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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전재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美 PBS 제작 ‘사담 후세인’ 시리즈

  • 번역·정리: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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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 무기사찰을 둘러싼 갈등은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미국 공영방송 ‘PBS 프런트라인(Frontline)’은 최근 특집 ‘사담 후세인’ 시리즈에서 대량파괴무기를 소유하려는 후세인의 끈질긴 집착을 조명했다. 그 주요내용 가운데 핵심 관련자 5명에 대한 인터뷰를 발췌, 전재한다(편집자).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타리크 아지즈(이라크 부총리)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는 1970년대 초부터 사담 후세인의 측근으로 이라크 대외정책을 담당해왔다. 한마디로 후세인의 대외창구 역할을 해온 인물. 그는 ‘PBS Frontline’ 인터뷰에서 후세인을 정점으로 한 이라크가 미국과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된 과정과 이에 얽힌 비화들을 털어놨다.

“사담 후세인은 내 친구이자 정치적 지도자다. 그는 아주 특별한 지도자다. 대통령이 된 뒤 군 통수권자로서 군사에 관한 세세한 일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그는 원래 군인이 아니다. 법과대학을 나와 정당활동을 해온 사람이다. 우리 세대의 이라크 젊은이들은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조국의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이라크 수상은 영국군이 예전처럼 이라크 군사기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항의 데모를 벌였다. 아랍의 젊은이로서 이런 왕조를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젊은이들은 이슬람 민족주의에 빠져들었다.”

아지즈 부총리는 미국이 1950∼60년대에도 아랍 민중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동서냉전 체제 아래서 공산주의에만 신경을 썼다. 이 지역에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나 영국과는 달리 아랍사회주의와 바트당(Baath Party)에 대해선 잘 몰랐다. 1958년 이라크에서 공화혁명이 일어나고 바트당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떠올랐어도, 미국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1963년 바트당이 집권했을 당시 나는 당 기관지 편집책임자로서 유럽 언론인들을 맞이했지만 그 중에 미국 기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쿠데타가 일어났고, 나는 시리아로 도망쳤다. 1967년 바트당이 재집권한 뒤로도 미국과는 이렇다할 접촉이 없었다. 그 무렵 일어난 이스라엘-아랍전쟁(6일전쟁)의 영향 탓도 있었다. 아랍지역의 반미감정은 점점 높아갔다. 이집트조차도 미국과 외교관계를 끊고 있었다. 이라크는 미국에 대사관조차 두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 그리고 소련과는 잘 지내려 했다. 특히 프랑스와는 관계가 진전됐다. 중동지역에 자원민족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70년대 초 사담 후세인 당시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석유 국유화를 선언(1972년)하자 프랑스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후세인이 파리를 방문했을 때 당시 퐁피두 대통령은 “석유 국유화 조치는 이라크 주권에 관한 사안이다. 프랑스는 그와 같은 조치를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과 손잡고 이라크 석유를 보이콧해 수출길을 막았다. 이것이 이라크 반미감정의 뿌리다.”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몰두

1979년 바크르 이라크 대통령이 퇴임하고 후세인(혁명평의회 부의장)이 대통령에 올랐다. 대통령이 된 지 꼭 1년 만에 이란-이라크전쟁(1980∼88년)이 터졌다. 미국은 이라크가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과 1990년대 초 걸프전쟁을 치르면서 핵무기, 생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 개발에 상당한 진전을 보인 것으로 판단했다. 이와 관련한 아지즈 부총리의 증언.

“1980년대 이란과의 전쟁은 이라크로선 살아남느냐 망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이란은 인구나 영토로 볼 때 이라크보다 훨씬 큰 나라다. 이란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자세였다. 우리는 옛소련과 중국·프랑스에서 무기를 사들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이란이 스커드미사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라크는 위기감을 느꼈다. 바그다드는 이란 국경에서 110km 떨어져 있지만, 이란이 보유한 스커드미사일의 사정거리는 300∼350km에 이르렀다. 이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바그다드로 미사일을 쏠 수 있었다. 반면 이란 수도 테헤란은 국경에서 500km 이상 떨어져 있다. 이라크도 스커드미사일을 갖고 있었지만, 테헤란은 사정거리 밖이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모스크바로 가서 장거리미사일을 사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소련측은 ‘핵탄두를 운반하는 것말고는 장거리미사일을 갖고 있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이라크 사이에 장거리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었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

아지즈 부총리는 ‘PBS Frontline’ 인터뷰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미사일무기와 화학무기 자체 개발에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음을 시인했다.

“우리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거듭된 연구에도 불구하고 생물무기 분야에선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화학무기 분야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대(對) 이란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장거리미사일 개발이었다. 그것은 군사부문이 아닌 심리전에서 결정타를 날렸다. 1988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오랜 전쟁에 지쳤다. 그런데도 이란정부는 국민과 병사들에게 ‘우리는 곧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테헤란에 이라크 미사일이 떨어지자, 이란 국민들은 ‘정부에 속았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미사일이 던진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고 휴전이 이뤄졌다. 화학무기는 실전에서 쓰여져 많은 이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이란-이라크전쟁에서 결정적인 국면전환 역할을 한 건 장거리미사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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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정리: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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