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낙타 등에서 돔 양식, 엉덩이에서 시 운율 나와

  • 입력2004-11-02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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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에서 이해하는 문학과 예술의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그것과 같을까, 다를까. 문학(아다브, adab)과 예술(팟느, fann)이 다같이 창조적으로 미적 이념을 표현한다는 점, 정신을 정화하는 배설기능을 수행한다는 점, 문학은 언어라는 간접재료를, 예술은 색과 형태가 있는 직접재료를 사용한다는 점 등에서는 이슬람이나 우리의 보편적인 이해가 같다. 또한, 예술이란 개념이 동서양이나 이슬람에서 모두 ‘기술(技術)’이란 어원에서 유래되었다는 점도 신통하게 일치한다.

    원래 그리스어의 ‘테흐네’나 라틴어의 ‘아르스(ars)’, 영어의 ‘아트(art)’, 프랑스어의 ‘아르(art)’, 독일어의 ‘퀸스트(knst), 그리고 중국어의 ‘예(藝)’나 아랍어의 ‘팟느’는 모두 기능이나 재주, 즉 기술을 뜻하는 단어였으나 근대학문이 정립되는 18세기경부터 넓은 의미의 기술과 구별하기 위해 그 뜻을 좁혀 ‘예술’이란 학문적 개념으로 한정시켰다. 그리고 예술을 크게 공간예술과 시간예술로 분류하는 것이나, ‘아름다운 예술’을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도 영어나 프랑스어, 중국어나 아랍어, 한국어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의 상호관계나 각자의 위상 및 내용에서는 서로 이해하는 바가 다르다. 넓은 의미에서 문학은 예술의 한 부분으로 구상예술에 속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역대로 문학이 차지하는 높은 위상과 역할, 그리고 예술의 상대적 한계성으로 인해 문학이 예술의 한 종속부분이 아니라 독자적인 분야로 간주되어 그 기능을 수행해왔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이해와 그 전개과정은 비이슬람지역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아랍어 ‘아답(오늘의 문학)’은 ‘우아’ ‘단정’ ‘교양’ ‘고상한 도덕’ ‘예절’ 등 인간의 훌륭한 심성을 나타내는 뜻의 단어였다. 그러다가 이슬람이 출현한 뒤 주변의 여러 문명, 특히 페르시아문명의 영향을 받아 그 뜻이 시문(나즘 nazm)이나 산문(나스르 nathr)이란 언어수단을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순화하는 고유학문(주로 시학, 음률학, 문법학)인 문학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통일적인 이슬람제국이 붕괴한 후 사양길에 접어든 전통 이슬람 학문을 보전하려고 시도한 역사사회학자 이븐 칼둔(1332~1406)은 이슬람 문학이란 “아랍식으로 시문과 산문의 기술(技術, 팟느)에 정통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러면서 그는 문학을 12학과(일름 ‘ilm), 즉 언어학 서체학 시학 시운학(詩韻學, 아루드) 각운학(脚韻學, 까피야) 품사학 형태학 파생학(派生學, 이스티까끄) 수사학(修辭學, 마아니) 미문학(美文學, 바디아) 연설학 산문학으로 나누었다. 이것이 문학에 대한 이슬람의 전통적 이해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아답’이란 개념은 확대·분화되어 이중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이븐 칼둔이 정의한 바와 같은 고유한 의미의 ‘문학’이란 전칭(專稱)을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시나 소설, 희곡, 수필, 문학평론 등 장르를 아우르는 문학의 보편적(현대적) 개념과 대체로 부합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복수인 ‘아다-브(adb)’는 하나의 학문계보 개념으로 그 의미가 크게 확대되어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인문과학’을 범칭하고 있다.

    이슬람문학과 예술의 발달사를 훑어보면, 그 주제가 꼭 ‘이슬람교적인 것’만은 아니었고, 또 창작에는 비무슬림들도 큰 족적을 남겨놓았으며, 언어를 비롯한 재료(수단)들도 다종다양했다. 왜냐하면 지구상 13억 인구를 아우르는 이슬람이 이슬람교란 종교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의 문명공동체를 형성하기는 했지만, 그 구성원은 민족이나 언어, 전통이나 풍습, 자연환경이나 생활여건, 심지어 종교 등에서 실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의 예술인 문학에서 이러한 차별성은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문학과 예술은 내용과 형식에서 이슬람문명의 다양성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슬람의 문학과 예술을 그 표현수단인 언어와 민족전통을 기준으로 하여 아랍권, 페르시아권, 터키권, 중앙아시아권, 인도권, 말레이권, 중국권, 아프리카권 등 주요한 몇 개의 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아랍권은 이슬람의 문학과 예술의 발단과 그 발달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주로 이슬람-아랍권의 문학과 예술을 전형(典型)으로 삼아 논한다.

    문학은 특정 언어와 숙명적인 관계에 있게 마련이다. 아랍어는 세계 3대 어족의 하나인 셈어족의 적통어(嫡統語)로서 근 2000년간 ‘불변의 전통’을 이어온 세계 최장수의 살아있는 언어이며, 명실상부한 문학어다. 그만큼 시를 비롯한 문학은 아랍세계에서 일찍부터 싹텄다. 그러다가 이슬람교의 출현으로 인해 아랍세계가 이슬람문명의 요람으로 변모해감에 따라 그곳에서 고전 아랍문학을 계승한 신형 이슬람문학, 이를테면 이슬람-아랍문학이 탄생했다.

    이슬람문학은 이슬람의 출현(722)을 기점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 1400년간의 긴 세월 동안 면면히 생명력을 발휘해왔다. 이슬람문학의 발달과정은 크게 형성기(이슬람의 출현~우마위야조 이슬람제국의 멸망, 622~750)와 전성기(압바스조 아랍제국시대, 751~1258), 침체기(통일 아랍제국의 멸망~오스만제국의 멸망, 1258~1922), 부흥기(1920년대~현재)의 4개 시기(단계)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이슬람문학은 비록 페르시아문학 같은 주변 문학의 영향을 받아 출현했지만, 그 뿌리는 어디까지나 전대인 자힐리야시대(몽매시대)의 문학(약 150년간)이며 그 계승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노래시를 위주로 한 구전문학이었다. 이 시대를 이은 이슬람문학의 형성기에는 이슬람교의 출현과 더불어 정통칼리파 시대(632~661)에 이슬람문학의 최대 걸작이자 원천으로 평가받는 경전 ‘꾸르안’이 편집됨으로써 이슬람문학의 근간이 마련되었다.

    ‘꾸르안’은 훈계, 충고, 경고, 약속, 설화 등 내용을 포함한 각운(脚韻)의 산문체다. 따라서 문학의 주제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구전 중심의 문학에서 문자 중심의 문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미증유의 산문 문학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슬람문학사에서는 이 형성기의 문학을 ‘우마위야 시대 문학’이라고도 하고, 전대인 자힐리야 시대에 대비해 ‘이슬람 시대 문학’ 혹은 ‘이슬람 초기 문학’이라고도 한다.

    아랍 희곡예술의 완성자는 평생 70여 편의 작품을 쓴 이집트의 타우픽 하킴(1904~1987)이다. 작가는 자신의 극을 주지극(主知劇), 사회극, 다양한 극, 현대 부조리극의 4대 범주로 구분하는데, 주종은 철학적 메시지가 담긴 주지극이다. 첫번째 작품인 ‘동굴 속의 사람들’(1933)을 비롯한 그의 주지극은 주로 경전 ‘꾸르안’과 ‘천일야화’, 그리스 신화 등의 고전으로부터 소재를 취해 인간과 시간 및 공간의 갈등, 꿈과 현실 사이의 혼미와 갈등, 삶과 예술의 갈등 등 철학적 주제를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다. 타우픽 하킴 희곡의 특징은 처음부터 공연을 목적으로 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희곡으로 읽히기 위한 레제 드라마라는 점이다.

    이슬람 예술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음악이다. 음악은 전통적으로 무슬림들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갓 오락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슬람 학문의 한 분야로 위상을 굳혀왔다. 따라서 다양한 영역을 포함한 음악을 내용과 형태에 따라 귀족이나 도시사회의 취향에 맞는 전문성과 심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음악과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반영하는 소박한 대중음악, 그리고 각종 종교행사에 이바지하는 종교음악과 속인들의 애환을 표현하는 세속음악 등으로 구분했다.

    이슬람 음악은 일정한 음절 조절에 의해 노랫가락이 편성되고 이에 춤사위가 곁들여지며, 운율적 시구가 노래 가사로 되기도 한다. 또한 시행(詩行)이 음악적 리듬(운율)을 타기 때문에 음악과 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음악의 선법(旋法, modes)은 다양하고 폭도 넓다.

    이슬람 음악가들은 이슬람 출현 이전에 주로 구전으로 전하던 민속음악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등 주변국들로부터 유입된 음악을 융화·접목시켜 이른바 ‘새로운 음악’, 즉 이슬람 음악을 창출했다. 이렇게 창출된 음악은 이슬람교의 부흥과 궤를 같이하면서 발달해왔다. 곡조에 맞추는 경전 ‘꾸르안’의 독송과 12개의 음절로 구성된 ‘아잔’(기도 시간을 알리는 일 5회의 외침), 그리고 종교적 축제에 부르는 찬가 등에서 보다시피 무슬림들의 종교생활은 음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수피즘(신비주의) 교단에서 음악의 비중은 더욱 컸다. 이 교단에서 삼아(al-Sam、a), 즉 ‘음악의 경청’은 춤과 더불어 빠지지 않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들은 삼아야말로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고” “알라의 존재 앞에서 베일을 벗기는 영혼의 장신구”이며, 음성과 몸짓, 악기는 구도자로 하여금 정신적인 수련과정에서 황홀경에 이르게 함으로써 알라와의 합일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음악은 하나의 ‘필수품’이었다.

    음악이란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에 쾌락과 타락의 ‘안내자’란 부정적 일면도 갖고 있다. 이슬람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슬람 사회에서 음악이 허용될 수 있다면 어떠한 음악만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은 이슬람 출현 직후부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교조 무함마드는 대중음악은 허용했으나 예술음악은 반대했다는 것이 음악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가 하면 수피즘을 정통 쑤니파 신학에 접목시킨 수피즘 대가 가잘리( ~1111)는 ‘종교학의 부활’이라는 저서에서 세속적 음악에 유혹당하지 않으려면 악기를 부수고 가수를 쫓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논쟁과정에서 음악이론을 확립하기 위한 학자들, 특히 철학자들의 연구는 줄곧 이어져왔으며, 음악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연구성과들이 나왔다.

    ‘아랍의 찰학자’로 알려진 킨디( ~873)의 음악관련 논문 13편, ‘제2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리운 팔라비(870~950)의 ‘음악전서(Kit bu、l Msq、l Kabr)’, 아스바하니의 ‘노래의 책(Kitbu、l Aghn)’ 등 다수의 음악관련 연구서에서는 음악의 윤리와 미학문제, 작곡이론, 음성학, 악기제작기술 등 일련의 음악이론과 실천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슬람-아랍 음악을 들어보면 서양 음악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 음악의 음조는 반음이 잘 배합된 12개 음이 기본이 되어 한 옥타브를 이루지만, 이슬람 음악은 4분의 1음이 기본이 되는 24개 음이 한 옥타브를 이루며, 이로써 서양 음악보다 풍부한 음조를 배열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슬프고 애처로운 감정을 자아낸다.

    이와 더불어 서양 음악이 단지 장조와 단조만을 사용하는 데 비해 이슬람 음악은 여러 음계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적(多音的)이고 한 옥타브 안에서 같은 멜로디가 표현되는 서양 음악과는 대조적으로 이슬람 음악은 하나의 소리가 멜로디를 운용하고, 많아야 2개의 소리가 같은 멜로디를 나타냄으로써 멜로디의 형태가 하나의 음처럼 순수하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이슬람 음악과 운명을 같이한 전통악기로는 미즈하르(mizhar, 가죽으로 만든 류트) 미즈마르(mizmr, 오보에) 나이(ny, 퉁소) 톼브르(tabl, 장구) 도우프(dauf, 탬버린) 등이 있다.

    이슬람 음악은 일찍이 그리스 음악을 받아들여 이슬람 음악을 정립하는 데 적절히 활용했으며, 그것이 다시 안달루스(스페인)를 거쳐 유럽에 전수됨으로써 유럽 음악의 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그레고리안 성가 중심의 교회음악에 지배되던 중세 유럽 음악은 신선한 이슬람 음악의 이론과 악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여 르네상스시대 세속음악으로 전환했다.

    아랍의 대표적 현악기인 우드(ud, 페르시아의 현악기 바르바트를 개량한 것)가 유럽에 전해져 중세의 류트(lute, 14~17세기의 기타 같은 현악기)가 만들어졌다. 요컨대 이슬람 음악은 중세 유럽 음악을 교회음악으로부터 세속음악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슬람 미술은 하나의 융합미술이다. 이슬람 출현 이전의 아랍 유목민들에게는 조형예술문화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이슬람은 정복한 주변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조형예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 중앙아시아로부터 각각 건축술과 공예, 직조술, 세밀화(細密畵) 등의 기법이나 모티프를 수입해 이슬람 미술의 기반을 구축하고, 여기에 그리스나 비잔틴의 다양한 미술요소들을 첨가했다.

    이슬람 회화는 내용에서 인물이나 정물(靜物)의 표현은 삼가고, 기법에서는 색채의 구성과 선의 효과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벽화와 세밀화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벽화에는 모자이크 벽화와 프레스코 벽화가 주류를 이룬다.

    모자이크 벽화는 초기 이슬람 시대 사원의 벽면이나 궁전의 바닥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화풍은 비잔틴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마위야조와 압바스조 시대의 궁전에서는 로마나 헬레니즘, 사산조 페르시아 화풍의 영향이 역력한 수렵도나 기마도의 프레스코 벽화가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이슬람 회화의 개화기를 대표하는 화법은 세밀화다. 원래 세밀화는 종교 서적의 삽화나 장식에 이용되어 중세 유럽에서 유행되었다. 동방에서의 첫 수용은 사산조 페르시아시대에 간행된 마니교 경전의 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이슬람 시대로 이어져 바그다드에서는 12세기에, 이란에서는 13세기에, 인도에서는 16세기에 세밀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2세기부터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1258년에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창작된 세밀화는 ‘바그다드파’ 세밀화라고 한다. 이 파의 세밀화는 하리리의 기담집 ‘마까마트’의 삽화에서 보다시피 도상(圖像)은 더 사실적이지만 표현에서의 섬세성이나 장식성은 떨어진다. 이어 몽골의 침입 결과로 이란에 일칸국이 생겨나면서부터는 원대의 중국 화풍 영향을 받은 이른바 ‘몽골파’의 세밀화가 등장했다.

    입체감을 살리고 부감(俯瞰) 구도를 채용하며 산수나 수목으로 원근을 조절하는 기법 등이 바로 그러한 영향의 결과다. 이러한 화법은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제국이나 인도의 무갈제국, 터키의 오스만제국 시대의 회화에도 도입되어 이슬람 회화의 꽃을 피웠다.

    조각은 종교적 원인으로 인해 그 발달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유일신 알라를 신봉하는 이슬람에서 신상(神像)을 제작하는 것은 신을 모방하려는 불경한 작태로 인정되기 때문에 엄금되며, 사람이나 동물의 표현도 극도로 억제된다. 그리하여 조각은 순전히 건축의 장식으로서만 발달하여 세밀한 무늬를 평면적인 부조(浮彫)로 만들어 건축물의 표면을 장식하며, 선에 의한 구성만을 주로 하고 당초(唐草) 무늬나 기하학적인 도형을 중심으로 하여 조각한다. 이러다보니 조각의 ‘부재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슬람 공예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술 분야로 금속세공, 유리, 도기, 직물, 카벳 등 그 내용이 다종다양하다. 이슬람의 공예 무늬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아라베스크다. 아라베스크란 장식무늬의 일종으로, 좁은 의미로는 이슬람 공예나 건축의 평면 장식에 사용하는 아름다운 곡선과 부분적인 직선, 혹은 직각으로 된 좌우대칭의 무늬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는 유동적인 선에 꽃이나 과실, 짐승, 인물을 섞은 공상적인 무늬를 말한다.

    금속세공에서 대표적인 기법은 누금감옥(鏤金嵌玉)이다. 누금은 가는 금줄과 금알을 늘여 붙여서 물형을 만드는 정교한 세공수법이며, 감옥은 금테두리 안에 여러가지 색깔의 옥을 박는 공예기법으로서 이른바 다채장식양식(多彩裝飾樣式)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기법은 이집트에서 발생한 후 이슬람 시대에 널리 펴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까지 전파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발생한 로만글라스는 이슬람 시대에 와서 이슬람 특유의 유리(이슬람 글라스)로 발달했다. 파티마조 시대에 이미 형(型)유리와 컷글라스를 제조했으며, 시리아의 알레포와 다마스커스는 12세기 이래로 유리제조업의 중심지로서 각종의 모티프를 유리제 술잔과 접시, 램프 등에 새겨 넣었다.

    이슬람 시대의 도기는 ‘페르시아 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9세기 경부터 제조되기 시작한 ‘페르시아 삼채(三彩)’를 비롯한 페르시아 도기가 이슬람 세계에서 단연 돋보이는 도기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당삼채(唐三彩)’와 비견되는 ‘페르시아 삼채’는 갈색 태토(胎土)의 물형 면에 식물문이나 격자문을 새긴 후 녹·황·갈·자색의 유약을 입혀 구워낸다.

    이슬람 도기가 발달하게 된 요인은 사치성 기물을 금용(禁用)하는 이슬람의 이념에 따라 금은제 용기를 제작·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도기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며, 게다가 8세기부터 중국 도자기가 이슬람 세계에 다량 유입되면서 그 영향을 받은 데 있다. 그밖에 피륙이나 카벳의 직조도 이슬람 공예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슬람에서 건축은 ‘예술의 여왕’으로 군림해왔다. 건축에서 대표적인 것은 무슬림들의 예배 장소인 마스짓(모스크, 사원)이다. 그밖에 공통적인 건축물로는 종교 교육기관인 마드라사(학교)와 대상들이 머무르는 대상숙관, 공중목욕탕, 성채, 교량 등이 있다. 그런데 그 화려함에서는 궁전이나 왕릉들이 단연 압권이다.

    스페인의 함브라(al-Hambra) 궁전과 터키의 톱카피(Topkapi) 궁전, 인도의 타즈 마할(Tj Mahal)릉은 이슬람 건축예술의 백미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비록 민족적 및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슬람문명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공통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다. 우선, 마스짓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모양새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슬람세계 전부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 중 하나다.

    마스짓 내의 주요 구조물로는 미흐랍과 민바르, 미어자나가 있다. 미흐랍(mihrb)은 마스짓의 예배실에서 성지 메카를 향한 벽에 뚫은 벽감(壁龕)으로서 예배 때 이만이 그 앞에 서서 예배를 인도한다. 일반적으로 아치형으로서 자재와 장식에 신경을 쓰는데, 돌이나 스터코에 조각을 새겨 넣거나, 아니면 유약을 발라 구워낸 타일을 사용하거나 장식용 그림을 넣기도 한다. 민바르(minbar)는 미하랍의 오른쪽에 설치된 설교단으로서 대체로 목재로 만드는데, 6개의 계단과 손 짚을 난간, 그리고 돔이나 피라밋 모양의 덮개 등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어자나(mi、dhanah)는 ‘예배를 알리는 곳’이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그 건물은 뾰족한 형태이기 때문에 첨탑이라 한다.

    645년에 처음으로 이집트의 한 마스짓 내에 이런 첨탑을 세웠는데, 당시는 항해나 사막 여행자의 길 안내 역할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명 ‘등탑’이라고도 했다. 건물구조는 탑기(塔基)와 탑신(塔身), 탑정(塔頂)의 3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반적으로 탑신은 가늘게 뻗어 올라가고 탑정은 뾰족하다. 지역에 따라 탑신이 원주형이나 나선형, 탑정이 왕관식 원형으로 된 것도 있다. 미어지나의 수는 메카의 금사(禁寺)를 제외하고는 1~4개로 제한하며, 위치는 마스짓에 붙어 있는 것도 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있다.

    이슬람 건축예술의 공통점은 돔과 아아치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돔(꿋바, qubbah)은 원형지붕이라는 뜻이다. 원래 돔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한 것인데, 이슬람 건축에서 계승했다. 그 형태는 대체로 반구형(半球形)이다. 일부 학자들은 돔이 이슬람 이전에 낙타 등 위에 싣고 다니던 조그마한 가죽 텐트 모양을 따온 것으로서, 당시 그 속에 신성한 돌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돔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정사각형의 기둥 위에 세워진 목조 건물이었으나 점차 기둥 토대를 높이면서 벽돌로 지었다.

    건축양식의 하나인 아치는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출현하여 고대 인도나 중국,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도 각기 다른 형태로 사용되어 왔다. 이슬람 건축에서의 아치는 대체로 회랑을 높이기 위해 많이 도입되었으며, 주요 형태는 첨두형(尖頭形)과 마제형(馬蹄形) 아치다. 이 첨두형 아치는 12세기 후반에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 건축양식의 하나가 되었다.

    형성기를 이은 전성기는 문화개방주의를 지향한 압바스인들에 의해 막이 올랐다. 아랍우월주의를 표방한 우마위야조와는 달리 압바스조는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가리지 않고 페르시아나 그리스, 인도, 심지어 중국의 문학이나 철학, 과학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문학의 주제뿐만 아니라, 장르도 다양해져 산문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서민문학도 출현했다.

    그리하여 이슬람문학은 명실상부한 전성기(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아부 누와스(762~813), 자히즈(775~868), 무타납비(915~965)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문학의 장을 빛내고,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불후의 명작이 중세문학의 금자탑을 쌓아올렸으며, ‘마까마(al-Maqmah)’라는 새로운 이야기 문학 장르도 창출되었다.

    이슬람문학사에서는 이 전성기의 문학을 ‘압바스 (시대) 문학’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문학과 관련해 특기할 사항은 이슬람 왕조의 스페인(안달루스라 칭함) 통치기간(711~1492)에 형성·발달한 이슬람문학, 즉 이른바 ‘안달루스문학’이다. 시기적으로 압바스문학과 병존한 안달루스문학은 전통 이슬람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성을 살려 개성 있는 이슬람-안달루스 문학을 창조했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시작(詩作)에서의 이른바 ‘무왓샤하트(al-Muwashshaht)’의 고안이다. 무왓샤하트란 단일한 운율과 각운을 고수하는 전통적인 이슬람 시작방법과는 달리, 운율을 변경하고 여러 개의 각운을 도입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방법이다.

    전성기를 이어 출현한 침체기는 통일적인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이 몽골의 서정(西征)에 의해 멸망한 후 이슬람세계가 사분오열되고 이슬람 중심이 여러 곳에서 다발(多發)하는 이슬람의 다극화가 추진되면서 아랍어에 바탕을 둔 이슬람문학이 점차 통일성과 창조성, 순수성을 잃고 다양성과 침체성, 혼탁을 빚은 시기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이슬람문학이 단절된 것은 아니고, 또 걸출한 문인작가들도 배출되기는 했지만, 전대의 전성기에 비해 침체와 사양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 시기 이슬람세계를 주도한 세력은 카이로를 기반으로 한 맘룩조(1250~1517)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외래의 터키계 노예 출신의 군인들과 그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한 맘룩조 시대에는 비록 카이로를 수부로 하고 아랍어가 공용어로 쓰였지만, 아랍어의 메카 바스라에서 아랍어의 최고 엘리트라고 자부해온 설교사들마저 예배 때 ‘문법적 오류 없이’ 설교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이븐 바투타 여행기’중)고 할 정도로 아랍어는 이미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었으니 그 ‘예술’인 문학의 침체성이야말로 불 보듯 뻔하다. 이런데다가 오스만제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옮겨지고 터키어가 공식어로 대체됨으로써 종래 이슬람문학을 주도해오던 아랍어와 아랍문학은 ‘완전 암흑’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500~600년간의 침체와 수면상태에 빠져있던 이슬람문학은 19세기 초부터 깨어나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부흥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아랍세계는 근대화한 서구와 접촉하면서 서구의 선진문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과정에서 ‘소생의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그러던중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오스만제국의 붕괴라는 역사적 격변은 아랍을 비롯한 이슬람세계에 재생과 부흥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충격 속에서 쟁취한 민족적 독립과 생존의 권리는 그에 걸맞은 문학의 재창출을 촉구했다.

    지금도 파고를 낮추지 않고 있는 이 부흥기의 흐름 속에서 전통적인 문학유산을 되살리려는 노력과 함께 자유시나 소설, 희곡, 수필, 문학평론 등 다양한 현대적 문학 장르가 기반을 다져가고 있으며, 현대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문학도 여느 제3세계문학과 마찬가지로 전통과 현대라는 갈등 속에서 갈 길을 찾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슬람-아랍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는 시다. 아랍어에서 시란 단어 ‘시아르(shi、ar)’는 원래 동사 ‘샤아라(‘감지하다’ ‘느끼다’)’의 동명사로서 그 뜻은 ‘감지’ ‘느낌’이다. 이 글자가 ‘시’라는 하나의 문학 장르로 쓰이기 전인 자힐리야(몽매) 시대에는 주로 동사 ‘샤아라’의 능동분사인 ‘샤-이르(sh ir, 감지하는 사람)’로부터 유래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감지하는 사람, 즉 신이나 사탄의 힘을 빌려 마력을 행사하는 마술사로 널리 쓰였다. 그런데 그들의 언변이 좀더 주술적이고 선동적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각운이 필요했는데, 최초의 간단한 각운이 바로 ‘사즈아(saj、a)’다.

    사즈아가 발전하여 더 규칙적인 율격을 갖추면서 나타난 최초의 시 형태가 ‘라자즈(rajaz)’다. 라자즈의 본래 뜻은 질병의 징후로 낙타의 엉덩이에서 나타나는 떨림이다. 그래서 라자즈가 낙타 발걸음의 상하 동작에서 나온 운율이니, 낙타를 탄 기사의 노랫가락에서 연유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사막의 배인 낙타가 걸어가는 강약부동의 율동적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라자즈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라자즈는 초기의 단시(短詩)로서 1~2행이 보통이고, 기껏해야 10행을 넘지 못한다. 아랍시의 원형인 단시는 5세기 초에 처음 선을 보였다.

    단시가 점차 발달하여 6세기 초에는 일정한 주제로 다양한 율격을 갖춘 정형화한 장시(長詩)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까시다(al-qasdah, 복합정형장시)’다. 6세기 말엽에 이르러 아랍시의 정형으로 자리를 굳힌 까시다는 이슬람의 시문학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8세기 중엽, 문법학자들은 전래의 까시다 운율을 정리하여 운율학을 정립했는데, 그들이 규범화한 운율체계에는 ‘긴 율격’ ‘느긋한 율격’ ‘달리는 율격’ ‘굽은 율격’ ‘지저귀는 율격’ 등 모두 16개의 다양한 율격이 망라되었다.

    이러한 율격에 맞추는 까시다는 25~100행 내외의 장시이며, 보통 내용의 전개는 도입부(나시브)와 이탈부(타칼루스), 목적부(가르드)의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진행된다. 도입부는 청중들(독자)에게 감응과 동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내용으로, 주로 옛터와 연인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탈부는 도입부에서 일어난 격정에서 이탈하여 심적 평정을 찾아 주제부로 이행하는 과도부로서, 말이나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목적부는 시의 모티브(주제)를 다루는 내용이다. 이러한 3개 영역이 한 까시다에 함께 포함될 수도 있고, 그중 한두 개만 있을 수도 있으며, 그 전후 순위 또한 뒤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주제는 대체로 사랑 송덕 비방 풍자 교훈 등 다양하다.

    대표적인 까시다로 6세기의 시인 이므룰 까이스가 읊조린 81행의 ‘무알라까트(al-Mu、allaqt)’를 들 수 있다. ‘무알라까트’란 시 경연대회에서 우승해 그 표창으로 신전(神殿)에 걸어놓게 된 시란 뜻이다. 시인은 첫 행의 도입부에서 “동행자여, 멈췄다 가세나… 지역 사이의 모래사막에서. 헤어진 애인과 떠나온 집을 그리며 울어나 보자”고 운을 떼고 나서, 이러한 단장의 향수를 계속 이어가다가 52행에서는 “새들이 아직 둥지에 머물러 있는 이른 아침, 나는 말을 타고 간다. 꾸준히 달려 야생 짐승을 따라잡을 만큼 빠르고 덩치 큰 말을 타고”라고 격정을 가라앉히면서 이탈부로 넘어간다. 까시다는 오늘날까지도 아랍시의 전통적 원형으로 살아남아 숨쉬고 있다.

    자힐리야 시대를 이은 이슬람 시대 초기, 즉 교조 무함마드의 생전과 정통칼리파 시대의 시는 비록 주제면에서는 찬양시나 정치시가 새로 첨가되었지만, 시작의 형태나 기법은 대체로 그 계승에 머물고 큰 진작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시인을 마술사로 보는 전대의 통념에 사로잡혀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반대하는 다신론자들은 무함마드를 ‘시인’ ‘신들린 사람’으로 모독하고, 이에 맞서 무함마드는 경전을 통해 시인들을 ‘계곡에서 이성을 잃고 방황하는’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같이 시인은 아직 문학의 창조자로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마위야조 아랍제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세가 안정되고 권력의 강화를 위해 문학의 주장르인 시의 지원이 필요했으며, 게다가 경전의 해석을 위해서도 시작이나 시의 연구가 필수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다양한 주제의 시가 창작됨으로써 이슬람문학의 형성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이슬람 시대의 ‘제1호 시인’으로 평가받는 기독교 아랍 시인 아크탈(640~710)과 시어가 박력이 넘친다고 하여 ‘돌로 조각하여 만든’ 시인으로 불린 파라즈다끄(641~732), 풍자에 빼어날 뿐만 아니라 박식하다고 하여 ‘바다로 포장된’ 시인이란 평가를 받은 자리르(653~733)의 3인방을 들 수 있다.

    이슬람문학의 전성기인 압바스조 이슬람제국 시대의 시는 그야말로 ‘무르익은 황금’의 시였다. 그 특징은 사막의 거친 유목생활이 아닌 호화로운 도시생활을 주제로 하고, 비아랍인들이 시작에 대거 동참함으로써 시의 주제나 내용, 형태나 문체에서 다양화와 융합이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타락을 막기 위해 수피즘과 같은 복고주의가 나타났으며, 말기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통치구조가 약화됨에 따라 시작의 지역화가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시의 주제가 상당히 다양하고 세분되어 찬양시, 풍자시, 자랑시, 비난시, 사과시, 축하시, 애도시, 연시, 교육시, 사냥시, 농담시, 심지어 주시(酒詩)까지 등장하여 ‘시장(詩場)’은 ‘만물상의 진풍경’이었다. 칼리파의 술친구(나딤)로서 주시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당대의 유명 시인 아부 누와스(762~813)는 잘 익은 술은 “꿰는 실 없는 진주 다발’이나 “연금술이 뿜어내는 순금’과도 같다고 이슬람에서 금기시되는 술을 미화하고 있다.

    당대의 유명 시인으로는 아부 누와스 외에 사치를 배격한 금욕주의 시인 아불 아타히야(748~825), 칭송시의 달인이며 서사시의 초석을 놓은 아부 탐맘(845년경), 운율을 잘 살렸다고 하여 ‘시인들의 여가수’란 별명을 얻은 베드윈(유목민) 출신의 부흐투리(821~897), ‘동양의 빅토르 위고’로 추앙받는 아랍 민족주의 시인 무타납비(915~965), 전사(戰死) 시인 아부 피라스(932~968), 운명론의 신봉자인 ‘시인 철학자’ 마아르리(973~1058) 등이 있다.

    압바스조 이슬람제국과 대체로 시대를 같이한 스페인 안달루스 시대의 시문학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여 주제나 형태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묘사시나 학문시, 예술시 같은 새로운 주제시가 첨가되었는가 하면, 특히 무왓샤하트(‘치장’ ‘장식’이란 뜻)란 새로운 노래시가 등장하여 안달루스 시문학으로 하여금 신선한 빛을 발하게 했다.

    근세를 맞아 부흥한 이슬람문학은 오랜 침체기 속에서 시들어버린 황금기의 고전문학을 되살리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앞장에는 시문학이 섰다. 이즈음에 어느 한 시인이 서구의 비행기와 동방(아랍)의 시를 맞바꾸자고 했을 만큼 시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아랍 무슬림들의 문학적 자존심의 전부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시에 관한 한 서구로부터 별로 배울 것이 없다고 자부해왔다.

    그래서 문예부흥을 맞으면서 산문문학은 전적으로 서구 지향성을 띤 반면에 시문학만은 전통을 회복하는 작업으로부터 ‘나흐돠(부흥)’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맞게 된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부흥기의 시단(詩壇)에는 어차피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각종 시류(詩流)가 줄줄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부흥기, 특히 초기의 시인들은 침체기 속에서 잠자고 있던 고전시로부터 시적 영감을 얻으면서 나라의 현실과 여러가지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룬 민족적 및 애국적 시를 쓰고 있는데, 이러한 시를 일괄해 전통 부활의 신고전주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신고전주의의 개창자는 이집트 출신으로 우라비 혁명내각 수상직을 맡았던 ‘문예부흥의 시조’ ‘검과 붓의 거장’ 마흐무드 바루디(1839~1904)다.

    그는 과장되고 곡예에 가까운 말장난뿐인 침체기의 시어가 아닌, 순수한 언어, 힘찬 표현 등을 추구하면서 황금기 시문학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현실적 경험을 표현하는 능력을 전통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많은 애국·애족적 시를 썼다.

    이러한 바루디의 경향을 따른 신고전주의 학파(일명 바루디학파, 전통부활학파, 수구학파)는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 이집트 시문학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신고전주의 학파로 바루디의 뒤를 이은 대표적 시인으로는 아흐마드 샤우끼(1868~1932)와 하피즈 이브라힘(1872~1932)을 꼽는다.

    ‘시인들의 왕자’로 불린 샤우끼는 궁전시인이었으나 1차대전과 함께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애국시인, 민중시인으로 변모한다. 서민 출신의 민중시인으로서 ‘나일의 시인’이란 칭호를 얻은 이브라힘은 시의 음악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옥 같은 민중시를 많이 남겼다.

    서구의 낭만주의 시와 접촉하면서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것이 이른바 낭만주의 시파다. 이 새로운 시파는 신고전주의로부터 탈피한 아랍 서정시의 선구자 칼릴 무뜨란(1872~ 1949)에 의해 개도되었다. 그와 슈트리를 비롯한 디완 그룹(1910~1921), 아부 샤디가 주도한 아폴로 그룹(1930년대 전반), 칼릴 지브란이 주축이 된 이주(移住) 문학파 등 낭만주의 시파에 속한 시인들은 하나의 까시다 속에 여러 주제를 담고 있는 전통시의 형식을 혁파하고 나섰다.

    하나의 까시다에 하나의 통일 주제를 다룰 것, 문체나 어법 등 시의 형식면보다는 시인 자신의 진솔한 감성 표현을 중시할 것, 전통적 운율과 각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할 것, 인본주의와 삶에 대한 낙관이나 자연에 대한 관조를 반영할 것 등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시, 무운시(無韻詩), 산문시, 설화체시 등 자유로운 시 형식에 대한 혁신적 발상을 실천해 나갔다.

    한편, 팔레스타인문제를 발단으로 1950년대 이후 아랍-이슬람 세계에 몰아닥친 정치·사회적 격변은 사실주의시를 비롯한 자유시, 참여시, 저항시 등 신시(新詩)운동을 야기했다. 신시의 공통점은 내용면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소외, 갈등과 반항 등 사회모순이나 비극을 파헤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안겨주는 휴머니즘이고, 형식면에서는 전통시에 대한 혁신의지다.

    자유시의 선구자는 이라크의 나직 말라이카(1923~ )와 바드르 사야브(1926~1964) 두 시인이고, 실천적 문학운동을 통해 참여시의 모범을 보여준 시인은 바그다드 좌익계 언론 출신의 압들 와하브 바야티(1926~ )이며,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다르위쉬(1942~ )가 있다.

    이슬람문학에서 시와 함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산문이다. 아랍 산문의 기원은 자힐리야(몽매) 시대에 전승된 속담이나 격언, 연설, 충고문, 설화 등 구전문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산문들은 아스바하니( ~966년)의 ‘노래의 책(Kitbu、l Aghn)’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대 산문의 특징을 살펴보면, 어휘는 세련미가 적지만 힘이 있고, 구성은 탄탄하지만 의미나 사고의 연결이 부족하거나 단절되어 있으며, 문장은 비교적 간결하고 끊어지지만 짧은 사즈아(운율)를 애용해 음악성을 띠고 있으며, 문체와 표현 형태가 단순하다. 한마디로 문학성이 부족한 것이다.

    문학으로서의 산문은 이슬람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창작되기 시작하여 경전 ‘꾸르안’의 편찬을 계기로 크게 발돋움한 후 우마위야조 아랍제국 시대, 즉 이슬람문학의 형성기 말엽에 이르러 비로소 문학으로서의 정체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운율을 가진 산문체인 ‘꾸르안’은 어문학의 본산으로서 산문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에 창작된 초기 산문 작품들의 대부분이 경전을 해석하고 선전하는 연설과 설교 및 서간문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표적 산문 작가로는 칼리파의 수석 서기였던 서간문 작가 압둘 하미드 알 카팁(7세기 말)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서간문은 아랍 산문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슬람 문학의 전성기인 압바스조 이슬람제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산문문학이 크게 발달하여 다양한 종류의 작품이 창작되었다. 다양한 외국 학문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산문이 있는가 하면 외래, 특히 페르시아문학의 영향을 받은 순수 산문도 나타났다. 인도에 원천을 둔 우화집 ‘칼릴라와 딤나’가 무깟파(724~759)에 의해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고 페르시아의 사회도덕이나 정치제도에 관한 서적이 연이어 역출됨으로써 아랍 산문체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그밖에 언어학이나 신학에 관한 산문체 서적도 적지 않게 간행되었다. 그 결과 산문의 종류도 연설, 설교, 서한, 이야기, 논쟁, 수피즘 산문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 시대의 산문문학에서 특기할 만한 소재는 이야기문학(낏사, Qissah)과 마까마문학이다. 이야기문학에는 서사시나 기담, 전기, 우화 등 시와 산문이 다 포함된다. 이야기에는 아랍적인 이야기와 번안된 이야기의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아랍인의 ‘일리야드’라고 불리는 ‘안타라 전기’(Srat、Antarah, 자힐리야 시대의 영웅 안타라의 생애 그림)가 있고, 후자로는 유명한 ‘천일야화’가 있다.

    마까마(부족의 모임이나 회의, 또는 회의나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란 뜻)란 모임에서 특정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용을 문학적으로 엮은 것이 바로 마까마문학이다. 마까마문학은 ‘문학을 위한 문학’이니 ‘수사학의 교과서’니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시대를 같이 한 안달루스의 문학에서도 산문이 발달했는데, 대체로 시인들이 산문작가를 겸했다.

    이 시대의 산문 거벽(巨擘)들로는 무깟파 외에 17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아랍 서민문학의 정초자 자히즈(775~868)와 마까마문학의 기틀을 마련해 ‘제2 자히즈’라 불리운 페르시아 출신의 이븐 아미드( ~970년)와 추종자들, 50편의 마까마를 지은 이라크 출신의 하리리( ~1122년) 등이 있다.

    이슬람문학의 부흥기를 맞은 오늘에 산문문학의 주류는 소설과 희곡이다. 일찍이 서구문명을 경험하고 소설이라 새로운 문학 장르를 접해본 아랍 작가들은 서구 소설을 모델로 하여 아랍식 소설을 쓰는 데 도전했다. 한편, 밀려드는 서구 소설의 영향에 대한 보수적 반동으로서 전통적 이야기 형식의 마까마를 부활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태동기의 소설은 그것이 마까마 형식이든 아니든 간에 당면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향점을 둠으로써 결국은 교육적 및 계몽적 목적을 추구했다.

    소설운동은 서구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샴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창작소설은 샴 출신의 프란시스 마르라쉬가 1865년에 출간한 ‘진리의 숲(Ghbah al-Haqq)’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인간의 자유와 거기에 가해지는 폭압적 사회제도의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태동기의 순수 계몽소설을 이어받은 유아기(20세기 초~1919)의 소설은 전래의 계몽소설에 오락적 통속소설을 가미한 2중 성격의 소설이었다.

    레바논 출신의 소설가이며 역사학자인 죠르지 자이단(18961~1914)은 ‘방랑하는 맘루크’(al-Mamlku、d Shrid, 1891년)를 비롯해 22권의 역사소설을 썼는데, 그에게 문학은 한낱 역사의 시녀에 불과했다. 그는 역사를 계몽하기 위해 연애소설 형식(오락적 통속소설)을 빌렸던 것이다.

    1920년대 이후부터 성장기에 들어선 소설문학은 각종 경향의 순수소설을 양산했다. 이러한 순수소설의 기점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하이칼(1888~1956)이 쓴 ‘자이납’(Zaynab, 1913)으로 본다. 자전적인 이 소설은 이집트의 농촌을 무대로 한 구성과 인물 묘사에서 첫 순수소설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를 이어 3명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 이야기를 그린 마자니의 ‘작가 이브라힘’(Ibrhm al-Ktib, 1931)이나, 문호 톼하 후세인의 자전적인 소설 ‘나날들’(al-Ayym, 3부, 1929, 1935, 1939) 은 낭만주의적 소설들이다.

    역사를 거울로 삼아 오늘을 비쳐보려는 역사주의 경향의 소설로는 19세기 초 위정자 알리와 맘룩(노예)들 사이의 투쟁을 묘사한 ‘맘룩의 딸’(Ibnah al-Mamlk, 1926)과 고대 파라오를 주제로 한 나집 마흐푸즈의 ‘튀바 항쟁’(Kifh Tbah, 1944)이 있다. 사실주의 소설의 대표작(첫 성과작)으로는 이집트 출신의 타우픽 하킴(1898~1987)의 ‘영혼의 귀환’(、Audahal-Rh, 1933)을 꼽는다. 이 소설은 산산 조각난 사체를 주워 모아 영혼을 부르면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자(死者)의 서(書)’에 나오는 오시리스(Osiris)신과 그의 누이 이시스(Isis)의 신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여기서 조각난 사체는 이집트의 현실을, 영혼의 돌아옴은 1919년의 혁명으로 회복된 이집트의 민족주의 정신을 상징한다. “문명의 여명기에 피라밋의 기적을 이룬 사람들이 또 다른 기적을 못 이룰 리가 있겠는가!”고 작가는 겨레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토한다.

    문학과 더불어 예술은 이슬람문명의 개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슬람 예술은 나름의 전통에 외래의 요소들을 융화·접목시킴으로써 이슬람 고유의 예술을 창출해냈다. 물론 희곡이나 조각 같은 일부 분야에서 보다시피 이슬람 종교이념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 발전에서 일정한 한계를 노출시켰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해가고 있다.

    이슬람 예술사에서 현대적 의미의 희곡(드라마)은 근세 이후 서구 희곡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출현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1798) 프랑스 주둔군을 위문하기 위해 온 코메디 프랑세즈의 공연을 어깨 너머로 본 것이 아랍인과 희곡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서 유학한 학생들이 서구의 희곡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이전에는 희곡다운 희곡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랍-무슬림들이 9~10세기에 번역을 통해 그리스의 학문이나 문학 예술을 대거 수용하면서도 희곡만은 외면했다. 그 이유는 많은 신들과 신화가 등장하고 여성도 대중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그리스 희곡은 이슬람의 신앙과 문화토양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랍인들의 시에 대한 집착은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을 초래했으며, 유목생활의 환경에 무대예술이 어울리지 않은 데 있었다.

    그렇다고 희곡의 전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희곡예술로 승화하지 못한 것뿐이다. 중세에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나라들에는 운문과 산문이 섞인 이야기를 손님들 앞에서 악기 반주에 맞추어 익살스럽게 엮어 가는 익살극과 터키에서 유래된 ‘까라고즈’(Qaragoz, 터키어로 ‘검은 눈’이란 뜻)란 인형극, ‘타으지야’(Ta、ziyah, 아랍어로 ‘위안’이란 뜻)라는 종교적 수난을 그린 민속극(18세기 말까지 존속) 등이 있었다. 특히 꼭두각시의 그림자로 연출하는 그림자극(카얄 쥘르, Khaylu、l Zill)은 오랫동안 대중적인 오락으로 성행했다.

    이븐 다니얄(1248~1311)의 희곡집에는 ‘그림자의 환영(Tayfu、l Khayl)’ 등 여러 편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중세 아랍 무슬림들 속에서 유행한 전통 토착극들은 비록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희곡적 요소를 갖추고 단순한 오락을 넘어 사회 풍자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구의 희곡이 처음으로 소개된 곳은 이집트이지만, 실제로 아랍인들 손에 의해 연극이 시작된 곳은 일찌감치 서구 예술에 눈을 뜬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이다. 최초의 연극 작품은 레바논 출신의 마룬 낙까쉬(1817~1855)가 창작 공연한 ‘수전노’(al-Bakhl, 1846)다.

    작가 자신이 처음으로 직접 설치한 극장에서 공연한 이 연극은 노래와 춤, 그리고 통속적 유머를 많이 섞어 수전노를 풍자하는 내용의 희가극이다. ‘이집트 연극의 아버지’ ‘이집트 민족연극의 설립자’ ‘이집트의 몰리에르’라고 불리는 야아꿉 싼누스(1839~1912)는 ‘이집트 신사’ ‘두 첩’ ‘국가와 자유’ 등 32편의 희곡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의 주 모티브는 현실에 반항하는 농민과 민중의 삶을 반영하고 폭정을 폭로 풍자하는 것이다. 그는 늘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 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다가, 당국의 미움을 받아 공연이 금지되고 극장이 폐쇄당하며 국외에 추방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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