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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오사마 빈 라덴! 감춰진 진실

11월 세계 동시출간 CNN기자의 역저 ‘Holy War’(聖戰) 긴급입수 발췌

  • 이윤섭 < 전문번역가 >

인간 오사마 빈 라덴! 감춰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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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은 이슬람 세계에 대격변이 일어난 해다. 2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다. 팔레비 국왕은 해외망명을 떠나고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 되었다.

3월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협정을 체결해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경악했다. 이 평화협정에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조항이 없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이슬람 형제인 팔레스타인을 포기한 ‘배교자’로 인식되었다.

11월에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 세계를 놀라게 했다. 먼저 이란 대학생들이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난입해 미국 외교관들을 간첩 혐의로 구금했다. 11월20일에는 무장한 이슬람주의자 수백 명이 성지 메카의 이슬람사원을 점거했다. 사우디의 왕실수비대는 2주 동안 사원을 외곽 포위했을 뿐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이집트 특수부대가 와서 진압에 성공한다.

12월 말에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 사건으로 이슬람권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이 이슬람교 국가를 무력 점령한 사실보다 이슬람교도를 더 놀라고 흥분케 할 일은 없었다.

소련이 무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즉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분노의 함성이 일었다. 1980년 1월27일, 35개 이슬람교 국가 외무부 장관이 모여 특별회담을 가졌다. 이 모임은 ‘아프가니스탄 국민에 대한 소련의 무력 침공’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모든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조건 즉각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소련이 세운 꼭두각시 정권인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결코 승인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군이 침공한지 몇 주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80년 1월, 빈 라덴은 파키스탄으로 가서 아프간 무자헤딘 지도자인 부르하누딘 라비니와 압둘 사이아프를 만났다. 빈 라덴은 이전 성지 순례중 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사우디로 돌아온 그는 가족에게 무자헤딘 지원자금을 모으자고 제의했고 파키스탄에도 자주 가 모금 활동을 벌였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련군에 대항해 이슬람 세계가 벌인 투쟁은 1930년대 일어난 스페인 내전과 닮은 점이 많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전세계에서 몰려와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을 상대로 싸웠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독실한 무슬림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군과 맞섰다. 빈 라덴은 모금 활동과 참전할 이슬람 전사 모집 운동에 열중했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이슬람교 국가에는 무자헤딘 훈련캠프가 세워졌다. 미국의 CIA도 비밀리에 이슬람 전사들의 대소 항전을 도왔다.

스타가 된 빈 라덴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과 아프간 무자헤딘의 관계는 좀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부 언론은 미국이 이들을 키웠으며 빈 라덴도 미국의 자금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자금지원과 무기공급은 파키스탄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구체적인 지원은 파키스탄 소관이었다. CIA도 빈 라덴의 명성을 듣고 그에 대한 신상 파일을 작성하기는 했다. 그러나 빈 라덴과 미국과의 접촉은 없었다. 빈 라덴 자신이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사우디 정부도 그에게 대규모 지원을 했으므로 미국 자금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이미 빈 라덴은 “소련 다음에는 미국과 투쟁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빈 라덴은 직접 대소 항전에 참전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 아프간에 온 전사들은 1만6000명이 넘었다. 빈 라덴은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빈 라덴의 전우인 어떤 사람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전사로서의 빈 라덴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었다. 그는 항상 최선두에 서서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스스로 왕궁 같은 자신의 집에서 걸어내려와 아프가니스탄 농민, 이슬람 전사들과 함께 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고 참호를 팠다. 그것이 바로 민중과 같이 하는 ‘빈 라덴의 방식’이었다.”

1989년 2월, 거의 10년 만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소련은 나지불라를 수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카불에 세우고 돌아갔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권, 여러 이슬람 정파의 세력다툼으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국제환경도 급변했다. 1977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지하 울 하크 장군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전사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그는 1988년 8월 의문의 비행기 폭발사고로 죽었다. 곧이어 친미 성향의 베나지르 부토가 집권했다.

1989년 말, 빈 라덴은 영웅이 되어 사우디로 돌아왔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을 아프간 성전의 이상적인 모델로 받들었다. 빈 라덴은 수없이 많은 이슬람 사원 집회에 초대돼 연설했다. 그의 격정적 연설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는 공식적으로만 25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지하조직이 복사 배포한 테이프 수도 엄청났다.

빈 라덴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한다면 그 무엇도 이슬람교 국가를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아프간 성전은 이교도 초강대국에 대한 이슬람의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슬람교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권력의 정통성을 이어온 사우디 왕가는 빈 라덴의 연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 가문의 사업체가 외국정부와 민간기업에게서 많은 계약을 따낼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우디 왕가에 대한 애증

사우디에 돌아온 빈 라덴은 자신이 주장해온 이슬람적 생활방식을 실천했다. 호화 저택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침대도 없이 마루에서 잠을 잤다. 이때 그의 집을 방문한 이집트 언론인 에삼 데라즈는 빈 라덴이 마루 귀퉁이를 사무실로 삼고 가족들 또한 마루 한켠에서 생활하는 것을 목격했다. 에삼 데라즈도 방문 기간 내내 침대가 아닌 마루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1990년 8월2일,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하루 만에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침공으로 빈 라덴이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음이 입증됐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후 대중 연설을 통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파드 국왕에게 사우디를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우디 왕가는 겁에 질려 전전긍긍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사우디군은 이라크군의 상대가 못 됐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족을 비롯해 쿠웨이트 난민이 물밀듯 밀려오자 사우디는 더욱 공포에 휩싸였다. 빈 라덴은 즉시 국방부장관인 술탄 왕자를 만나 이라크의 침공에 대비한 그의 계획을 전했다. 10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계획서에서 그는 빈 라덴 가문의 건설회사 중장비를 동원해 신속히 방어 요새를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취약한 사우디군을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사우디 이슬람전사’들로 보강할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실전으로 단련된 백전노장들이었다. 빈 라덴은 이들을 쿠웨이트에 침투시켜 민중 지하드를 전개하자는 의견도 덧붙였다.

빈 라덴은 이 같은 계획을 사우디 정보부장인 투르키 왕자에게도 전했다. 이슬람국가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쫓아낼 수 있다면 사우디도 이라크를 격퇴할 수 있으며, 같은 이슬람교도인 이라크 병사들도 지하드에는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빈 라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미군 등 ‘이교도’의 군대가 사우디의 신성한 땅에 발을 들여놓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경고했다. 외국군의 사우디 주둔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사우디 국민의 정서상 도저히 정서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라크의 침략이 우려되는 위기상황에서 빈 라덴은, 여전히 나라를 걱정하는 사우디 왕가의 매우 충성스런 신하였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힌 파드 국왕은 결국 미군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빈 라덴을 비롯한 많은 사우디의 엘리트,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반대했다. 사우디 왕실은 이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결국 메카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회의에서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격퇴할 때까지만 외국군 주둔을 용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빈 라덴은 사우디에 계속 머물며 중간 노선을 택했다. 한편으로는 이라크를 비난하고 병력 철수를 요구했다. 동시에 신성모독을 내세워 외국군의 사우디 영토 내 주둔을 맹비난했다. 그는 미국 상품 불매운동 같은 시민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우리가 미국 상품을 사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는 공범자가 된다. 미국기업들은 아랍 세계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미국 정부에 세금으로 낸다. 미국 정부는 그 돈으로 이스라엘에 매년 30억달러를 원조하고 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라고 빈 라덴은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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