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이수현 신드롬 그후의 일본열도

  • 이영이

    입력2005-05-03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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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27일 일본 조간신문에는 ‘도쿄(東京) JR 신오쿠보(新大久保) 전철역에서 전동차에 치여 3명 사망-선로에 떨어진 사람과 구조하려던 두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면과 사회면에 비교적 비중있게 취급되긴 했지만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전철역 구내에서의 전락사고는 흔히 있는 일이다. 실제로 이날 사회면에는 전날 저녁 사이타마(埼玉)현의 다른 전철역에서 남자 한 명이 선로에 떨어져 사망한 1단 기사도 함께 실렸었다.

    이날 기사는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조하려다 숨진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채 신오쿠보역의 구조나 사고원인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물론이고 다른 일본사람들도 ‘또 전철역 사고가 났다보다’며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27일 오전 사망자의 신원이 알려지면서 일본 사회에 커다란 감동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자신의 소중한 목숨마저 잃어버린 두 남자중 한사람이 한국에서 유학 온 일본어학교 학생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곧 전철 타니까 30분 후면 집에 도착할꺼야.”



    지난해 1월 일본어학교 아카몬카이(赤門會)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우던 이수현(李秀賢·26·고려대 무역학과 4년 휴학중)씨. 그는 지난달 26일 오후 7시경 신오쿠보의 한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전철역에서 여자친구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불과 1,2분 뒤에 자신의 눈앞에 펼쳐질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전철을 기다릴 때였다. 술에 취한 30대 남자가 비틀거리더니 홈에서 미끄러졌다. 선로에 떨어져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며 허우적대자 이씨는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 그 남자를 끌어올리려 했다. 옆에 있던 세키네 시로(關根史郞·47·카메라맨)씨도 함께 뛰어내려 이씨를 도왔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신오쿠보역을 지나는 JR은 전동차 운행 간격이 2,3분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역과는 달리 플랫폼 밑에는 선로에서 몸을 피할 수 있는 대피구도 없었다. 신오쿠보역에 들어오던 전동차의 운전사는 70m앞에서 이들을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이미 늦었다. 시속 70km 가량의 속도로 달려온 전동차가 비상 브레이크로 멈추려면 170m 가량의 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금요일 저녁 러시아워였던 현장에서는 200여명이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존경의 탄성과 안타까움의 한숨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던져가며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 했던 두 사람의 의로운 죽음을 보고 모두들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주인공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유학생이었다니, 그것도 6개월 후면 귀국해 고려대에 복학할 예정이었던, 한일 양국을 잇는 가교가 되길 꿈꾸던 촉망받는 젊은이었다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구하려 목숨을 던졌던 사람’(아사히신문) ‘정의감이 강했던 사람…일본과 한국을 맺으려던 계획은 꿈으로’(요미우리신문), ‘당신의 용기, 잊을 수 없습니다’(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들이 이씨의 신원과 의로운 죽음에 대해 보도하자 일본 사회는 다시 한번 망연자실한 분위기였다.

    한국인 유학생의 살신성인에 놀란 일본

    그저 못본 체하고 지나갔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 그 상황에서 자기나라도 아닌 이웃나라에 유학 온 젊은이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에 일본인들은 단순한 ‘감동’ 수준을 넘어 커다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 후에도 일본 신문들은 연일 이씨에 관한 기사로 1면과 사회면을 채웠다.

    아사히신문은 1월 28일자 ‘천성인어(天聲人語·1면 고정컬럼)’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많은 독자들을 울렸다.

    “‘마음이 선한 사람이 먼저 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라고 어느 한 시인이 말했다. JR 신오쿠보역의 뉴스를 들으니 이 구절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망한 세키네씨의 친구는 “그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는 것은 서툴렀지만 무엇이든지 열심이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의 친구는 “평소에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람의 본성은 갑작스런 상황의 행동에서 나타난다. 두 사람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모르는 사람을 구하려 했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일본에는 어두운 사건도 많았지만 이번 사건으로 환한 불빛이 밝혀졌다. 인간은 선한 면을 갖고 있다. 좋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착한 사람도 적지 않다. 아니 착한 사람이 훨씬 많음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신문으로 한국에 비우호적인 입장을 보여온 산케이신문까지도 이씨 신원확인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리는 등 날마다 이씨 관련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산케이신문은 1월 30일자로 다음과 같은 사설까지 실었다.

    “JR신오쿠보역에서 홈에서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가 죽은 두 사람의 용기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결과적으로는 두 사람까지도 희생됐다.…그러나 그것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몸을 던져 ‘용기’와 ‘자기희생’의 소중함을 국민들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는 이국땅에서 전혀 모르는 일본인을 구하려고 주저없이 선로에 뛰어내렸다. 한국에서 자라난 이씨의 이런 행동은 전후(戰後)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것이다.”

    이씨가 다니던 일본어학교 아카몬카이에는 이씨 빈소가 마련된 28일부터 조문객들이 몰려 발디딜틈 없었다. 일본에 온지 1년이 조금 넘는 젊은 유학생이 그렇게 많은 사람과 사귀었을리도 없는데 찾아오는 조문객마다 눈시울을 적시며 이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추도식이 거행된 29일에는 1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와 학교 앞 도로에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이중 절반 이상은 뉴스를 보고 이씨를 추도하기 위해 찾아온 일반시민들이었다.

    29일 도쿄 외곽도시인 후지사와(藤澤)시에서 찾아왔다는 한 남성(49)은 “곤란한 사람을 보고 돕겠다고 생각은 해도 좀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며 “자기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에서 용기있는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씨가 평소 박애정신이 넘쳤기 때문”이라며 울먹거렸다. 또 아카몬카이가 위치한 아라카와(荒川)구의 한일친선협회회장인 도리우미 다카시(鳥海隆·78)씨는 “한국의 젊은이는 사람을 공경하는 유교정신을 갖고 있다. 이씨의 숭고한 마음에 감동했다”며 애도했다.

    정치권, 우익단체도 큰 관심

    언론과 시민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자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추도식에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를 비롯해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상,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자민당 간사장 등 정계 거물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다. 이들 역시 이씨의 의로운 죽음을 되새기며 숙연해 했다.

    모리 총리는 “한일 관계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라고 들었는데 의로운 일에 목숨을 잃게 돼서 안타깝다”며 “이씨의 용기 있는 행동이 일본 젊은이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가토 전간사장은 이씨의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과거 한일간에 좋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에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고노 외상은 조문을 한 후 잠시동안 빈소옆에 마련된 별실에서 이씨 부모를 위로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는 “아드님의 행동은 너무나 훌륭한 행동이었지만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상심하셨겠느냐”며 “아드님이 소중한 목숨을 던져 다른 사람을 구하려 했던 용기 있는 행동을 우리 모두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총리의 딸이자 현역 정치인으로 활약하는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중의원 의원은 28일 저녁에 이어 29일 추도식에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다나카 의원이 빈소를 두 번이나 찾은 이유는 사고 당일 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이씨와 동갑인 아들로부터 울음섞인 전화를 받았기 때문. 이씨의 죽음을 남달리 안타까웠다는 그는 이날 조문을 마친 뒤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한 행동이었지만 역시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요. 정말 마음이 아파요.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니 몸을 잘라내는 것만큼이나 아픕니다.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지만 꽃 한송이 정도는 제 손으로 올리고 싶었습니다.…”

    이날 추도식에서는 오기 지카게(扇千景) 국토교통상과 도쿄경시총감이 이씨의 용감한 행동을 기리는 감사장과 메달 등을 보내왔으며 내각부 산하 법인인 일본 선행회(善行會) 등 시민단체로부터의 감사장도 전달됐다.

    도쿄경시청은 또 숨진 두 사람에게 ‘경찰관 직무에 협력한 자의 재해급부에 관한 법률’을 적용해 재해보상금과 장례보상금 등을 유족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도쿄경시청이 이처럼 보상을 결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관할서인 신주쿠(新宿)경찰서의 가가와 히데토시(加川英俊) 서장은 “범인체포 과정에서 돕던 민간인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사례는 있지만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례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면서 “일본인에게 귀감이 되는 행동을 높이 평가해 가능한 한 최대한의 보상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고 전철회사인 동일본철도사도 사고현장인 JR 신오쿠보역 구내에 이씨와 세키네씨의 추모비를 세울 계획이다. 이 회사는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두 사람의 의로운 죽음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사고현장에 두 사람의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으며 유족들로부터도 이미 동의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이씨가 만든 인터넷 홈페이지와 아카몬카이 유학생들이 만든 추모 홈페이지에는 이씨를 기리는 글이 20여만건 이상 쇄도하고 있다.

    “한국의 4000만명, 일본의 1억2000만명,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당신은 해냈다.”

    “명복을 빕니다. 편안히 쉬세요.”

    “당신의 육신은 사라지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아름다운, 닮고 싶은 청년입니다.”

    감사의 물결은 추도식 이후 더욱 확산되고 있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기관에는 이씨와 세키네씨의 유족에게 보내는 조위금이 밀려들고 있다.

    아사히신문사에는 지난달 30일부터 조위금 접수를 시작한지 이틀만에 877건, 868만엔이 전해졌으며 수백건의 문의와 격려 메시지가 전화와 팩스로 들어왔다. 접수 첫날에는 60세 전후의 한 남성이 200만엔의 거금을 유족에게 전해달라며 맡기기도 했다.

    요미우리신문사에도 이틀간 1390건, 1118만엔이 접수됐으며 마이니치신문사에도 680건, 400여만엔의 조위금이 접수됐다. 이들 신문사에는 그 후로도 조위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신문사 뿐 아니라 일본 곳곳서 온정의 손길이 몰려들고 있다. 이씨가 유학하던 아카몬카이는 이씨 유족에 보내는 조위금이 1000만엔 이상 몰리자 ‘이수현군의 용기를 기리는 기금’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아카몬카이는 이 기금의 사업내용에 대해서는 이씨 부모와 긴밀히 상의해 결정할 계획이다.

    도치키(木)현 오타와라(大田原)시에서는 시청 간부들이 “남의 일에 무관심한 시대에 남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우리가 잊고 있던 일을 했다”라며 말을 꺼내자 아예 시직원 상조회(회원 501명)에서 모금을 시작했다. 또 오사카(大阪)부 국제교류재단은 “이씨 부친이 오사카에서 태어난 인연이 있다”며 “유족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추광호(秋光浩·46·JMI저팬 사장)씨는 이씨를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자신과 부인 명의로 된 대지 546평(싯가 17억원 상당)을 기증, 한일유학생회관을 짓겠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한일 프로야구 챔피언팀들이 다음달 11일 이씨를 추모하는 친선경기를 갖고, 재일 바이올리니스트 정찬우씨도 추모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팀 현대 유니콘스와 일본 시리즈 챔피언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리는 추모전에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 대신 야구팬들의 성금을 모아 유족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이기적인 일본 젊은이 vs 이수현

    이씨의 죽음에 대해 일본인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진 것만으로 보면 이씨와 함께 사고현장에 뛰어들었던 세키네씨도 똑같이 훌륭하다. 그렇지만 이씨에 대한 반응은 세키네씨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뜨겁다. 한 일본 신문사 기자는 “만일 세키네씨 혼자서 취객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면 일본 언론이 이처럼 흥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번 사건을 통해 일본 젊은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용기와 희생정신이 한국 젊은이에게 충만하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일본 젊은이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희생은 물론, 자신에 대한 꿈과 희망마저 잃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지난해부터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17세 소년’들의 엽기적이고도 반인륜적인 살인사건은 일본 청소년들의 정신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은 또 지난달 초 고치(高知)현 고치시 성인식장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떠올리며 젊은이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다.

    성인식은 만 스무살의 성인이 된 젊은이들에게 지방자치단체가 베풀어주는 행사. 젊은이들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해 고치현 지사가 축사를 읽던 중 행사장 2층에 앉아있던 청년들이 “너무 길다”, “그만 돌아가라”는 말로 야유를 퍼부었다.

    화가 난 지사가 축사를 읽다말고 젊은이들에게 “조용히 해.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지르자 젊은이들도 질세라 “당신이 나가”라며 맞받아치는 바람에 장내는 엉망이 됐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성인식 사정도 거의 마찬가지. 성인식 직후 각 언론에서는 철없는 젊은이들을 나무라는 한편 젊은이들을 애지중지 키워왔던 전후 교육에 대한 반성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젊은이 언어를 과학한다’는 책의 저자인 우메하나여자대학의 요네가와 아키히코(米川明彦)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인식에서 버릇없는 소동을 벌인 일본 젊은이가 이씨처럼 남을 구조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70년대 이후 일본사회는 철저히 오락사회가 됐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란 젊은이들이 귀찮은 일이나 싫어하는 일을 하려고 하겠느냐? 즐겁거나 편안한 일이 아니면 모두 거부한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이란 말은 이미 사어(死語)가 됐고 ‘희생’이란 말은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다. 자기중심주의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의연한 태도로 더해진 감동

    이씨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 젊은이에 비해 희생정신이 강하고 양보심이 많은 한국 젊은이들을 높이 평가하게 됐다는 얘기다. 일본 신문에 실린 한 60대 독자의 투고 내용을 보면 한국 젊은이에 대한 부러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신문에 난 두 사람의 사진을 보면서 눈물이 흘렀다. 이수현씨는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는 26세의 청년이다. 오늘날 여러 잔혹한 사건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인간은 역시 선한 동물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한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서울을 방문해 지하철을 탔더니 좌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즉시 일어나 노인인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광경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올 여름 한국 여행을 예약했다. 내게는 첫 한국여행이다. 최근 배우기 시작한 한글공부도 더 열심히 할 계획이다. 이씨와 이씨의 모국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서.”

    이번 사건에서 이씨의 부친인 이성대(李盛大·61·회계사무소 경영)씨와 모친인 신윤찬(辛閏贊·50)씨가 보여준 의연한 태도도 일본인에게 감동을 더해줬다.

    보통 자식의 죽음을 맞은 부모라면 자식의 유해를 보자마자 울부짖으며 안타까워하기 마련. 그러나 이씨의 부모는 27일 밤 일본에 도착한 후 30일 떠날 때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조문객들을 맞이했고 이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하루 100여명씩 들이닥친 취재진에게 한번도 낯빛을 붉히거나 찡그리는 일 없이 “고맙다”, “수고하신다”고 말하며 자신의 심정을 또렷하고도 담담하게 밝혔다.

    부친 이씨는 자식을 앞세운 슬픔을 감춘 채 “내 자식이 살아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훌륭한 사람이 됐다고 한들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며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한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이씨는 “조부가 일본에서 숨지고 부친은 징용으로 끌려와 일본 탄광에서 노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마저 일본에서 잃게 돼 4대째 일본과 인연을 맺게 된 셈”이라고 밝힌 뒤 “부족한 자식의 장례에 일본인 여러분이 성심성의껏 도와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린다”며 오히려 주변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모친 신씨도 아들의 유골을 들고 귀국하기 직전 일본 기자들이 아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하자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은 아이였는데 뜻을 못 이루고 갔다. 그러나 아들아, 일찍 간다고 너무 애통해 하지 말아라. 너는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 여러 사람 마음 속에 길이 남아 있다”고 말해 주위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도쿄 네리마(練馬)구의 한 노인(74)은 이씨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은 나처럼 태평양전쟁 후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상당히 고생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래를 촉망받던 사랑하는 아들을 갑자기 여의게 된 심정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한 시민으로서 한일간의 우호가 계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씨의 유골은 30일 일본을 떠나 고향인 부산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씨가 남긴 감동은 일본인 가슴에 깊이 새겨져 이씨가 그랬듯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구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이씨 사고 이후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사례만 대여섯건이나 된다.

    1일 오후 2시경 나고야(名古屋)시 쓰루마이역에서 고교 3년생이 자살하기 위해 전철 선로로 뛰어내리자 부근에 있던 회사원 등 남자 2명이 달려들어 구출했다. 경찰에 따르면 전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뒤 고교생이 뛰어내려 선로에 드러눕자 회사원 등 2명이 달려들어 그를 일으킨 뒤 옆에 있는 다른 선로 쪽으로 끌어냈다. 이들을 발견한 기관사는 급브레이크를 걸어 열차를 멈췄으며 회사원은 선로에 뛰어내리는 과정에서 오른쪽 어깨를 다쳐 전치 3주 가량의 부상을 입었다.

    고교생을 구조한 회사원은 “학생이 뛰어내리는 것을 본 순간 신오쿠보역에서 발생한 사고가 떠올라 용기가 났다”며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돼 정말 다행이다”고 말했다.

    또 지난 달 31일 밤 도쿄 조후(調布)시 사철(私鐵) 게이오선 전철역에서도 임신 5개월의 임신부(24)가 선로에 떨어졌으나 승객 5명이 힘을 합쳐 구출했다.

    도쿄소방청에 따르면 임신부가 전철에서 내린 뒤 현기증을 일으켜 선로로 떨어졌으나 승객 2명이 선로에 뛰어내려 부축하고 남자 3명이 위에서 끌어올려 무사히 구출됐다. 임신부를 끌어올렸던 5명 가운데 4명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현장을 떠나 도쿄소방청은 표창장을 전달하기 위해 이들을 찾고 있다.

    일본 언론은 잇따른 승객들의 미담을 전하며 “이수현씨 등이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과 희생정신이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높아진 한국인 위상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본내에서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일본인의 외국인에 대한 시선은 별로 곱지 않았다. 특히 한국 등 아시아계 외국인은 예비범죄자쯤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지난해 ‘3국인’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를 비롯해 일부 국민들은 ‘일본 치안을 위협한다’며 외국인을 경계했다. 지난해말 ‘대도(大盜)’ 조세형(趙世衡)씨가 도쿄 주택가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을 때도 “그러면 그렇지”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요즘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은 어딜 가나 일본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듣는다. 도쿄에서 일본어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 김연주(金硏珠·23)씨는 “내 돈 내고 유학하면서도 일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아 주눅들곤 했는데 이번 사건 후에는 모두들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본다”며 “이씨 덕분에 한국인임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또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은 툭하면 과거 침략사를 들춰내 물고 늘어지는 ‘불편한 존재’였다. 양국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관광객의 왕래도 크게 늘었지만 과거사 문제나 이해관계가 얽힌 경제문제로 돌아가면 언제나 양국관계가 경직되곤 한다.

    양국관계가 진전되는 듯하자 오히려 최근에는 일본사회가 이를 경계하며 우익화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일부 역사교과서의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과거 침략사를 정당화하거나 일본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는가 하면, 지난해 제기됐던 재일교포의 지방의회선거 참정권 허용 문제는 자민당 내 보수세력 등의 반발에 부닥쳐 아예 물 건너간 상태다.

    주일 한국대사관의 한 외교관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취임 이후 한일관계가 표면적으로는 크게 좋아진 것 같지만 구체적인 현안을 보면 해결된 것이 거의 없다. 한일관계 개선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고 꽉 막혀있는 듯한 상황에서 이씨의 의로운 죽음은 한일외교의 숨통을 틔워주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다.

    ‘워싱턴 포스트’도 지난달 30일 도쿄발 기사에서 “한국인은 일본인이 차갑고 계산적이라고 보는 반면 일본인은 한국인이 과거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이씨의 행동으로 이런 나쁜 감정이 일부 해소됐다”고 평가했다.

    이런 점에서 이씨의 죽음은 양국 우호관계 구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씨 빈소를 방문했던 양국 고위 인사들은 하나같이 양국간 우호노력을 강조했다.

    후쿠다 관방장관은 “이씨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한일 우호 친선을 위해 애쓰겠다”고 말했다. 주일대사 대리로 추도문을 낭독한 유광석(柳光錫) 정무공사도 “이씨의 죽음이 두나라 국민을 한데 묶는 역할을 했다”며 양국 간 우호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쌓아나가자고 다짐했다.

    월드컵 명칭논란에도 일침

    ‘아사히신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월31일자 사설을 통해 2002년 월드컵대회의 대회명칭과 관련, 일본 조직위원회측에 다음과 같이 양보를 촉구하기도 했다.

    “…일본 조직위원회측에 요구하고 싶다. ‘일본·한국’ 순서에 계속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명표기를 아예 없애라는) FIFA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 정식명칭(Korea·Japan)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전례가 없는 양국 공동개최사업이다. 준비단계에서 곤란한 일이나 트러블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상대측에 세심한 배려를 해나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새로운 한일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JR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남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잃은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의 행위는 양 국민의 가슴을 울렸다. 월드컵대회의 일본어 표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소중한 것을 잃어서는 안된다.”

    일본에서 시야를 넓힌 뒤 스포츠관련 무역일을 하며 한일 양국의 가교가 되길 꿈꾸던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 그의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가 남긴 소중한 교훈은 두나라 국민들의 가슴에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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