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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하원, 탈북자 3명 은밀히 불러 북한인권 청문회 열었다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미 하원, 탈북자 3명 은밀히 불러 북한인권 청문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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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철'이라는 젊은이는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붙들렸다. 그는 체포될 때 한 쪽 다리에 총을 맞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수용소의 남녀 죄수 1000여 명은 그가 붙잡힌 언덕 근처 길 양 쪽에 늘어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경비병들이 젊은이에게 재갈을 물리고 두 다리를 밧줄로 묶어 트럭 뒷범퍼에 붙들어 맸다. 그러고는 4km나 끌고 갔다. 죄수들은 이 잔인한 광경을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트럭이 멈춰섰을 때, 피투성이가 된 그의 등과 뒤통수는 살가죽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공개처형됐다….”
탈북자 문제가 남북한 간의 문제를 떠나 국제문제로 성격이 변하고 있다. 특히 4월 말부터 중국의 외국 공관에 탈북자들이 잇따라 진입해 망명을 요구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지고 있다. 4월25일 탈북자 1명이 베이징(北京) 주재 독일대사관에 진입해 한국 망명을 요구했고, 4월29일에는 탈북자 3명이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주변에서 중국 경찰에 체포됐다.

또한 지난해 북한을 떠나 한국에 들어온 장길수(18)군 가족 5명이 5월8일 오후 2시께 중국 선양(瀋陽) 허핑(和平)구의 일본총영사관에 진입하려다 붙잡혀 중국 공안에 넘겨졌다. 거의 같은 시간에 선양 일본총영사관에서 가까운 미국총영사관에선 탈북자 2명이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9일에도 선양 미국총영사관에 탈북자 1명이 들어왔다.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눈여겨 볼 대상은 미국의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미 하원의 움직임이다. 미국 하원은 5월9일 외국공관으로 진입하려다 체포된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하지 말라고 중국 정부에 촉구했다. 헨리 J. 하이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과 제임스 A. 리치 동아시아소위원회 위원장은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이같이 촉구했다.

미 의회는 지난 해 말부터 의회에 북한인권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북한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위해 준비작업을 해왔다. 의회는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탈북자까지 미국으로 초청, 청문회에 참석시켜 증언을 듣고 있다.

5월2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는 워싱턴DC 레이번빌딩 2172호에서 북한인권청문회를 열었다. 의회는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3명(백두한라회 김성민 회장,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의 저자 이순옥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호원을 지낸 이영국씨)을 왕복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하며 초청, 이들의 증언을 들었다.

아이오와주 출신의 공화당 의원인 짐 리치 위원장이 주재한 이 청문회에는 6명의 의원이 참석했다. 청문회는 1, 2부로 나누어 점심식사도 거른 채 6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 가운데 김성민씨와 이영국씨의 증언을 소개한다. 두 사람의 증언은 영문으로 작성돼, 청문회 공식 자료로 제출됐다.



▼ 김성민씨의 증언 ▼


나는 1962년 6월5일 북한 자강도 희천시 전평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대동문인민학교와 련광고등중학교를 졸업했고,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78년에 북한군에 입대했다. 10년 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1988년에 평양 김형직사범대학 작가양성반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인 1991년 북한군 243군 부대 예술선전대 작가(소위)에 임명됐다.

1996년 10월, 주민들은 물론 군인들마저 굶겨 죽이는 김정일체제에 환멸을 품고 북한을 탈출했다. 3년 동안 중국을 떠돌아다니다 1999년 2월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나는 인류의 양심 앞에 북한군의 비참한 처지와 중국내 탈북자들의 인권문제를 증언하려 한다.

세상은 북한 군인들이 이른바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 아래 유복하고 배부른 생활을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정일의 친위대로 알려진 호위사령부, 수도방어사령부 명예위병대와 군악단을 비롯한 최고사령부의 몇몇 소속부대, 그리고 특수 수색부대인 민경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군은 1980년대 중반부터 극심한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86년 김정일은 인민군후방총국에 대한 국가 지원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게 이유였다. 1990년 겨울부터는 상급단위에서부터 내려오던 후방물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하루 800g의 쌀(입쌀70%, 강냉이쌀30%)과 소금만 나올 뿐 기름, 육류, 남새(채소)등 일체의 부식은 자체적으로 생산, 보급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이때부터 북한 병사들은 군사훈련과 작업은 물론, ‘부업’이라고 불리는 남새농사, 강냉이 농사에까지 동원됐다. 훈련과 작업의 강도는 높아지는 반면 먹는 것은 오히려 줄어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800g의 식량이 공급된다곤 하지만 장교와 고참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기 때문에 병사에게 돌아오는 밥은 500g도 채 되지 않는다. 기름 한 방울 안 묻어있는 염장 무와 염배추 반찬은 젊은 병사들의 영양상태를 극도로 부실하게 만든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에 어쩌다 고깃국을 한 그릇씩 얻어 먹게 되는데,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병사들은 국에 들어 있는 기름 몇 방울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다. 한때 ‘급성 설사증’이라고 불리던 원인 모를 설사증세를 앓다 죽어간 군인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있던 북한군 620훈련소 220여단에서만도 1991년 봄 60여 명의 병사들이 그렇게 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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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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