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美 PBS 제작 ‘사담 후세인’ 시리즈

  • 번역·정리: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01-05 16: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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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타리크 아지즈(이라크 부총리)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는 1970년대 초부터 사담 후세인의 측근으로 이라크 대외정책을 담당해왔다. 한마디로 후세인의 대외창구 역할을 해온 인물. 그는 ‘PBS Frontline’ 인터뷰에서 후세인을 정점으로 한 이라크가 미국과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된 과정과 이에 얽힌 비화들을 털어놨다.

    “사담 후세인은 내 친구이자 정치적 지도자다. 그는 아주 특별한 지도자다. 대통령이 된 뒤 군 통수권자로서 군사에 관한 세세한 일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그는 원래 군인이 아니다. 법과대학을 나와 정당활동을 해온 사람이다. 우리 세대의 이라크 젊은이들은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조국의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이라크 수상은 영국군이 예전처럼 이라크 군사기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항의 데모를 벌였다. 아랍의 젊은이로서 이런 왕조를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젊은이들은 이슬람 민족주의에 빠져들었다.”

    아지즈 부총리는 미국이 1950∼60년대에도 아랍 민중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동서냉전 체제 아래서 공산주의에만 신경을 썼다. 이 지역에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나 영국과는 달리 아랍사회주의와 바트당(Baath Party)에 대해선 잘 몰랐다. 1958년 이라크에서 공화혁명이 일어나고 바트당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떠올랐어도, 미국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1963년 바트당이 집권했을 당시 나는 당 기관지 편집책임자로서 유럽 언론인들을 맞이했지만 그 중에 미국 기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쿠데타가 일어났고, 나는 시리아로 도망쳤다. 1967년 바트당이 재집권한 뒤로도 미국과는 이렇다할 접촉이 없었다. 그 무렵 일어난 이스라엘-아랍전쟁(6일전쟁)의 영향 탓도 있었다. 아랍지역의 반미감정은 점점 높아갔다. 이집트조차도 미국과 외교관계를 끊고 있었다. 이라크는 미국에 대사관조차 두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 그리고 소련과는 잘 지내려 했다. 특히 프랑스와는 관계가 진전됐다. 중동지역에 자원민족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70년대 초 사담 후세인 당시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석유 국유화를 선언(1972년)하자 프랑스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후세인이 파리를 방문했을 때 당시 퐁피두 대통령은 “석유 국유화 조치는 이라크 주권에 관한 사안이다. 프랑스는 그와 같은 조치를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과 손잡고 이라크 석유를 보이콧해 수출길을 막았다. 이것이 이라크 반미감정의 뿌리다.”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몰두

    1979년 바크르 이라크 대통령이 퇴임하고 후세인(혁명평의회 부의장)이 대통령에 올랐다. 대통령이 된 지 꼭 1년 만에 이란-이라크전쟁(1980∼88년)이 터졌다. 미국은 이라크가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과 1990년대 초 걸프전쟁을 치르면서 핵무기, 생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 개발에 상당한 진전을 보인 것으로 판단했다. 이와 관련한 아지즈 부총리의 증언.

    “1980년대 이란과의 전쟁은 이라크로선 살아남느냐 망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이란은 인구나 영토로 볼 때 이라크보다 훨씬 큰 나라다. 이란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자세였다. 우리는 옛소련과 중국·프랑스에서 무기를 사들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이란이 스커드미사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라크는 위기감을 느꼈다. 바그다드는 이란 국경에서 110km 떨어져 있지만, 이란이 보유한 스커드미사일의 사정거리는 300∼350km에 이르렀다. 이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바그다드로 미사일을 쏠 수 있었다. 반면 이란 수도 테헤란은 국경에서 500km 이상 떨어져 있다. 이라크도 스커드미사일을 갖고 있었지만, 테헤란은 사정거리 밖이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모스크바로 가서 장거리미사일을 사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소련측은 ‘핵탄두를 운반하는 것말고는 장거리미사일을 갖고 있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이라크 사이에 장거리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었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

    아지즈 부총리는 ‘PBS Frontline’ 인터뷰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미사일무기와 화학무기 자체 개발에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음을 시인했다.

    “우리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거듭된 연구에도 불구하고 생물무기 분야에선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화학무기 분야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대(對) 이란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장거리미사일 개발이었다. 그것은 군사부문이 아닌 심리전에서 결정타를 날렸다. 1988년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오랜 전쟁에 지쳤다. 그런데도 이란정부는 국민과 병사들에게 ‘우리는 곧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테헤란에 이라크 미사일이 떨어지자, 이란 국민들은 ‘정부에 속았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미사일이 던진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고 휴전이 이뤄졌다. 화학무기는 실전에서 쓰여져 많은 이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이란-이라크전쟁에서 결정적인 국면전환 역할을 한 건 장거리미사일 이었다.”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10월16일 국민투표에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7년 임기 연장을 100% 지지한 이라크 국민들이 꽃으로 장식한 후세인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아지즈 부총리는 1990년대 유엔 무기사찰단(UNSCOM) 활동에 매우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는 이라크정부가 UNSCOM에 적극 협조해도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경제제재가 풀릴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UNSCOM의 목적은 무기사찰이 아니었다. 이라크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경제제재를 연장하려는 술책일 뿐이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687에 따라 1991년 말 모든 대량파괴무기를 UNSCOM 또는 우리 손으로 파괴한 상태였다. UNSCOM 단장 리처드 버틀러는 1991년 말이나 1992년 초 유엔 안보리에 가서 ‘무기사찰 업무는 마쳤다, 별다른 이상이 없고 앞으로 모니터링만 하면 된다’고 보고했어야 했다. UNSCOM은 1992년 초부터 1998년 말까지 이라크 내에서 1갤런의 생화학무기도 찾아내지 못했다. 모든 무기가 이미 파괴된 상태였으니까. UNSCOM은 이런 사실을 늦어도 1994년이나 1995년에 유엔 안보리에 보고했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1992년 봄 나는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우린 할 일을 다했으니, 경제제재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당시 유엔은 (제한된 이라크 석유 수출물량으로 식량을 수입해가는) 이른바 식량프로그램이란 것을 내놓았지만, 경제제재를 푸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UNSCOM은 이라크가 대량파괴무기를 감춰놓고 있다는 혐의를 잇따라 제기하면서 이라크 곳곳을 마구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UNSCOM은 이라크에 대한 압박을 이어가려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무기사찰을 구실로 처음부터 스파이 행위를 저질렀다. 무기사찰 요원 전부가 그랬다는 건 아니다. 미국과 영국이 고른 자들 가운데 일부는 스파이 행위를 하면서 경제제재 구실을 찾는 데 더 열심이었다.”

    1998년 말 유엔 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철수한 뒤 영미 연합군은 ‘사막의 여우(Desert Fox)’란 이름의 작전으로 이라크를 폭격했다. 폭격은 그후로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아지즈 부총리는 이런 미국의 강공책이 후세인 체제를 변화시킬 것이라 보지 않는다.

    “직업적 정치가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미국에 이라크 ‘정책’이란 게 있는지 의심스럽다. 정책이란 합리적 목적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라크에 대해 취해온 미국의 태도를 보면,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라크 국민의 지지와는 동떨어진 이른바 반정부세력을 지원하는 정책도 실패로 끝났다.”

    걸프전 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반(反)후세인 세력을 지원, 체제 전복을 꾀했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이라크민족회의(INC)는 해마다 막대한 자금을 CIA로부터 지원받았다. 아지즈 부총리는 이들 반정부세력을 ‘사기꾼(fake)’이라 깎아내렸다.

    “INC를 비롯한 해외의 이른바 반정부세력이란 것은 CIA의 돈이나 타내려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쿠르드족은 전통적으로 그들 영토 바깥에서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힘도 없다. 그들은 바그다드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관심이 없다. 쿠르드족의 이해를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란 쪽과 선이 닿아 있는 일부 친(親)이란 세력들도 이제는 한물갔다. 미국은 이들 반후세인 세력을 모아 훈련시키려는 모양인데,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훈련받을 만한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한마디로 반후세인 세력으로 바그다드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끊임없이 현정권을 공격한다고 해서 이라크 정권을 전복시킬 수는 없다. 이라크 군사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을 포함한 어떠한 나라도 위협할 계획이 없다. 솔직히 말하건대, 미국과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리처드 버틀러(전 유엔 무기사찰단장)

    호주 출신의 버틀러는 UNSCOM 단장으로 걸프전이 끝난 뒤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 해체작업을 총지휘했다. 버틀러는 ‘PBS Frontline’ 인터뷰에서 후세인을 가리켜 ‘대량파괴무기에 중독된(addicted)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후세인이 9·11테러나 탄저균 테러에 관련됐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이라크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힌다.

    “이라크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후세인이 ‘그곳엔 못들어간다’는 식으로 무기사찰단에 보이는 저항에 비례해 그곳에는 후세인이 지키고 싶은 중요한 그 무엇이 있다고. 이런 생각은 간단하지만 논리적인 것이다.

    후세인은 어떤 생화학무기를 가지고 있을까. 내가 보기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탄저균, 페스트균, 보툴리늄균, 피부가 썩어 들어가게 만드는 회저균 등.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 UNSCOM이 이라크를 떠난 1998년 말 이래로 얼마나 더 지독한 것들을 만들어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가운데서 탄저균이 가장 치명적이다.

    이라크는 탄저균을 포탄이나 미사일 탄두에 장착했다. 파괴된 미사일 탄두를 내 손으로 직접 걸레질해 실험해 보니 탄저균 찌꺼기들이 나타났다.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는 딱 한번 사석에서 ‘물론, 우리는 생물무기를 만들었어요. 페르시아인들(이란)과 유대인들(이스라엘)에게 쓸 요량으로 말입니다’라고 실토한 바 있다.

    바로 한 시간 앞서 그는 공식 석상에서 ‘우리는 대량파괴무기를 결코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세균 배양기를 42t 가량 수입한 사실만 봐도 이라크가 세균무기를 개발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UNSCOM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후세인의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그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라크는 UNSCOM이 철수한 1998년 이후에도 “우리는 생화학무기 관련시설을 다 파괴했다. 따라서 생화학무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러나 버틀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와 같은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물무기 인정한 아지즈 부총리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11월21일 미국 뉴저지주의 한 석유산업시설에서 화학무기 제조용 설비를 찾아내는 훈련을 하고 있는 유엔 무기사찰단원들

    “첫째, 이라크가 그동안 보여준 태도로 미뤄보면 알 수 있다. 후세인은 대량파괴무기, 특히 생물무기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투자해왔다. 둘째, 걸프전 뒤 국제사회는 후세인에게 대량파괴무기를 없애지 않으면 경제제재를 당할 것이라 경고해왔다. 대량파괴무기를 없앨 경우 2200만 이라크 국민들이 경제제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선택했나? 대량파괴무기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국민이 뭐 소용 있나. 나는 무기를 원해’라고 말이다.

    후세인은 국민을 희생시켜서라도 대량파괴무기를 가지려는 인물이다. 앞서 무기사찰단에 대해 이라크측이 보인 저항에 대해 언급했지만, 생물무기 관련 시설에 대한 사찰에서 이라크는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로써 내가 내린 결론은 ‘세균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생물무기가 후세인의 기호품’이라는 것이었다.”

    무기사찰 막바지에 이르러 버틀러는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내게 이라크가 갖고 있는 생물무기를 다 내놓으시오. 그럴 경우 나는 그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따지지 않겠소.” UNSCOM의 입장에선, 생물무기 생산시설은 나중에 걱정할 문제였고, 급한 것은 이라크가 숨겨둔 생물무기를 폐기하는 일이었다.

    “아지즈 부총리에게 그런 제안을 하자, 그는 ‘재미있는 제안이군요’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몇 주 뒤 아지즈는 ‘이라크에서 나가주시오. 그것말고는 달리 길이 없소’라고 말했다.

    대량파괴무기를 갖는다는 점에 대해 후세인은 애착(attachment) 정도가 아니라 중독(addiction)됐다고 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후세인이 대량파괴무기가 자신을 걸프지역의 강자로 만들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의 깊은 믿음을 지녔다는 뜻에서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이었던 느브갓세날(기원전 605∼562년)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망상 같은 것이다. 이런 인물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후세인이 지니고 있을 대량파괴무기에 대해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 편이다. 곧 증거를 찾아낼 것이다.”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스콧 리티(전 유엔 무기사찰단원)

    미 해병 정보장교 출신인 스콧 리터는 1998년 UNSCOM에서 중도사퇴했다. 당시 그는 “UNSCOM은 처음부터 스파이 행위를 하는 기구였다”며 미 CIA가 UNSCOM의 일부 요원들에게 스파이 행위를 부추겨 UNSCOM의 본래 임무가 훼손됐다는 비판론을 폈다. 그러나 리터는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손잡았다는 혐의를 받아온 논쟁적 인물이다.

    “이스라엘이 현장사진 판독 도왔다”

    “1991년 9월 UNSCOM 요원으로 참여한 뒤 내가 맡은 일은 정보분석이었다. 현장사진을 찍고 예전 상태와 대조하면서 관련 정보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분석해 현장으로 나가는 사찰요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내 임무였다. 첩보비행기 U-2로 찍어 미국정부가 제공한 사진들도 판단자료로 쓰였다. 그러나 곧 사진판독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의 직속상관인 UNSCOM 단장 롤프 에케우스(스웨덴 출신)와 상의한 끝에 유엔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유엔 사진센터에 U-2가 찍은 사진을 판독할 만한 능력을 지닌 요원은 없었다. 민간요원 몇 사람을 썼지만, 별 도움이 못됐다.

    그러다 1994년 가을 이스라엘 쪽과 선이 닿았다. 이스라엘에는 숙달된 사진판독 전문가들이 있었고, 협조해줄 뜻을 비쳤다. 실질적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1995년 7월부터였다. 솔직히 말해 이스라엘이 사진판독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UNSCOM 사찰은 1995년 말 시들해져버렸을 것이다.”

    리터가 말하는 ‘1995년’은 UNSCOM으로선 힘든 한해였다. 그 무렵 UNSCOM은 많은 곳으로부터 “이라크에 더 이상 대량파괴무기가 없다”고 선언하라는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95년 6월 후세인의 사위로 이라크 대량파괴무기 개발을 총괄해왔던 후세인 카멜이 망명했다. 그는 “후세인이 대량파괴무기를 감춰두고 유엔을 속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멜의 망명과 폭로는 사찰팀으로 하여금 후세인이 쌓아놓은 ‘벽돌담’에 다시 온몸으로 부딪치도록 만들었다. UNSCOM 단장 롤프 에케우스가 그만두고 리처드 버틀러로 바뀌었지만, 사찰단 업무는 이라크의 방해와 그로 인한 신경전 속에서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1998년 초부터 사진판독과 관련한 이스라엘과의 관계 때문에 내가 이스라엘의 첩자라는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유엔이나 미국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아 일한다는 얘기였다. 미 연방수사국(FBI)도 그런 의심을 품고 나를 조사했다. 나에 대한 FBI의 조사기록 파일은 두꺼워졌다. 나로선 터무니없는 혐의였다.

    역설적으로 보면, 이스라엘과 나의 관계는 미 정보기관으로부터 내가 독립돼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래서 미국은 내게 스파이 혐의를 씌워 UNSCOM에서 불명예 퇴진시키고, 궁극적으론 UNSCOM을 해체하려 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무기사찰 활동이 미국의 이익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리터의 주장에 따르면, 몇 년째 활동이 지지부진한 UNSCOM을 해체하고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화하면서 후세인 체제를 직접 압박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편집자)

    “미국이 UNSCOM을 죽였다”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은 “이라크의 무장해제와 관계없이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화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스콧 리터는 “미국이 수많은 이라크 국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대(對) 이라크 경제제재를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전세계로부터 고립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아가 UNSCOM을 이라크에서 쫓아낸 것은 후세인이지만, 미국과 더불어 유엔 안보리도 ‘UNSCOM 사망’의 공범이라고 강조한다. 유엔헌장 7장 규정에 따라 UNSCOM을 창설하고도 유엔 안보리가 제대로 국제법적 뒷받침을 해주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리터의 증언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UNSCOM 요원들이 미 CIA에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왔다고 하는 부분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UNSCOM 업무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U-2기가 이라크 상공에서 찍은 첩보사진 등 정보를 제공해왔다. CIA는 이를 위해 부서 내에 작전계획세포(Operational Planning Cell, OPC)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나는 ‘모우 돕스’라는 가명을 쓰는 CIA 요원을 비롯해 OPC 소속 CIA 요원들과 여러 해에 걸쳐 접촉하면서 정보를 주고받았다. UNSCOM 단장 롤프 에케우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 나는 그런 사실에 대해 서로 모른 체했다. UNSCOM엔 CIA의 OPC 비밀작전에 관련된 요원만도 9명이나 됐다. 그들은 통신 지원과 병참 지원 업무를 맡았다. 실패로 끝났지만, 1996년 6월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일부 병력이 쿠데타 음모를 꾸밀 때도 이들 CIA 요원이 개입했었다.”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크디르 함자 박사(이라크 핵무기 개발계획 책임자)

    1994년 바그다드를 떠나 망명하기 전 함자 박사는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팀장이었다. MIT 공대를 거쳐 플로리다주립대에서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방으로 망명한 이라크인 중 최고위 과학자다. 현재 미 워싱턴의 과학국제안보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라크는 1980년대 후세인의 명령으로 ‘굉음프로그램(Crash Program)’이란 이름 아래 핵무기 개발을 추진, 걸프전 직전인 1990년 11월 거의 핵무기 제조단계에 이르렀다. 비록 낮은 수준이긴 했지만, 프랑스 연료를 사용해 우라늄을 뽑아내 만드는 핵무기였다. 하지만 핵무기 운반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걸프전 직전 핵무기 제조단계 돌입”

    낮은 기술수준 때문에 핵무기가 너무 커서 미사일에 장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핵무기를 소형화해 미사일에 장착, 이라크 서부 지역 사막에서 핵실험을 할 계획으로 작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걸프전이 터지는 바람에 핵무기 소형화 계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걸프전 뒤 이어진 유엔의 무기사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소유하려는 후세인의 욕망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지는 함자 박사의 증언.

    “1972년 이라크 과학자들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이라크 당국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과학자들은 돈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이라크 혁명평의회 부의장으로 실권자였던 후세인은 우리의 제안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알고 보니 후세인이 몇몇 과학자들을 부추겨 그런 제안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다음해인 1973년 후세인은 이라크 원자력위원장에 취임,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관련 자재들을 사들여오는 일을 감독했다. 그래서 우리는 원자로(reactor)를 지었고, 연료를 재생하고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분리설비를 들여왔다. 핵무기 관련 소규모 연구실들이 잇따라 지어졌다.”

    이라크의 오시라크지역에 세워진 핵무기 개발 관련 시설들은 그러나 1980년 6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모두 파괴됐다.

    “이스라엘 공습이 있고 난 뒤 후세인은 대안을 내놓았다. 지하 연구소에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추진하는 것이었다. 1982년 과학자들은 다시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3년 뒤 나는 당국으로부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 우라늄 제조를 위한 타르미야 MS전자기분리기 하나를 설치하는 데 50억달러가 들었다. 전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100억달러 정도 들었다. 오시라크 핵개발 시설이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뒤 아랍 각국이 보낸 성금도 핵개발 예산에 보태졌다.”

    무기사찰단 속이는 건 쉬운 일

    함자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라크 핵무기 개발에 투입된 인력은 모두 7000명. 이 가운데는 박사학위 또는 석사학위를 지닌 고급 인력이 수백 명이나 됐다.

    “걸프전이 끝나자 우리 부서 인력을 이용한 대규모 복구사업이 시작됐다. 발전소와 제련소도 직접 세웠다. 후세인의 대통령궁 재건에도 우리 인력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총 인력이 1만2000명으로 늘어났다. 1990년대 이라크 핵무기 개발은 후세인 측근이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다. 내가 속한 연구개발부는 전에는 고등교육부 아래에 있었는데, 걸프전 뒤 혁명위원회 소관으로 넘겨졌다. 혁명위원회는 후세인 직할기관이다. 후세인은 우리 부서의 책임자로 특수보안대장(후세인 경호부대장)인 후세인 카멜을 임명했다. 이라크 핵 개발이 후세인의 직할로 넘어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후세인은 그만큼 핵무기를 손에 넣고 싶어했다.

    후세인은 모든 것을 군사적 척도로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가 핵무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일단 그것을 가질 경우 외부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그는 아랍세계의 강자라는 상징성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엔 무기사찰이 문제였다. 우리는 핵무기 개발 관련 시설물들이 자꾸 커짐에 따라 위성 촬영 등에 찍히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UNSCOM 요원들은 그들이 알고 있거나 접근이 허용된 대량파괴무기 시설들을 파괴했다. 이라크 관리들과의 승강이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1995년 후세인의 심복이자 나의 상관인 후세인 카멜이 망명, 후세인의 대량파괴무기 개발 야심을 폭로했다. 무기사찰단은 이에 힘입어 그동안 숨겨져온 관련 시설 일부를 더 찾아냈다. 그때까지 이라크 정부는 핵 관련 프로그램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저 소규모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었다고 발뺌했었다. 내가 보기에 후세인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UNSCOM을 속이려 든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라크는 지금도 핵무기를 만들 능력을 지녔다고 본다. 러시아나 동유럽 국가에서 핵분열 물질을 사들인다면, 2개월이나 6개월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도 있다. 이미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 대량학살 생물무기는 독재자의 기호품”

    프랭크 앤더슨(전 CIA近東지역장)

    앤더슨은 1991∼94년에 미 CIA 근동(近東 : Near East) 지역장을 지냈다. ‘PBS Frontline’ 인터뷰에서 앤더슨은 후세인과의 정보전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라크내에서 쿠데타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했다. 후세인 체제 전복은 무력개입으로만 가능하다는 게 중동지역에서 오랫동안 비밀공작을 펴온 그의 판단이다.

    “CIA 비밀공작은 닭죽 같다”

    “걸프전이 끝나갈 무렵인 1991년 봄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은 후세인 체제가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됐다. 미국의 대(對) 이라크 정책은 정치경제적·군사적으로 충분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후세인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책의 밑바탕엔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들이 담겨 있었으며 후세인을 과소평가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이라크에 가하고 있는 이중의 (정치경제적·군사적) 봉쇄정책은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걸프전 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그를 상자 속에 가둘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여전히 이라크의 최고 실권자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의 권력유지 비결은 무엇일까.

    “독재체제는 국내적으로는 공포정치를 통해 생명력을 유지한다. 한편 독재체제는 일반적으로 이웃 나라들과 공존이나 협력을 기대하기 어렵기에 위협적인 대외정책을 편다. 후세인 체제는 이런 독재체제 규정에 딱 들어맞는다. CIA는 미 행정부가 부딪친 문제들 가운데 풀기 어렵고 처치곤란한 문제들을 은밀하게 다뤄왔다. 걸프전 뒤 이라크를 겨냥한 CIA의 비밀공작은 미 행정부의 이라크 봉쇄정책 중 극히 일부분으로 여겨져 왔다.

    말하자면 닭죽(chicken soup)이랄까, 병을 고치진 못하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낫고 먹어도 별탈 없는 그런 정도였다. 한마디로 후세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려는 어떠한 비밀공작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미 행정부의 정치적 의지가 약했든, 그럴만한 기술이 없어서든, 이렇다할 후세인 제거공작은 없었다.”

    앤더슨은 “후세인을 비밀공작 형태로 몰래 제거한다는 것은 지난날에도 어려운 일이었고 앞으로도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이나 남부 시아파를 후세인 제거에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그는 부정적으로 본다.

    “역사에는 소수가 다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끝에 이긴 영웅적인 얘기들이 있지만, 적을 깨뜨리기 위해선 압도적인 힘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이라크 남부 시아파나 북부 쿠르드족은 양쪽이 손을 잡는다 해도, 외부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 없이는 후세인 체제를 깨뜨리지 못한다.

    해외 망명자들로 구성된 이라크민족의회(INC)도 후세인 체제를 붕괴시킬 힘이 없다. 그렇다고 무용지물은 아니다. INC는 해외에서 후세인을 비판해왔고, 그 존재 자체로 후세인을 짜증나게 만들고 있다. 앞에서 닭죽 얘길 했지만, INC도 그런 존재다. 우리의 전략전술은 여러 측면에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후세인 체제를 어렵게 만들 수단은 여러 가지다.”

    정보요원들에겐 ‘거부된 땅’

    앤더슨은 한때 후세인의 측근에 선을 대 정보를 캐낸 것으로 알려진다. 그게 정말 가능했을까.

    “인간을 상대로 하는 첩보활동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문제가 된다. 미국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 국가의 인물을 상대로 비밀공작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후세인 정권에서 일하는 사람과 손잡고 첩보활동을 하는 것은 특히 어렵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CIA 규정을 어긴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라크를 상대로 일할 때 신뢰는 항상 큰 문제였다.

    이라크 정보기관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걸프전 당시 그들이 보인 대응수준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그러나 반후세인 성향이라 의심되면 누구라도 처단하고 그 가족까지 죽이는 상황에서 반체제운동이 일어나긴 어렵다. 아울러 어느 해외 정보기관도 이라크에 발붙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라크는 CIA 정보요원들 사이에서 ‘거부된 지대(denied area)’라 일컬어져 왔다. 후세인은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활용하고 있다. 포커게임으로 치자면 후세인 앞엔 카드가 수북이 쌓여 있는 셈이다.”

    걸프전 뒤 이라크에 대한 미 CIA의 공작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비판론자들은 1960년대 초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벌였다 실패로 돌아간 피그만 침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미국이 개입했든 안했든, 후세인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쿠데타 시도가 지금껏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후세인 체제의 사악하고 폭력적인 특성 탓이다. 체제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은 끊임없이 반역을 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악하고 폭력적인 체제는 그런 자들을 미리 잡아내고, 내부 단속을 강화한다. 그러니 체제 전복이 어렵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이라크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후세인 체제를 전복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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