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일본은 왜 김정일의 돈줄을 틀어막는가

허종만 조총련 책임부의장 망명설과 괴선박 미스터리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4-11-16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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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중순, 일본 도쿄에서는 충격적인 정보가 나돌았다. 조총련 책임부의장 허종만(71)이 주일미국대사관으로 망명했다는 것이었다. 망명설이 떠돌게 된 것은 그가 일본 경시청 공안부 외사 2과의 ‘行確(행동 확인)’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 경찰이 24시간 그의 뒤를 밟다가 12월14일 주일미국대사관이 있는 도라노몬역 근처에서 놓쳐버린 것이다.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는 소문이 나온 것이다.

    사실 이 망명설이 나올 만한 근거도 있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허종만은 벌써 여러차례 김정일의 소환명령에 불응하여 괘씸죄로 찍힌 사실이 있었다. 2001년 11월 하순에도 그는 니가타 항에 정박해 있던 ‘만경봉 92호’에 불려갔다가 하루만에 배에서 내렸는데, 강제 소환을 간신히 면했다는 것이다.

    또 소환 문제를 둘러싸고 가족회의가 열렸는데 가족 모두가 “갈 테면 혼자 가라”고 북한행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 소환된 조총련 부의장 김병식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소환 그 자체는 재산 몰수와 동시에 일종의 숙청이었다.

    허종만은 북한의 소환령 이외에 일본 당국으로부터도 압박을 받고 있었다. 조긴도쿄(朝銀東京)신용조합 자금유용 의혹사건 수사의 최종 표적이 허종만이라는 소문이 일본 경시청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한으로 갈 수도 없고, 일본에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서 그가 미국 망명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던 중 12월22일 동중국해상에서 북한공작선으로 추정되는 괴선박이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허종만 행방불명과 괴선박 침몰, 이 두 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억측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때 서울에서 조긴도쿄 사건, 허종만 실종사건, 괴선박 침몰사건 등을 한줄기로 엮을 수 있는 의미있는 분석이 나왔다.



    전 조선노동당 연락부 일급공작원 출신 김아무개씨는 북한이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허종만을 제거하기 위해 급박하게 특공조를 보냈는데, 이 배가 침몰한 괴선박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수사당국이 밝힌 괴선박 루트를 따라 한국으로 7번이나 침투한 경력이 있는 그는 괴선박의 항로와 시간대별 침투 일정, 임무 등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소상히 풀이했다.

    김아무개씨의 분석은 이러하다. ▲괴선박이 일본 순시선과 맞닥뜨린 지점이 북한 공작선의 통상 항로와 일치한다.(1976년 거문도 공작 당시에도 공작선은 남포 기지에서 출항, 중국 양쯔강 하구 중간기지를 경유하여 일본 규슈 근해 공해상에서 자선(子船)을 분리한 뒤 공작지점까지 자선으로 침투하는 전술을 구사한 바 있음)

    ▲북한은 2001년 7월 일본으로부터 중고어선 48척을 밀수입한 사실이 있다. 그 이유는 공작선을 일본 어선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김씨는 이를 근거로 북한 공작선의 움직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2월15일:허종만씨 행방불명 뒤 해주기지 출항→16일:대동강변 보산기지→18일:양쯔강 하구 중간기지→일본 규슈 공해상→19일:특공대 침투→20일:엔진고장으로 표류→22일:교전 중 침몰.

    북한 공작선은 공작원의 이송이나 철수 임무가 가장 많다. 이 경우는 공작모선(약 100t급)으로 일본의 영해 부근까지 접근하고, 모선에 실려 있는 공작 자선을 분리하여 영해 안으로 들어간다. 귀순 공작원 김아무개씨는 “일본 해안은 한국 해안에 견주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 일단 모선에서 자선을 분리해서 해안 가까이 침투했다가 해안을 몇백m 남겨 놓고서는 잠수해서 상륙한다”고 말했다.

    괴선박의 임무가 테러요원 침투라고 주장한 이 전직 북한공작원의 증언처럼 침투 공작원들에게는 일본 해안은 침투하기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는 곳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안선이 한국보다 훨씬 길 뿐만 아니라, 1999년 3월 이전에는 발각되더라도 일본측이 발포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침투하는 북한 공작원들은 아예 무기를 휴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는 국가보안법도 없고, 스파이방지법도 없기 때문에 무기만 없으면 걸려보았자 출입국관리법 위반 정도로 구류를 며칠 살다가 본국으로 송환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날씨가 나빠서 긴급피난했다고 하면 금방 풀려난다는 것이다.

    허종만 망명설과 그의 테러설이 사실이라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을 능가하는 메가톤급 뉴스였다. 허종만의 직위는 황비서보다 낮지만, 그는 김정일의 돈줄이기 때문이다.

    허종만은 조총련의 대북 송금 열쇠를 쥐고 있는 조총련의 최고간부였다. 그는 김정일의 측근중의 측근으로 2001년 2월에 사망한 한덕수 조총련의장 시절부터 조총련의 재정담당 최고책임자였다. 조총련을 꾸려가는 실질적 기구인 중앙상임위원회는 의장과 책임부의장, 부의장 및 국장단 1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의장은 서만술, 책임부의장은 허종만, 부의장은 박재로·권순희·오형진·남승우·양승우·이기석·조영현 등 7명이다. 북한이 해외공민조직이라고 주장하는 조총련의 역할은 통일운동이라는 대남공작과 애국사업으로 불리는 대북경제지원사업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남공작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은 현 조총련 의장 서만술이며, 애국사업 책임자는 허종만이다.

    경남 고성 출신인 허종만은 1959년 조총련 도쿄도(東京都) 본부위원장으로 조총련 활동을 시작해, 1986년 9월 중앙위원회 부의장이 되었고, 1993년 책임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조총련 내부에서 대북지원을 총지휘했고, 일본 정계에도 깊숙한 파이프를 갖고 있다. 그는 가네마루 신(金丸 信) 전 자민당 부총재를 북한으로 데려가서 사죄와 원조 약속을 받아내 김정일의 결정적인 신임을 받았다.

    허종만은 조총련의 비공식조직인 학습조의 우두머리다. 이 학습조는 조선 노동당 일본지부 격으로 이해하면 된다. 또 그는 김병직 전 조총련 제1부의장의 인맥을 인수받았다. 일찍이 한국으로 망명하려는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저지한 것도 그가 조직한 ‘후꾸로 부대’였다.

    승승장구하던 허종만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1993년 7월 책임부의장이란 기묘한 직책을 만들어 스스로 취임하면서부터다. 그는 김정일과의 밀월을 배경으로 전횡을 일삼았다. 이는 뒤집어보면 무리한 송금으로 조총련을 무력화했다는 것이다. 북으로부터는 신임을 받을지 모르지만 동포를 착취한 탓에, 조총련 동포 사회는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조총련의 모든 자금을 주물렀기에 조긴(朝銀) 파산의 내막과 자금운용을 둘러싼 비밀을 모두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당국이 진행하고 있는 수사도 그가 증언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 정치인에게 자금을 제공한 내막을 상세히 알고 있다. 만약 그가 입을 열면 북일수교에서 활약한 자민당 의원들에게 불똥이 튀기 때문에 그들이 수사당국에 압력을 넣고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허종만 망명설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 취재처는 바로 도쿄지하철 도라노몬역에서 100m 떨어진 주일미국대사관이었다. 그러나 1월8일 주일미국대사관 당국자는 허종만의 망명설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 당국자는 “음모론에 속지말라. 허종만씨가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정보를 일본 경시청에 흘리지 않는다”고 잘라말했다.

    그런데 2001년 12월29일자로 허종만 망명설을 비중있게 다룬 슈칸 분(週刊 文春)의 한 취재기자는 “일본 공안 관계자로부터 허종만의 행방불명설이 흘러나왔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문이 흘러나왔을까?

    의문은 일본 당국의 조총련 대응과정을 보면 자연스레 풀린다. 일본 경시청 수사2과에 총원 100명 규모의 조긴도쿄(朝銀東京) 전담수사반이 정식으로 구성된 것은 지난해 10월 말이다. 이 부서는 일본채권신용은행, 도쿄상화은행 등 금융·경제범죄 수사를 전담하는 프로집단이지만 이번에는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일본 언론보도에 따르면 경시청 간부가 “조긴(朝銀)의 배후에 조총련이 있고, 그 뒤에는 북한이 있다. 북한으로의 부정송금 의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수사 당국과 조총련의 공방은 이 무렵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수사당국은 잔뜩 벼르고 일전을 준비한 것이다.

    일본 수사당국의 결과 발표에 따르면 조긴의 자금유용 수법은 이렇다. 재일 상공인에게 융자해 줄 때는 필요액보다 많은 액수를 빌려준 것으로 서류를 만들고, 실제로는 그 차액을 조긴의 조총련 가차명 계좌에 다시 입금해서 돈을 돌리며 이를 유용하는 방식이다.

    일본의 공안 관계자들은 조긴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조긴 경영에 북한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민사소송이 1998년에 있었다. 한 재일동포가 조긴 아이치(朝銀 愛知)를 상대로 이 지점 부의장이 횡령한 자신의 예금 약 17억5천만엔을 반환해달라고 청구한 것이다. 이 재판과정에서 원고측은 ‘학습조’라는 조직이 조긴 아이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재판에 제출된 조총련 내부자료에 따르면, 학습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가 조직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가 지도하는 재일조선인 김일성주의자의 혁명조직’이며 활동임무는 조국을 엄호 방위하고 일본에서 주체혁명 위업을 이루는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민사소송은 예금변제는 확정되지 않고 원고 패소로 끝났지만, 판결문은 학습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판결문을 보면 ‘피고(조긴 아이치)의 간부는 전부 학습조원에서 등용되었다. 조긴 아이치는 금융기관으로서 본래의 업무 이외에 조총련의 활동자금이나 북한에 돈을 보내는 특수임무를 행하고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원고인 재일동포 기업가는 “나의 예금은 북한에 대한 송금이나 한국의 유학생 조직, 일본 내 친북계 국회의원의 정치 자금에 쓰였다”고 말했다. 1999년 여름 일본 자민당 외교부회에서 공안관계자는 학습조에 관하여 “전국에 약 1000개 조직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 최근 전 조총련 재정부국장 한광희씨도 일본 TV아사히를 통해 “조긴은 조총련의 금고다. 간부 인사권을 조총련 중앙본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나 자신이 허종만 책임부의장의 지시에 따라 강주일(현재 북한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장)과 함께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에 돈을 가져다주는 심부름을 한 적도 있다”고 폭로했다.

    이처럼 애초에 일본 경시청이 전격작전식으로 조긴 사건을 수사했다면 허종만의 행방불명설을 흘린 이유는 몇가지로 추리할 수 있다.

    첫째는 실제로 허종만측에서 인편으로 미국망명을 타진했는데,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공안당국이 정보를 흘린 것이다. 허종만이 미국대사관으로 바로 가지 않고, 대리인을 시켜 의사를 타진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다. 둘째는 아예 북한이 허종만을 단속하게 만드는 작업으로 볼 수도 있다. 자금을 받은 정치인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허종만은 일본 당국으로서도 계륵같은 존재다. 일본당국 손으로 붙잡으면 수사과정에서 터져나올 관련 정치인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 아예 북한이 단속하게끔 만들자는 것이다. 마지막 추측은 허종만을 통해 조총련을 흔드는 것이다.

    일본이 조긴 문제를 마음먹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9·11테러 사건 이후 테러자금 제공에 반대하는 조약에 비준하면서부터다. 미국과의 조율 아래 북한의 가장 큰 돈줄인 조총련을 이 기회에 손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강경 보수파인 고이즈미 총리가 집권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과거 일본은 1999년 유엔총회에서 테러자금제공방지협약이 채택되었을 때, G7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비준 전단계인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무기수출 대금 흐름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북한의 무기수출 대금의 꼬리가 일본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 등 서명 국가들이 참여하지 않은 일본을 상당히 문제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 일본 공안조사청 조사제2부장 스가누마 고코(菅沼光弘)씨는 2001년 11월15일자 슈칸 분(週刊 文春)에 북한이 그동안 은밀히 제 3세계에 무기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돈세탁 장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 미국은 무자히딘에 스팅거 미사일을 제공했습니다. 그 때, 중국은 스팅거 미사일을 갖고 돌아가서, 자국에서 제조하기 시작했어요. 중국은 미국제의 십분의 일 가격으로 만들어 팔았는데, 이번에는 북한이 중국제를 모방해서 스팅거 미사일을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중국제보다도 더 싼 가격이었죠.

    세계의 테러조직은 자금여유가 없기 때문에 좀더 값이 싼 북한제 무기를 선호합니다. 이란이 북한제 스팅거 미사일을 사게 되었는데, 이란은 미사일 구입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구입대금을 일단 런던을 경유한 뒤, 시드니, 스위스, 도쿄로 보낸 듯합니다.

    그 돈을 회수하러 온 자가, 지난 5월1일 일본으로 불법 입국한 김정남이었습니다. 즉 북한은 일본을 돈세탁 장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금융 관련 법률에는 안전보장이라는 관점이 없기 때문에 테러조직이나 테러지원국에게 잘 이용되는 것입니다”

    조총련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일본 통일일보사 박두진 고문은 이번 조사의 뒷배경을 세가지로 진단했다.

    “첫째는 미국의 요청이다. 아무리 대장성이라도 개인정보를 함부로 수사하지 못한다. 미국의 상당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조긴도쿄 문제에 강력하게 대응한 것이다. 둘째는 일본이 이번에 테러자금제공방지협약을 비준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일본 정계 내부에 조총련을 비호해주는 보호막이 없어졌다. 이전에는 자민당의 하시모토파의 노나카(野中) 간사장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는 조총련의 허종만과 잘 통하는 사이였다. 북한의 김용순, 조총련의 허종만, 일본 정계의 노나카를 잇는 라인은 조총련을 지키는 보호막이었다. 그런데 고이즈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선이 없어졌다. 그래서 일본 수사당국이 마음 놓고 조총련을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박고문의 말은 최근 실제로 조긴 사건을 둘러싸고 일본 정가에서 벌어진 공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2월7일 사민당 부총재인 후치가미 사다오(淵上貞雄) 참의원과 가네코 데쓰오(金哲夫) 중의원 두 사람은, 조총련 간부 등 모두 8명과 함께 경시청을 방문해서 경시청 수사2과 경장보좌에게 “조총련 중앙본부에 대한 강제 수사는 부당한 정치탄압”이라는 결의문을 전달했다. 12월18일에는 다른 사민당 중의원이 같은 내용의 항의문을 갖고 조총련 간부와 함께 총리 관저를 방문했다. 이들은 결국 관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내각부에 항의문을 제출했다.

    한편 12월19일에는 자민, 민주, 자유, 보수 등 네 당의 중견의원들이 ‘조긴 문제를 생각하는 초당파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앞서의 의원들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이들은 12월21일 금융청 장관을 방문하고 “자금유용사건을 지켜보면서 가차명계좌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는 한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금융청 장관은 “현재의 예금보험법상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생각하는 모임’의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보수) 중의원은 “사건은 단순한 금융사건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보장에 관계되는 문제이고 강제수사는 당연하다”고 하면서 조긴 구제책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안보문제라고 발언한 것은 사건의 배후에 북한으로의 부정송금 의혹이 있다는 의미다. ‘생각하는 모임’은 일본국민의 혈세가 북한으로 부정 송금되고, 생화학무기 제조 등으로 유용되고 있다는 의혹이 있는 이상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하는 모임’은 새해부터 조긴에 공적자금 투입을 저지하기 위해 관련법 제정에 들어간다.

    1994년에도 현재와 비슷한 상황이 일본에서 벌어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때는 일본 당국이 조총련을 수사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미국 정부가 관련되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일본에서 북한으로 송금된 600억원에 주목하고 이 금액이 당시 문제가 되었던 북한 핵무기의 플루토늄 개발자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당시 일본의 공안 당국은 미국 정부로부터 수사의뢰가 왔기 때문에 조총련의 주거래은행인 소쿠리(足利)은행에 결산 상태를 공식 보고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대장성이 예금자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수사가 중지되었다. 당시 일본의 거부 방침에 미국은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테러 사건 이후에도 미국은 일본 정부에게 빈 라덴 관계자들의 은행 구좌를 동결할 것을 요구하고 북한과 알 카에다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는 북한과 알 카에다가 자금 측면에서 공식적으로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일미국대사관 당국자는 “우리는 9·11 테러사건이 터진 이후 북한과 알 카에다의 관련 여부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북한이 알 카에다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확인했다.

    9·11테러사건과 조긴 사건 이후 북한은 현재 자금난과 국제적 고립으로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북한의 속사정을 알려면 1994년 이후 김정일의 대외전략을 살펴야 한다. 김정일은 2000년 12월 클린턴 대통령 방북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클린턴 방북으로 미국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건은 저절로 풀린다고 예상했다.

    이는 허종만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클린턴 대통령 방북 논의가 활발하던 2000년 12월 조총련이 운영하는 일본 조선대학 교원간부평의회에서 “김정일 장군은 1994년 핵위기 이후 지난 6년동안 ‘고난의 행군’시기에 선군 정치를 펴서 이제 빛나는 성과를 얻고 있다. 장군님 말씀대로 하면 모든 것이 풀린다. 장군님의 외교정책은 선미후남(先美後南), 그 다음이 일본, 그 다음이 구라파다. 이것이 김정일 장군의 전략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김정일은 모든 대외 문제를 대미 관계 개선에 집중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자신의 주도 하에 대남 전략도 풀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 카드가 핵과 미사일이었다. 핵과 미사일은 미국도 북한에 마냥 개발중지를 강요할 수 만은 없는 사안이었다. 이는 국가의 주권사항이므로 이를 빌미로 미국이 군사행동을 벌인다면 국제사회의 반대 여론이 높아질 가능성이 컸다. 김정일은 핵과 미사일로 미국을 협상에 끌어들여 경제 봉쇄를 풀고 한국에서 원조를 받으면 일본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다.

    김정일의 자신감은 1999년 4월20일 조총련에 내린 교지에서도 드러난다. 이 날 김정일은 서만술 조총련 제1부의장을 불러 “외유내강 방식으로 조총련을 재건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한마디로 ‘붉은 기는 속에 담고 외면은 유연하게 하라’는 주문이었다.

    ‘외유’는 조총련이 우경화하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살 정도로 취직센터와 노인복지정책 등 다양한 정책을 펴서 동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것이었다. ‘내강’은 학습조(조선노동당 일본조직)에서 철저하게 김정일 숭배사상을 고취하라는 것이었다. 한 달 뒤인 1999년 5월 미국의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이 페리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은 미국이 대북한 정책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이 모든 대외 일정을 2002년 자신의 60회 생일에 맞추고 있었다. 이 해는 사망한 김일성 주석의 90회 생일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시기까지 미국과 모든 문제를 푼다는 것이었다. 그가 김대중 정부와 대화를 하면서도 군사문제를 논의하지 않은 것은 미국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한반도의 군사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국과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평양에서 서울로 온 뒤 일본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는 페리보고서를 완성해 1999년 9월 당시 임동원 장관과 일본측 파트너인 가토 심의관에게 거의 동시에 전달했다. 페리보고서가 나온 뒤 북한의 대남 정책은 확고하게 굳어졌다. 김정일은 DJ의 대북포용정책을 미국이 공감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99년 4·20 교지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2000년 한 해 내내 북한과 조총련은 대내외적으로 기세가 좋았다. 모든 면에서 여유가 있었고, 한국과 재일거류민단과의 관계에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미국에 공화당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계산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쓸 수 있는 카드도 없어졌다. 부시 정권은 핵과 미사일 문제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북한의 재래식 무기, 특히 생화학무기마저 문제삼겠다고 다그쳤다.

    만약 재래식무기마저 미국과의 협상 의제에 포함되면 북한으로서는 무장해제 당하는 꼴과 마찬가지다. 이 상황에서 김정일이 궁리를 낸 것이 러시아 방문과 중국 방문이라고 볼 수 있다. 러·중과 함께 미국의 MD에 반대하는 반MD 협약을 맺어 미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편 것이다. 조금이라도 북한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야 대미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9·11테러라는 돌발 사태로 물거품이 되었다. 장거리든 핵이든 테러와 관련되면 응징해도 좋다는 국제여론이 형성되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미국을 지원하고 나섰고, APEC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도 미국 지원 성명을 냈다. 중국은 WTO 가입과 2008년 올림픽 유치 때문에 대미관계 악화를 바라지 않았다.

    일본이 북한의 목을 더욱 조이기 시작한 것은 이무렵부터였다. 괴선박 격침사건은 이런 맥락에서 조긴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사건은 발생지점이 지점인만큼 한국과 일본, 미국의 정보기관이 모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괴선박에 대한 한·미·일 정보기관의 분석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침몰된 괴선박에는 마약과 막대한 현금이 실려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북한은 2월16일 김정일 60회 생일, 4월15일 김일성 90회 생일, 아리랑 축전 등 연이은 행사로 외화수요가 엄청나다. 아리랑 축전은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4월29일부터 6월29일까지 두 달 간 평양 5·1 경기장에서 개최하는 ‘대집단 체조(매스게임)’ 및 예술공연 행사다.

    그런데 북한은 여기에 드는 외화를 조달할 통로가 현재 거의 막혀 있다. 금강산 관광도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남쪽으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조긴 파산 사건으로 가장 중요한 돈줄인 조총련 라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그러니 마약이나 위조지폐같은 외화벌이 사업에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외정보를 다루는 국내 정보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괴선박의 임무는 김정일 생일 행사 자금 조달이었고, 마약과 현금 등 막대한 규모의 현물을 싣고 있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북한은 2월16일 김정일 생일 행사 자금 조달에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마약, 위폐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괴선박의 임무는 생일자금 조달이었다. 괴선박은 북한의 해주와 남포항 쪽에서 출발, 중국쪽으로 가서 급유를 받은 뒤, 일본 규슈 근해 바다에서 모종의 거래를 마치고 다시 중국 쪽으로 돌아가다 격침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한국해군 서해함대사령부와 동해함대사령부도 북한 괴선박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괴선박의 수도 한 두척이 아니라, 서해쪽에 4척, 동해쪽에 3척 등 모두 7척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현지의 정보 관계자들도 침몰한 괴선박은 필로폰을 밀무역하는 북한 선박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12월10일 도쿄에서 만난 주일미국대사관 당국자도 이를 확인했다.

    이 당국자는 “미국 당국이 첩보위성으로 선박의 존재를 일본에 통보해 주었다”고 했다. 그는 “특별한 군사목적을 띤 선박이었다면 미국의 첩보위성이 24시간 따라가며 감시하겠지만, 침몰한 괴선박은 그런 배가 아니라 일상적인 밀무역이나 공작활동을 하는 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초 촬영 사진 몇 컷 정도만 일본측에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괴선박 모두 7척


    일본방위청 통신실(FI·別班)은 통신감청만 하는 기구다. 태평양전쟁을 치른 국가인 일본의 감청수준은 세계최고로 알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이 독일에 보낸 간첩 조르게를 잡아낸 곳은 독일이 아니라 서울 용산의 일본군 주둔기지였다.

    일본이 통신 정보에 유리한 것은 일명 ‘코끼리 코’라고 불리는 거대한 안테나를 북해도 바로 밑에 있는 에히메, 오카나와, 미사와 등지에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미국에 뒤지는 분야는 영상(LCD)정보다. 미국은 웬만한 정보는 우주공간의 위성에서 찍은 사진으로 얻는다. 사건 발표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본 방위청은 북한 인민군의 주파수까지 도청할 실력이 있었다.

    일본 ‘現代코리아’ 니시오카 쓰토무(西岡 力)편집장도 “1998년에 각성제(필로폰)을 실은 배가 북한 해주에서 출항해서 조폭과 접선하는 것을 일본 해상보안청이 체포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미국 정찰위성 정보로 이를 잡았는데, 각성제를 실은 공작선의 모양이 이번에 침몰된 배와 똑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 위성은 이 배를 계속 추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로 바쁜 정찰 위성이 그 배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최초정보만 일본측에 제공했다. 또 공작원을 일본에 침투시키려 했다면 달이 뜨지 않는 그믐을 전후로 닷새 동안이 적기이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12월은 12월15일이 그믐이었다. 그래서 괴선박의 임무가 공작원 침투라는 분석은 맞지 않는다. 최종적인 판단은 배를 건져보아야 알겠지만 일본 공안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판단은 그 배가 각성제(필로폰)을 실은 선박이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미국과 일본은 초기단계부터 정보를 교환했다. 사건 초기 미국은 첩보위성에서 잡은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 과정에서도 계속 정보를 공유했다. 산케이신문 2002년 1월1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가고시마현 아아미 오오시마 바깥바다인 동중국해에서 발생한 괴선박 사건에서, 방일한 미 육군 참모총장이 자위대 간부들과 비밀리에 정보를 교환했음이 12월31일 밝혀졌다. …

    주일 미군 관계자에 따르면, 방일한 사람은 미 육군의 최고 책임자인 참모총장 에릭 신세키 육군 대장인데, 12월17일 오후 5시가 지나서 미군기로 아쓰기(厚木)에 도착, 12월19일 오전 9시가 지나서 알래스카로 떠나기까지 종합막료회의 간부라든가 육상 자위대 간부 등과 극비리에 회담을 가졌다. 괴선박 정보는 18일부터 들어왔으며, 일본 방위청 관계자에 따르면 회담에서는 미군이 군사첩보위성으로 잡은 괴선박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다고 한다.

    이 참모총장 앞으로는 군사첩보위성을 관리·운영하는 국가정찰국(NRO)으로부터 괴선박의 최신 정보가 들어왔으며, 이 참모총장측으로부터 그 진상이 전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자위대측도 통신시설에서 감청한 괴선박에 북한과의 교신에 관한 정보를 미군과 공유한 사실 등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처럼 괴선박은 북한산 마약을 한 배 가득 싣고 모종의 거래를 하던 배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현재 한국과 중국 일본의 마약 상습복용자들은 북한산 마약을 선호한다. 중국산이나 태국 및 동남아에서 공급되는 마약과 일본의 야쿠자조직에서 들어오는 마약에 견주어 북한산 마약은 최고품으로 통한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히로뽕은 투약한 뒤 약효가 떨어질 때가 되면 공황장애라는 현상이 생긴다. 이는 투약 후 8시간 뒤에 약효가 끝나면 손발이 저리고 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등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증상이다.

    그런데 북한산 필로폰은 놀랍게도 이런 공황장애가 없고 인간의 초능력을 극대화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북한산 마약은 대부분 중국의 삼합회 출신 조선족을 통해 한국과 일본으로 유입된다. 국내의 경우는 중국 연변과 길림성, 베이징 등지에서 조선족을 한국 내에 밀입국시키는 업자들과 결탁한 한국의 괴선박들이 마약유통에 직간접적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으로 수출되는 경우는 원산항을 출발하여 일본의 니카타항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북한의 만경봉호, 그리고 청진항을 출발하여 일본의 니카타항으로 향하는 각종 선박이 주목 대상이다.

    또 남포항에서 인천과 중국 상하이로 연결되는 선박의 항로도 국제마약조직의 루트로 추정된다. 이 중 재일 조총련계 기업과 북한의 군부가 합작으로 운영하는 와우도 선박의 냉동화물선은 정제된 마약을 밀봉 운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일본 공안당국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선박이라고 한다.

    북한은 국가안전보위부에서 통제구역으로 특별관리하고 있는 함경북도 청진, 회령시와 함경남도 요덕군, 평안남도 복창군 등지에 마약 제조시설을 갖추어 놓고 정제된 완제품을 철도와 국도를 통하여 비밀리에 운송하고 있다. 일단 혜산시로 운반된 마약은 중국의 마약 밀매 조직으로 넘어간다.

    그후 청진항과 원산항으로 옮겨진 물건은 선박을 통해 일본의 니카타로 공급되며, 평양 근교 남포항으로 운송된 마약은 동남아 및 중국 상하이, 다렌으로 각각 공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산항의 경우는 일본의 니카타를 비롯해, 시모노세키나, 오사카, 고베 등지로 공급루트를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중국과 러시아와 접한 국경지대의 마약 밀거래 주요 루트를 보면 ▲신의주와 단동을 잇는 국경선 ▲남양과 도문을 연결하는 국경지대 및 두만강역과 러시아의 핫산에 이어지는 선 등 두 개의 밀거래 선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은 군간부들이 직접 개입해서 후방지역에서 마약을 재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연변과 길림성 일대의 마약 밀매업자들은 중국의 삼합회와 러시아 마피아, 그리고 일본의 야쿠자 조직원들의 비호 아래 국경지대에서 원화와 달러로 마약을 거래한다. 이를 통해 각 항구로 운반된 마약은 선박을 통해 한국 및 중국의 베이징, 일본으로 유통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 북한 인민보안성의 군 고위급 간부와 고위층이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 마약의 중심에는 김성주 중장을 비롯하여 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산하 부서장급인 김0남 위원과 국방위원회 김0만 위원이 포함되어 있다. 김성주 중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현재는 인민보안성 고위 간부다. 이들은 모두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이들은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의 후견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이즈미의 야망


    조긴(朝銀) 사건, 허종만 망명설, 북한 괴선박 격침 등 일련의 사건에는 모두 이 기회에 북한의 돈줄을 끊어버리려는 일본 당국의 의중이 숨어 있다. 물론 이 사건들은 모두 9·11 테러 사건 이후 벌어진 일들이고 미국과의 교감 아래 이루어지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의도는 단순히 북한을 노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고이즈미 총리의 야망이 도사리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일본의 안보 능력을 ‘보통국가’ 형태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일본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일본 경제는 10년 넘게 계속된 불황으로 어렵기 짝이 없다.

    고이즈미는 10년 넘게 정체된 일본 경제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개혁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관습에 젖어 꼼짝 않는 관료-정치인-사업가를 설득해야 한다. 철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저항을 견디기 위해서는 높은 지지율과 인기가 필요하다.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의 휴고 리스톨 논설실장은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전범 앞에 참배해서 눈물을 흘리고, 일본인의 자긍심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와 일본 국내의 다수 여론이 모두 그의 돌출 행동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9·11 테러사건이 이런 고이즈미 총리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 내에서도 진보 성향의 의원들은 힘을 잃고 있다. 일본 해상 자위대의 함정이 이미 지난 12월에 인도양으로 떠났다. 지금 당장은 아프간 전쟁의 미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이지만, 앞으로는 이 선단들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본이 보통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강대국 역을 맡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다. 허종만과 조긴(朝銀) 사건, 조총련, 북한은 그 구실이고 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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