접전이 펼쳐지던 플로리다에서 부시 후보가 1700여 표차로 승리, 한꺼번에 25명의 선거인단을 가져감으로써 그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NBC, CNN 등은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라는 자막과 함께 부시 후보의 사진을 내보냈다. 화면을 반으로 나눠 왼쪽에는 텍사스주 오스틴의 주지사(부시가 주지사) 공관 앞에서 환호하는 부시 지지자들을, 오른쪽엔 궂은 비 뿌려대는 테네시주 내슈빌(고어의 고향)의 전쟁기념광장에서 잔뜩 풀죽은 모습으로 멍하니 서있는 고어 지지자들을 함께 보여주기도 했다.

같은 시간 TV 홈쇼핑 채널에서는 부시의 얼굴이 새겨진 ‘부시 대통령 당선자 기념주화(Bush President-elect Coin)’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두 후보의 기념주화를 모두 만들어 놓고 결과를 기다렸을 게 뻔한데도 쇼핑 호스트들은 “정말 정확한 시점에 나왔군요” 어쩌고 하면서 능청을 떨었다. 얼마 후엔 고어가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결과를 보고 나니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잠깐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 7시였다. 습관적으로 TV를 틀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지난 밤을 꼬박 새운 개표방송 앵커들이 그때껏 카메라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박빙의 승부(Too Close To Call)’라는 자막이 깔려 있었다. 재방송 아닌가 했지만 화면에 표시된 시각은 분명 현재 시각이었다. 이른 새벽 ‘부시 271, 고어 237’로 결판났던 선거인단 수는 ‘부시 246, 고어 260’으로 뒤집혀 있었다. 부시 품에 안겼던 플로리다가 푸드덕 날아가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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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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