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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세계의 ‘살기 좋은 도시’를 가다 ⑥

인간적 정취와 예술적 향기 넘치는 귀족풍 도시

오스트리아 빈

  • 안기석 <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 daum@donga.com

인간적 정취와 예술적 향기 넘치는 귀족풍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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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바로크, 고딕, 유겐트슈틸 양식의 웅장하고 화려한 17, 18세기 건축물과 유엔 기구 등의 초현대식 건물이 공존하고 왈츠와 재즈의 선율이 어우러지는 멀티 문화의 중심지다. 인간적인 정취와 문화의 향기에 마음껏 취할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왈츠 선율과 그윽한 커피향이 떠오르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이곳 시민들이 즐기는 하루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주말인 지난 8월25일 밤 10시경, 빈 시청 정문 앞에 세워진 대형 스크린에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랴’의 대단원이 웅장한 합창과 함께 막을 내리고 어둠에 묻혀 있던 고풍스런 시청건물이 은은한 조명으로 윤곽을 드러내자 5000여 관중은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젊은 연인들과 중년 부부들은 대형 스크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정겹게 귓속말을 나누거나 입을 맞추고 빈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시청 앞 공원 주위에 늘어서 있는 간이음식점에서 맥주나 음료수를 마시며 흥겹게 이야기를 나눈다. 늦은 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실외등 아래에서 어울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빈 필름 페스티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공연과 클래식 연주회 실황을 녹화해 보여주는 이 행사는 빈 시청이 마련한 것으로 한여름인 7, 8월에 빈 시청 앞 광장에서 펼쳐진다. 올해는 베르디 서거 100주년 기념으로 ‘일 트로바토레’, ‘맥베스’ ‘오델로’ 등 베르디의 오페라를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미카엘 호이플 시장이 말했듯이 빈 필름 페스티벌은 빈 시민뿐 아니라 빈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와 해외 각지의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빈의 여름밤’을 선사했다.

빈 시청의 대외홍보담당자인 에바 가스너 씨는 “빈의 유명한 예술 공연은 봄과 가을에 있는데 그 빈 틈을 메우기 위해 마련한 필름 페스티벌에 대한 반응이 좋습니다. 시가 공간을 마련해 주니까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젊은이들은 이때 자신의 짝을 발견하기도 하지요”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평화로운 도나우인젤

빈의 주말 아침은 이 시를 가로지르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가에서 볼 만하다. 이 도나우강 사이에는 42㎞의 긴 띠처럼 늘어져 있는 인공섬이 있는데 ‘도나우인젤’이라고 부른다. 아침 햇살이 푸른 강물과 잔디밭 위로 밝게 비치는 도나우인젤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젊은이들, 강변에서 낚시를 즐기는 가족들, 옷을 훌훌 벗고 일광욕을 즐기며 조간신문을 읽는 중년 남자, 가끔씩 사람들 주변으로 접근했다가 멀어지는 백조들이 어울려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연출하고 있다. 도나우인젤은 서울의 한강 둔치와 같은 구실을 하는 셈인데 이 섬 전체가 빈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빈 시민들이 여름 휴가를 떠나 관광객들만 오가는 도심에도 점심시간이 되면 육중한 건물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빈의 명물인 커피하우스와 레스토랑의 야외 공간과 도심 곳곳에 있는 공원 주위에서는 점심식사를 즐기는 빈 시민들로 가득 차 보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즐겨 찾았다는 란트만하우스는 빈을 대표하는 커피하우스다. 빈 사람들은 여름에는 실내보다는 바깥에서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신다. 땡볕에서도 흰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을 한 웨이터들이 정중하게 서비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빈 시청의 여직원은 “여름에는 야외에서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지만 겨울에 실내에서 유리창 바깥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맛은 일품이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빈의 커피 문화는 유명하다. 커피하우스는 수백 년 동안 빈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애용돼왔다. 영국의 팝이 여론형성의 공간으로 활용된다면 빈의 커피하우스는 그 이상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란트만하우스는 연극극장인 부르크테아터 옆에 있는데 이곳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나온 사람들이나 배우, 언론인, 그리고 정치가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한때 작가와 자유사상가들의 집결지였던 센트랄, 보헤미안 분위기의 하벨카, 모차르트가 연주하기도 했던 프라우엔후버가 유명하다.

빈시민들은 커피하우스에 와서 ‘커피 한 잔만’이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커피 종류가 수십가지가 넘기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커피를 아주 세세하게 주문한다. 우유를 첨가한 브라우너, 뜨거운 우유를 넣은 멜랑게, 특별히 진한 쿠르츠, 크림을 첨가한 오베르스, 진한 블랙커피인 모카, 소량의 우유 거품를 첨가한 카푸치노, 소량의 크림을 첨가한 콘줄 등 다양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말하는 ‘비엔나커피’는 여기서 주문해도 나오지 않는다.

인간을 배려하는 도시

현대식 고층 빌딩 숲에서 바쁘게 살던 사람이 17, 18세기의 고풍스런 건물이 조각품처럼 진열돼 있는 빈에 들어오면 약간은 느리고 우아하게 살던 ‘귀족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실제로 빈 중심지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모습이 눈에 띈다. 빈의 명물인 피아커란 관광용 마차가 자전거 승용차 버스 전차 등과 같은 도로를 사용하고 있는데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들과 썩 잘 어울린다. 이 마차는 투박한 중산모를 쓰고 구레나룻 기른 마부가 끄는데 주행하는 거리는 도심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 관광을 온 가족이나 커플이 주로 애용하는데 귀족시대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다만 마차를 끄는 말 냄새까지 낭만스럽게 여길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속도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이 휴식을 위해 한번쯤 방문해볼 만한 곳으로는 빈이 적합하겠지만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무척 답답하고 불편하지 않을까. 그러나 영국의 컨설팅업체인 머서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도시 환경 조사에 따르면 빈은 ‘세계의 살기 좋은 도시’ 베스트 10 중에 늘 3, 4위에 오른다. 빈이 ‘보기 좋은 도시’일 뿐 아니라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빈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한국 교민들은 첫째 이유로 한결같이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오스트리아인들이야 자기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면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고국을 떠나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그 도시가 자신을 냉대하는지 아닌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법이다. 빈 한인회 부회장 김종민(金鍾珉·42) 아시아하우스 대표의 말이다.

“처음에 이민왔을 때 아무 연고도 없는데 담보도 없이 2000만원을 오스트리아은행에서 대출해줬어요. 앞으로 동구에 투자하고 싶다는 말만 듣고 신용대출을 해줬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놀랐지요. 한번은 하수구에 가게열쇠가 떨어졌는데 한국으로 말하면 구청직원이 와서 긴 막대기에 자석을 달아 꺼내줬어요. 빈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현재 영화와 텔레비전 광고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는 정양순씨도 빈에 사는 매력의 1순위로 ‘인간적인 도시’라고 꼽았다. 정씨는 간호사로 빈에 와서 빈 출신의 오스트리아 남자과 결혼했다.

“그 동안 외국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소외감이나 갈등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배려를 해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급히 한국에 가야 하는데 여권을 보니 바로 다음날이 만기일이에요. 그래서 급하게 여권과에 전화를 해서 절박한 사정을 말했더니 마감시간이 끝났는데도 오라고 해요. 그래서 갔더니 ‘처리를 해놓을 테니 내일 아침 8시 전에 와서 재발급한 여권을 찾아가라’고 하잖아요. 참으로 감동받았어요.”

유럽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빈의 인간적인 포용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동구 붕괴시의 상황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위기에 처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발칸 3국의 피난민들이 빈의 문을 두드렸을 때 안식처를 제공해줬다는 것. 빈은 면적 415㎢에 160만명의 시민이 살고 있는데 이중 30만명이 이민자라고 한다.

“빈은 오래 전부터 인구의 변화가 별로 없었어요. 1980년대 후반 동구가 무너지면서 수많은 이민자가 몰려와 한때 인구가 증가했으나 이들 중 상당수가 런던이나 파리로 빠져 나가면서 감소했지요.”

빈 시청 도시계획 담당자 미트링거(45) 씨의 말이다.

빈을 살기 좋은 도시로 꼽는 둘째 이유는 ‘문화의 향기가 나는 도시’라는 것이다. 이 점은 내외국인 할 것이 없이 거론하는 말이다. 빈은 역사가 오랜 고도인 만큼 문화의 퇴적층은 두텁고 다양하다. 빈은 원래 켈트족의 주거지였는데 로마제국의 통치 시기에는 요새로 바뀌었고 10세기 독일의 바벤베르크 왕조가 빈을 차지한 뒤에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들어선 뒤 한때 투르크 제국의 침략을 받기는 했지만 이들이 물러간 17세기 이후 빈은 대제국의 문화 중심지로 크게 부흥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몰락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에 합병되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현재에도 옛 영화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을 빈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빈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다. 건물 외벽에 낀 묵은 때를 벗겨내고 내부 구조물을 개조하는 작업은 빈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전문가인 에리히 노이게바우어(51)씨는 한마디로 “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빈은 삶의 질이 높은 예술과 문화의 도시”라고 말했다.

“하룻밤에 들을 만한 연주회가 열 곳에서 열리고 볼 만한 연극 열 편이 공연되고 신나게 춤출 수 있는 댄스장 열 곳이 늘 열려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 때부터 빈은 유럽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명성 있는 예술가들은 모두 빈으로 모여들었고 유럽의 다양한 문화가 빈으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예술과 문화에 관한 한 부족함이 없습니다. 물론 현대적인 대중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미국으로 가고 싶어하겠죠. 그러나 세계 3대 오페라극장 중 하나인 빈 오페라극장에는 서서 들을 각오만 하면 50실링만 내면 들어갈 수 있어요. 세계적인 공연도 이 돈으로 볼 수 있어요. 물론 아래층에는 5000실링이라는 비싼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지만….”

1실링을 80원으로 환산하면 단돈 4000원으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세계적인 가수의 실황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석표는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구하기 힘들다. 입장권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입석표는 동이 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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