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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낫’과 ‘망치’ 버리고 제국의 부활 꿈꾼다

‘시장국가’로 거듭나는 러시아

  • 김기현 <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 kimkihy@donga.com

‘낫’과 ‘망치’ 버리고 제국의 부활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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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대국 건설을 위해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승부를 건 푸틴 대통령. 그는 마치 300년 전의 표트르 대제처럼 러시아를 고립 속에서 끌어내 세계의 주류국가로 부상시키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비상(飛翔)’. 이것이 21세기 러시아 차르(황제)의 꿈이다.
5월24일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노보오가레보 숲에 있는 러시아 대통령 전용별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내외는 양국 고위관리들과 함께 만찬을 가졌다. 분위기는 더 없이 화기애애했다.

이날 오전 두 정상은 크렘린궁에서 ‘역사적인’ 전략핵무기감축협정과 ‘양국의 새로운 전략적 관계에 대한 공동선언’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전세계 언론은 “양국이 이 정상회담 하나로 오랜 대립과 갈등 관계를 풀고 새로운 협력시대를 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제는 5번이나 만나 제법 친숙해진 푸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표정도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자 푸틴 대통령이 갑자기 식탁에 놓인 캐비어(철갑상어알)를 가리키며 참석자들에게 “이걸 어떻게 잡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의아해하는 좌중을 돌아보며 “어부들은 카스피해에서 철갑상어를 잡아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알을 채취한 뒤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고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순간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일부 외신은 “뻣뻣하기로 유명한 푸틴 대통령이 취임 2년을 넘기더니 이제는 제법 유머가 늘었다”고 평했다.

그런데 다음날 러시아 관영 RTR방송은 실제 캐비어를 채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철갑상어의 배를 가르고 알을 꺼낸 후 실로 꿰매고 다시 놓아주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풀려난 철갑상어는 생존율이 90%가 넘고 다음해에 다시 잡아 또 캐비어를 채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술이 실은 러시아가 값비싼 캐비어 최대 생산국이 된 비결이라는 설명까지 이어졌다.

서방에 대한 손짓

푸틴 대통령의 ‘농담’은 알고보니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진실도 농담처럼 태연스럽게 말한다. 가슴속에 있는 진심을 알아채기 힘들다. 그래서 서방 지도자들이 160㎝대의 단신인 그를 어려워한다. 이런 푸틴 대통령이 집권 2년째를 맞은 올해 승부수를 던졌다. 그가 집권초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렸던 외교적 노력의 성과가 마침내 가시화됐다.

푸틴 대통령은 미·러 정상회담을 마치자마자 5월28일 이탈리아 로마로 날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개국 정상과 만났다. 이 회의를 통해 러시아는 NATO의 정식회원국은 아니지만 회원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의사결정권을 가지게 됐다. 러시아 언론은 나토가 더 이상 ‘19+1체제(19개 NATO회원국과 러시아)’가 아니라 ‘20체제’로 개편됐다고 평가했다.

러·NATO정상회의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다음날 푸틴 대통령은 유럽연합(EU) 로마노 프로디 집행위원장과 의장국인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 하비에르 솔라나 대외문제 담당집행위원(전 NATO 사무총장) 등 EU 지도자들을 만났다. 프로디 집행위원장은 “러시아에 ‘시장경제(market economy) 국가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푸틴 대통령이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선물이었다.

EU의 뒤를 이어 6월6일 미국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돈 에번스 미 상무장관은 “러시아가 지난 10년 동안 이룬 눈부신 경제적 변화를 반영해 러시아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앞서 부시 미국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축하해주었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미·러 정상회담 등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게 ‘시장경제국가 지위’를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으나 확답을 받지 못했다. 미 상무부가 그동안 러시아가 시장경제국가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정하는 조사작업을 벌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 시장국가 지위 부여는 최종적으로 의회의 승인사항이기 때문에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러시아가 기다려온 ‘시장경제국가 지위 획득’이란 무엇인가? EU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전세계 국가를 시장국가와 비(非) 시장국가로 구분하고 통상 등에서 차별적으로 대우한다.

보통 미국 정부는 해당국 통화(通貨)의 태환성(兌換性·currency convertibility), 임금이 시장경제에 맞게 결정되는지의 여부, 정부의 외국투자기업 소유와 생산통제의 정도, 자원분배과정에서의 정부 개입 등을 면밀하게 검토해서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시장경제국 지위를 준다. 러시아의 경우 미국 상무부가 9개월 동안 시장국가가 될 조건이 되는지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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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 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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