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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경제|파산위기의 일본경제

깊어가는 ‘10년 불황’, 실종된 정치지도력

  • 이영이 <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 yes202@donga.com

깊어가는 ‘10년 불황’, 실종된 정치지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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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넘게 계속되는 일본의 불황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닛케이 평균주가는 89년 최고치(3만8915엔)의 3분의 1로 주저앉았다. 그 동안 일본정부가 쏟아부은 부양자금이 무려 110조엔 (1200조원)에 이르지만 경기회복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 경제 위기설’이 전세계 증시를 뒤흔든 3월 하순 어느날 밤 10시경. 도쿄(東京)의 대표적인 유흥가 신주쿠(新宿) 가부키초(歌舞伎町),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다는 코마극장 앞 거리를 근처 건물 2층에 올라가 내려다보았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유흥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간간이 눈에 띄는 몇몇 사람도 가부키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신주쿠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들 일찌감치 술자리를 끝내고 귀가하는 듯했다.

“1년 전만 해도 밤 10시는 이곳에서는 초저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를 끝내고 차수를 바꿔 한잔 더 마시려는 인파가 몰려들기 때문에 길을 거슬러 귀가하는 사람들은 걷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신주쿠에 불어닥친 불황

이곳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다나카 유키오(田中由紀雄·22·대학 4년)는 “4년 동안 일해왔지만 이렇게 손님이 없기는 처음이다”며 한숨을 내쉰다. 이런 추세로 손님이 줄어들다가는 언제 일자리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초조함이 엿보였다.

10년 동안 불경기라고 떠들어댔지만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사무직 샐러리맨들에게는 90년대 초반부터 찬바람에 불어닥쳤지만 비정규직인 아르바이트는 언제나 사람이 모자랐다. 그러나 최근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근무시간도 적어지고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위태로워진 것.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신주쿠역 근처에는 노숙자들이 서서히 늘고 있다. 이곳 상인들은 2, 3년 전에 비해 10% 이상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자 노숙자도 몇 사람 눈에 띈다. 한국처럼 실직당해 거리에 나앉았다기보다는 아등바등하며 살기 싫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노숙자가 대부분이라고는 하지만 사정이 더욱 각박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기변화에 가장 민감한 직업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택시운전사다. 택시를 탈 때마다 경제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은 이구동성이었다. 10년 동안 불황을 겪어왔지만 지금 같은 불경기는 없었다는 것.

20년 동안 택시를 운전해왔다는 기무라 요시노리(木村義則·54)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손님들이 택시 잡기 힘들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지금은 황금시간대에도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각종 모임이 많은 금요일 밤 12시경 ‘일본의 명동’인 긴자(銀座)에서 택시를 잡아보았다. 일본에는 자동차 출퇴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철이 끊기는 밤시간에 택시 잡기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이 날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여 명이 택시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시간은 뒤에 있던 택시가 앞으로 나와 문을 열고 승객을 태워 출발하는 데 걸리는 시간 정도였다. 손님보다 훨씬 많은 택시가 정류장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까지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기무라는 “물론 손님이 줄어든 탓이 크지만 경기가 나빠져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택시기사로 몰려든 것도 원인”이라며 택시 대수 증차를 허가해준 정부를 원망했다. 이 때문에 세계에서 친절하기로 유명한 일본 택시의 서비스가 나빠지고 있다는 불평도 했다.

손님이 줄어든 것은 택시만이 아니다. 음식점, 옷가게, 백화점 할 것 없이 모두 손님이 줄어 울상이다. 소비가 위축되자 각 업계에서는 값 내리기 경쟁이 한창이다. 덕분에 세계 최고의 물가로 악명을 떨치던 도쿄의 물건값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가격인하 경쟁에 불을 붙인 것은 미국계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날드햄버거와 캐주얼 의류업체인 유니클로.

피 튀기는 가격인하 경쟁

맥도날드햄버거는 98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동시에 일어난 일본 금융위기 때 발빠르게 햄버거 평일 반액 할인서비스를 시작해 평소 130엔(약 1300원) 하던 햄버거를 평일에는 65엔에 판매했다. 이때부터 점포확장에도 적극 나서는 한편 끊임없이 원가를 절감했다. 처음에는 설마 했지만 반액 할인서비스는 큰 호응을 불러일으켜 손님이 크게 늘었다. 좌석 100석 이상을 갖춘 대형 점포도 점심시간이면 학생과 샐러리맨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덕분에 맥도날드는 지난해 매출이 전년보다 9.3%나 오른 4311억엔으로 사상최고를 기록했으며 올해 매출도 9% 늘어난 4700억엔으로 잡고 있다. 이는 1∼2%대의 일본경제 성장률에 비추어볼 때 단연 눈부신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유니클로도 일본의 장기불황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유니클로는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는 끝났다’는 상식을 깨뜨리고 옷 종류는 줄이되 색상을 다양화하고 대량생산을 통해 파격적으로 싸게 파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웨터, 티셔츠, 바지 등을 중국 공장에서 100만장 단위로 생산하기 때문에 가격은 다른 업체 제품의 절반수준인 1900∼4900엔선으로 낮아졌다. 이중 가장 인기를 끈 제품은 1900엔짜리 프리즈(촉감이 부드럽고 두꺼운 티셔츠). 99년 850만장에 이어 지난해는 1200만장을 팔았다. 지난해 8월 결산에서 매출이 전년의 두 배인 2290억엔을 기록했으며 경상이익은 600억엔으로 일본 최대 유통업체인 이토요카도를 앞지르기도 했다.

유니클로가 일본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리자 해외에서 생산한 물건을 수입하면 국내물가가 낮아진다는 뜻으로 ‘유니클로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섬유업계에서는 유니클로의 해외생산 때문에 국내 업체들이 망한다며 수입을 제한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맥도날드나 유니클로처럼 성공을 거둔 업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머지 업체는 모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할인판매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일본 롯데리아 점포 중 몇 순위 안에 꼽히는 신주쿠 가부키초 롯데리아 점장 다카베 모리(高部森·31)는 “무분별한 가격인하 경쟁이 일본 경제를 좀먹는다”며 울분을 토한다. 다른 롯데리아에서는 이미 99년부터 반액할인 서비스를 실시해왔지만 그는 아주 최근까지 할인판매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3월 중순부터 본사의 할인 방침에 따르고 있다.

“인건비나 임대료 등을 빼고 햄버거에 직접 쓰이는 재료비만 64엔입니다. 그런데 65엔을 받고 있습니다. 팔면 팔수록 손해라는 거죠. 그런데도 할인판매를 중단하면 금방 손님이 줄어듭니다. 계속 싼 것만 찾다가는 기업이 모두 망해버릴 겁니다.”

좀 엄살 같기도 해서 “그러면 어떻게 장사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햄버거 하나만 팔면 손해니까 이익이 많이 남는 음료나 감자튀김 같은 것을 붙여서 세트메뉴를 손님에게 권한다”고 귀띔했다. 결국 세트메뉴를 먹는 손님은 거의 제값을 다 내고 먹는 꼴이라는 것. 반액할인을 시작한 후 손님 수는 30%, 매출액은 15% 정도 늘었지만 이익은 오히려 20%나 줄었다는 하소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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