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워싱턴은 극동사령부 G2의 남침경고를 묵살했다”

  • 김영훈 < 美 연합감리교회 정회원목사 >

    입력2005-05-24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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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로비 장군의 정보 자료에는 6·25전쟁 발발에 대한 예고가 이미 6개월 전인 1950년 1월에 있었고,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도 ‘G-2 report’(일일정보 일지보고서) 형식으로 워싱턴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윌로비 장군이 6개월 전에 전쟁 조짐을 발견하여 워싱턴 당국에 보고했으나 왜 무시되었을까? 여기서 워싱턴 당국이란 일차적으로 국무부이며 이차적으로는 CIA와 군당국자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래 5년 동안 세계 각국은 전후 복구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세계의 대전이었으므로 미국(파괴된 하와이 일부 제외)을 제외한 일본, 중국, 소련,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모든 나라들이 국내문제로 바쁜 시기였다.

    그런 한편으로 미국과 소련은 국제정치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른바 ‘냉전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소련공산주의자들의 팽창정책 때문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6년에 미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와 미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을 창설하고, 1947년 ‘마셜정책’으로 유럽제국의 전후 복구를 위해 97억달러라는 당시로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대항해 소련은 전쟁이 끝난 뒤 공동으로 관리하던 독일점령지역의 군사 협조체제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련은 1948년 6월11일 서독과 베를린 사이의 철도 운행을 이틀간 중단시킨다. 또 며칠 뒤인 6월16일에는 이른바 ‘4개국 군사조율체제’에서 대표단을 철수하기에 이른다. 결국 6월23일 소련은 동독과 베를린에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그 유명한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소련은 또 1949년 9월 핵실험에 성공해 핵보유국이 됨으로써 미국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유럽의 복잡미묘한 국제정치 문제에 대처하기 바빴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한반도문제를 챙길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소련과 중국은 발맞추어 유엔에서 ‘대만’(장개석 정부의 중국)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모택동이 실세를 쥔 중국 정권을 인정해야 하는 곤혹스런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12일 프레스클럽의 기자 인터뷰에서,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발언을 하게 된다. “…한반도를 제외한 알류산 열도와 일본, 그리고 …”라는 발언이 그것인데, 우리로선 원한의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이었던 것이다.

    한반도 제외된 ‘애치슨 라인’

    그런데 애치슨의 “일본을 포함한 알류산 열도로부터 필리핀까지가 미국의 방위선”이라는 발언은, 어느 의미에서는 미국의 관할하에 들어오는 일본과 필리핀을 보호하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지 한국을 얕잡아본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왜냐하면 그가 자국(自國)의 방위는 자국민의 노력과 힘, 독립적 의지로 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 의도가 어떠했든 김일성과 스탈린 및 모택동은 애치슨 라인을 믿었고 또한 용기(?)를 내어 남한을 공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애치슨 라인이 남침의 결정적 동기가 된 셈이다.

    북한은 소련의 계획된 정치공작에 따라 남조선을 해방하고 혁명적화통일을 위한 온갖 전술(정치선전, 평화위장공세, 게릴라 파견 등)을 구사했다. 모택동의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쫓아낸 뒤 여유를 가지고 북한을 지원했다. 중국 군대가 ‘인민해방군’이라면 김일성의 군대는 ‘통일해방군’이 되어야 한다고 중국이 김일성을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 스탈린을 설득하여 ‘남조선해방 계획’(The plan of liberate South Korea)을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미군의 개입만 없다면 문제는 간단하다는 논리로, 몇가지 원칙을 정해 놓고 있었다.

    첫째, 알류산 열도에서 필리핀까지의 미국 방위선에서 한반도는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미군의 개입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

    둘째, 1949년 6월 실시된 남한 주둔 미군의 전면 철수를 호기로 만들 수 있다는 점.

    셋째, 남조선 통일을 위한 위장 평화 공세를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다는 점.

    넷째, 남조선의 이승만이 선제 공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

    다섯째, 남조선의 모든 정치, 경제, 군사 및 사회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선전·선동 그리고 폭력과 파괴를 이룩해 낸다는 점.

    이것이 북한의 기본적인 ‘남조선해방전략’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6월 말 회계연도 준비와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에 맞서 수소폭탄을 실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1950년 6월의 주말(1950년 6월24일)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군수산업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6·25전쟁을 촉발한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즉 2차 세계대전 후에 쌓아둔 미군의 무기를 처분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전쟁은 항상 정치력과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이 조화를 이룰 때에 발생하는 것이지 무기가 남아 돌아간다고 해서 일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국제정치 상황으로 보면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외교력을 강화하고 안보상 안정을 이루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선제공격이나 전쟁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참패하고(1949년 9월) 대만으로 쫓겨간 직후인 1950년 당시 미국의 정책은 아시아 실세인 중국(Red China)을 자극하지 않고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전쟁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애치슨라인’은 국무장관으로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에만 신경을 쓴 것이 명백하다. 그러니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것이 바로 6·25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관심사는 미국이 광복 이후 5년 동안 무력도발을 꾸준히 준비한 북한을 왜 묵인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미국의 정보팀들은 ‘북한의 남침준비를 알고도 무시했느냐’ 또는 ‘정말 모르고 있었느냐’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약 알고도 무시했다면 의도적인 묵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민의 원망은 얻을지언정 국제정치적 입장에서 어떤 의무나 잘못은 없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당시 한미간에 ‘상호방위조약’ 같은 것을 맺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간 최초의 조약은 1882년 중국의 천진에서 맺은 조약이다. 이로써 최초의 통상관계가 수립되었다. 이 조약에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제3국에 의해 불법적으로 취급되는 경우 상호원조를 약속한다’는 조항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무역이나 상업 부문의 조항일 뿐 방위에 관한 해석으로는 볼 수 없다. 또 조선왕조와 맺은 조약이므로 법적 의무조항에 대한 해석은 복잡하다.

    아무튼 미국의 묵인 아래 북한의 전쟁준비가 완료되고 6·25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대만(장개석의 국민정부)과 중국대륙의 공산정권 사이의 관계, 소련의 유럽제국에 대한 공산주의의 팽창 문제였다. 북한의 전쟁 준비나 그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고 있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전쟁전문가들이 전쟁의 냄새를 맡았음에도 정치인들은 이같은 직감을 말하는 군인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이 바로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도쿄의 정보 보고가 워싱턴에서는 무시됐다. ‘6·25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전세계가 놀랐고 한결같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적인 대처를 해야 했던 도쿄 주재 미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무시무시한 악몽을 꾼 느낌이었다. 그것은 9년 전 일요일 아침 같은 시간에 필리핀 마닐라 호텔에서 연락받은 것과 똑같은 전쟁선언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외쳐댔다. ‘이건 안돼!’ ‘다시 일어나면 안돼!’ 그리곤 다시 중얼거렸다. ‘난 자야 해! 꿈을 꾸면서…’ ‘다시 전쟁을 치러선 안돼!’ 그렇게 놀라 당황했다.”

    뿐만 아니라 미 의회에서 자존심 높은 상원의원으로 꼽히는 스틸러스 브리지스 의원(예산위원, 공화당), 케네스 맥컬러 의원(민주당, 예산위원장)은 “어떻게 김일성의 남침준비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느냐?” “도대체 CIA는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이런 엄청난 전쟁준비를 몰랐단 말인가?”라고 개탄했다. 이들은 정보관계자들(그 당시 CIA국장인 힐렌 쾨터장군 포함)을 불러 청문회를 열고 흥분된 어조로 “미국이 동양의 골칫덩어리들에 의해 순 병신이 됐다”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도 ‘CIA 보고서’를 읽고난 후 화가 난 어조로 “난 CIA가 정보기관인 줄 알았지 게시판(a bulletin board)인 줄은 몰랐다”고 빈정거릴 정도였다.

    미국 정가에서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줄은 전혀 몰랐다는 표현이다. 그만큼 북한을 낮게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보에 어두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한체제의 현재 능력’이라는 1950년 6월19일자의 ‘CIA 보고’를 보자. 한마디로 북한은 ‘전쟁수행능력은 없고, 경제 건설, 노동당 창건과 공고화, 간부육성 같은 내부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남한에 대해서는 종전에 하던 방식의 연장선으로 게릴라 활동 전개, 남한 정부 전복을 위한 사보타지 및 파업 조종,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선전 선동하는 활동을 하면서 소련공산주의자들의 위성국가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오판

    결과적으로 볼 때 CIA가 6·25 전쟁을 불과 일주일 앞둔 정보보고서에서 이런 정도의 분석을 했다면 실로 엄청난 과오다. 무능한 분석관이 있었거나 엉터리 보고서가 올라갔을 것이라는 추측밖에는 할 수가 없다.

    다만 CIA는 장기적인 군사행동은 가능할 수 있으나 소련의 지원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간단하게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비록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 치더라도 소련과 중공의 참여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상황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쟁수행작업이 없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① 남한의 반공 ②남한 국군의 저항 ③공산정부에 대한 빈약한 지지 ④행정능력과 기술자의 부족현상.

    이에 견주어 도쿄 미 극동사령부의 같은 날짜 정보보고서는 꽤 구체적인 것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전쟁 준비에 대해 감을 잡은 듯한 내용을 담았다.

    윌로비 장군(Gen. Charles Willoughby)이 이끈 정보참모부(G-2)의 보고서(1950년 6월19일자 2840호)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민군 제6사단의 남진

    인민군 제6사단은 1950년 5월10일까지는 해주에 사단본부를 두었으나 신막으로 남진 배치됐다. 원래 신의주에 있다가 황해도 재령과 사리원 근처로 이동한 것은 전쟁시 주력부대로서 서부전선의 최강부대였던 까닭이다.

    이들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모택동 휘하에서 장개석군을 물리친 실전경험이 있는 CCF(Chinese Communist Force, 중공군) 출신이었다. 실제로 인민군 6사단은 6·25전쟁이 터진 뒤에 서울을 점령하는 인민군 제4사단을 지원하면서, 수원을 거쳐 충청도 전라도 등지를 점령하는 주력부대가 되었다.

    물론 낙동강 도강 작전에도 투입되었다. 특히 이 부대 사단장인 방호산은 이중영웅의 칭호를 받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그러나 그는 전쟁 후에 김일성 일파의 비판을 받고 숙청된다).

    이 보고서는 안타깝게도 6사단의 이동상황을 사단 전체의 이동이 아니라 6사단 3연대의 이동으로만 보았다. 38선 근처로 집결하는 전투상황의 부대이동으로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민군 제1사단에 대한 보고엔 1950년 4월22일까지 평양에 주둔했다가 역시 38선의 집결구(集結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항을 담고 있다.

    1사단은 소련제 탱크 50대를 보유했으며 기계화부대로 무장된 제2대대 제1중대 및 기갑부대(unit 156), 통신대대, 공병대대, 400명에 이르는 탱크부대 요원을 거느린 것으로 보고하고, 남촌점에 집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민군 제3사단은 철원에서 금화로 이동하고 있는 바, 역시 38선 근접지역을 집결구로 하여 이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전에 중공군에 있었던 조선인 출신 병력으로 편성된 부대가 청진으로부터 38선 근방 강원도 양양으로 이동한 것 역시 집결구 이동으로 보았고, 여기엔 200마리의 말로 편성된 기마병도 포함돼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보고는 지하에 숨겨졌던 무기적재소(태광리 소재)가 발견되었으며, 1개 대대가 3년간 쓸 수 있는 무기가 적재되어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인민군에게 무기를 지급하려는 시도인 것 같다고 분석하면서도 너무 큰(?) 사항이라서 ‘의심스럽다’고 주(註)를 달았다. 마지막으로 이 G-2 문서는 모든 운전사, 특히 트럭운전사들이 징발되어 훈련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트럭도 군에 징발당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북한은 1945년 이래 5년이 지난 이 시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여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평가는 지극히 안이했다. 6·25전쟁이 터지는 순간까지 미국은 북한의 전쟁준비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연구하던 중에 비밀보고서가 아니였는데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뭉치(40여쪽)를 발견했다. 6·25전쟁 당시 극동사령부 소속 정보참모부 부장이었던 찰스 윌로비 장군의 개인보관문서철이다.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윌로비 장군 자신이 서명하고 엮어놓은 ‘Aid And Comfort To The Enemy(적에 대한 격려와 협조)’라는 풍자적인 제목 아래 (Trends in Korean Press Reports)이란 부제를 달고 전쟁 상황을 모아 정리해 놓은 것이다.(Gen. Charles A. Willoughby, Aid and Comfort to the enemy, Trends in Korean Press Reports, Tokyo, 1951.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연구소 소장)

    이 자료 가운데 본문에 소개한 보고서를 보면 윌로비 장군의 정보 자료에는 6·25전쟁 발발에 대한 예고가 이미 1950년 1월에 있었고, 같은해 3월에도 ‘G-2 report’(일일정보 일지보고서) 형식으로 워싱턴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윌로비 장군이 6개월 전에 전쟁 조짐을 발견하여 워싱턴 당국에 보고했으나 무시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워싱턴 당국이란 일차적으로 국무부이며 이차적으로는 CIA와 군당국자다.

    맥아더 원수 휘하에서 오랫동안 정보참모를 한 윌로비 장군은 유능한 정보전문가였다. 하지만 워싱턴 당국은 ‘극동사령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애치슨라인에 들어있는 필리핀의 마닐라 호주의 멜버른, 모어즈비, 도쿄 정보에 더욱 신경을 썼던 것이다.

    ‘맥아더 원수 연구’로 유명한 D. 제임스 클레이턴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워싱턴 당국이 윌로비 장군 정보보고서를 깎아내렸다고 기술한다.

    첫째, CIA나 국무부 당국자들은 윌로비 장군이 오만하고 성미가 급하다고 보았다. 그들의 호의를 사지 못했기 때문에 윌로비의 정보는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둘째는 1949년 6월에 선언한 바 있듯이 한국은 미극동사령부 관할지역 밖에 있었다. 윌로비가 한국에 관한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그저 ‘시끄러운 군소리’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윌로비 장군은 워싱턴 당국의 정책 담당자들이 한반도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로서의 직감에 따라 한반도 내에 그의 정보조직을 만들었다. 바로 그것이 Korean Liason Office(KLO)로 G-2와 직결시켜 북한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던 것이다. 워싱턴 당국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윌로비의 정보는 그저 ‘잡다한 소리’(…so his KLO was regarded by some in Washington as a brazen, extralegal creation)라고 무시했다.

    ‘KLO 부대’

    8240부대 또는 KLO(Korea Liaison Office)로 불리는 정보 및 첩보부대는 원래 8086부대로 알려진 미8군 소속의 빨치산부대를 흡수해 한국전에 투입한 부대였다. 이 부대는 6·25전쟁 당시 도쿄에 있던 미극동사령부 정보처 소속으로 맹활약했다.

    정보활동은 원래 CIA가 했어야 하나 윌로비 장군의 정보팀이 단연 우세했다. 예를 들면 CIA는 북한에 요원 15명을 파견했으나, 8240부대는 65명을 두었다. 그러나 정책결정권이 있는 CIA에게 윌로비 장군은 밀렸다. 그의 매일정보일지를 살펴본 필자 판단으로는 그의 보고가 적에 대한 정보 자체일 뿐 정책수행자들의 ‘정책(policy, strategy)’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 같다.

    윌로비 장군의 보고서 중에서 1950년 6월24일자 보고인 #2945는 심각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인민군 제4사단(3일 후에 서울에 진입하는 부대. 서울 공략의 수훈부대로 ‘서울근위사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945년 9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싸운 중국 인민해방군출신 조선인들로 조직, 가장 강력한 부대로 평가받았다. 이들의 원위치는 진남포였으나 전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1950년 6월15일 주둔지를 떠나 6월18일에는 남천을 지나고 6월23일까지 집결구인 적곡리에 모였다)의 부대 이동에 관한 정보와 특히 38선 근처 집결구(集結區)에 대한 확실한 정황을 분석할수 있는 정보자료다.

    6월24일자 보고서는 (1) 인민군 4사단에 관한 동정 (2) 4사단이 소련과 중국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병력이라는 것과 특히 미제 M-1소총을 소지했다는 점 (3) 4사단에 관한 많은 정보는 전에도 여러번 통보했다는 사실과 함께 이권무(李權武)가 사단장이라는 사실 (4) 소련 제7태평양함대(3척의 8000t급 순양함, 46척의 잠수함 포함)의 수상쩍은 움직임과 블라디보스토크항의 소련 해군 활동 (5) 이미 지난 3∼4월에 내려졌던 ‘38선 부근에서 민간인 철수명령’을 상기하면서 (정보보고서 번호 #2808호, 2791호) 6월24일 현재 민간인이 철수하지 않은 지역을 강조하고, 북한 정부가 38선에서 민간인을 대피시키면서 건설 현장에 징발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점 등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

    대통령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아시아대륙의 반도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당장 전쟁 기운이 발생하고 있는 한반도를 무시했다. 당시 미국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오만했거나 무식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공산주의의 전술과 공작을 경험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는 점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큰 의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오판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당시 한국은 전쟁 준비를 감추고 있던 북한을 과소평가하고 자만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명령만 내리면 이북의 평양, 원산까지 하루에 완전히 점령할 자신과 실력이 있다”고 했다. ‘호랑이 부대’로 자칭하던 김석원 장군은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먹으며, 저녁은 신의주에서…”식으로 빈소리를 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윤치영씨도 “…남북통일의 유일한 길은 이북의 실지(失地)를 대한민국의 힘으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금년 국군의 목표는 실천 행동으로써 ‘미회복 지구’를 회복하고 국토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말해 북한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구실을 주었다.

    당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이었던 유양수씨(柳陽洙)의 증언을 들어보면 더욱 가관이었다고 판단된다. 전투정보과에는 북한반과 남한반이 있었다. 이 부서에는 당시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면한 박정희씨가 문관 자격으로 있었고, 북한반장으로 김정숙 대위 김종필(JP)중위 등 육사 8기생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전투정보과 북한반은 미국 정보원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그런 대로 북한 인민군의 38선 집결상황과 공격준비가 100% 완료된 것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국장인 장도영 대령에게 보고했지만 그 반응은 냉담했다.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심각했는데도 국장급 이상 간부,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신성모씨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않았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걱정거리’를 유보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유양수 과장은 이를 고민하다가 군의 명령계통을 어길 수 없어 상관인 장도영 국장에게 재차 보고 형식으로 채근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과장자리를 면책당하고 6사단 전투정보과로 전보 명령을 받는다. 결국 대한민국은 육군본부에 전투정보과 과장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된다. 유양수 과장은 6·25가 터진 당일 새벽에 원주로 떠나 6사단(당시 김종오 대령이 사단장이었다) 정보참모로 부임한다.

    따지고 보면 1950년 당시 한국군은 물론 미극동사령부,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간과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실수를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청년시절(약15년간)에 경험했던 반일독립무장투쟁을 밑천삼아 군사력을 길러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을 면밀히 준비해왔던 것이다.

    북한은 위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원래의 계획대로 남한을 점령했고, 남한 사람들은 희생을 당했다.

    남한의 정치인들이 총자루 한번 잡아보지 못한 지식인들로 신사였다면, 북한의 권력자들은 김일성을 비롯해 일제와 직접 맞서싸웠던 무장전사라는 사실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또 오늘날 이상스럽게도 한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박정희대통령을 제1인자로 꼽는 이유도 한번 더 음미해볼 일이다.

    난시(難時)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에선 군대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정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김일성의 대일무장투쟁 경험은 ‘남조선혁명무력통일전쟁’을 위한 자산이었고 이러한 체험을 보완해 가면서 남침전쟁을 계획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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