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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亞 우주대전

한국, 우주의 ‘천리안’ 개발해 대도약 노린다

  • 글: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

東北亞 우주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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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아리랑 1호로 이라크 戰況 파악
  • ●대포동의 북한 이름은 ‘백두산’, 노동은 ‘화성 5호’
  • ●최적의 우주센터 자리는 제주 모슬포
  • ●다탄두 ICBM 개발능력 보유한 일본
  • ●외나로도와 제주도 사이 어선 통제방안 있는가
  • ●동시에 미사일 발사 준비하면 먼저 불바다 되는 것은 북한
  • ●미국 반대로 아리랑 2호가 중국 우주발사체에 실리지 못한 사연
  • ●KARI, 공군의 협조끌어내고 宇宙法 제정해야
東北亞 우주대전
< 한국의 우주시대를 열어갈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의 우주센터 기공식이 조만간 열릴 예정이다. 외나로도에서는 우주센터 건설에 필요한 토지 매입이 90% 이상 진척된 상태다. 그런데도 기공식이 늦어지는 것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꼭 참석하겠다고 밝혔기 때문. 노대통령은 한·중 정상회담 등 중요한 행사가 많아 아직 우주센터 기공식에 참석할 일정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노대통령이 이 사업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은 한국 우주산업의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다.그러나 한국에게 우주산업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보장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막연히 달려가는 위험과 고통을 동반한 ‘국가적인 벤처 사업’이다. 성공하면 국가적 자부심이 올라가고 돈도 벌겠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는 거듭되는 실패의 고통을 이겨내고 묵묵히 연구해야 한다.외부의 태클과 내부의 갈등도 헤쳐 나가야 한다.후발 산업국인 한국은 중화학공업과 자동차·반도체에 과감하게 투자해 이 분야세계 톱클래스의 국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2020년 이후에는 어떤 분야의 사업이 한국을 먹여 살릴까. 우주산업에서 그 가능성을 찾으며 한국 우주산업의 모든 것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취재를 하는 동안 과학기술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의 관계자로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외국의 로켓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노력하는 ‘전사’와 한국형 미사일인 ‘현무’ 개발에 참여한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이들은 국가적인 비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라 신원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설명문 형식으로 기사를 작성했음을 밝혀둔다.(편집자) >

[제1장|지구촌의 우주 大戰, 50년 늦은 한국]

1957년과 1958년, 1970년과 1970년, 그리고 1998년과 2005년. 무슨 일이 일어난 해일까?

이 연도는 라이벌 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자력으로 위성을 지구궤도에 진입시킨 해이다. 1957년에는 러시아, 1958년에는 미국, 1970년에는 일본과 중국이 각각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 1998년은 북한이 자력으로 위성을 올려놓으려다 실패한 해이고, 한국은 2005년 위성을 쏘아 올리려고 한다.

예전에는 위성이나 유인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것을 모두 ‘로켓’으로 불렀으나 요즘은 ‘우주발사체(Space Launch Vehicle)’라고 부른다. 로켓은 우주발사체의 일부분으로, 1단 로켓·2단 로켓 형태로 구성된다.

우주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강력한 로켓이 필수적인데, 당초 로켓은 미사일을 위해 만들어졌다. 즉 군사용으로 개발된 로켓(미사일)을 우주탐사라고 하는 평화 목적에 사용한 것이 우주발사체인 것이다. 우주발사체와 미사일이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우주산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대역전극 연출한 소련

현대적인 로켓을 탄생시킨 사람은 1931년 19세의 나이로 독일 육군로켓연구소에 들어간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1912~77) 박사. 폰 브라운 박사 팀은 V-2 로켓을 개발했는데, 1944년 9월6일 독일군은 파리를 항해 이 로켓 두 발을 처음으로 발사했다(현대의 미사일은 정밀 유도가 되지만 V-2는 유도가 되지 않아 로켓으로 불린다). 그후 독일군은 2000여 발의 V-2 로켓을 런던 등 연합국의 주요 도시를 향해 퍼부었다.

1945년 5월7일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은 페네뮌데에 있는 독일 육군로켓연구소를 접수해, 폰 브라운을 비롯한 연구진 180명과 함께 거의 모든 장비를 미국으로 가져갔다.

한 발 늦게 페네뮌데에 도착한 소련군은 단 한 명의 연구원과 남은 장비를 가져가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소련은 막상 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에서는 미국을 앞서갔다.

V-2는 액체연료를 쓰는 로켓인데, 소련의 코롤레프 박사는 이 기술을 개량해 R-7이라는 우주발사체를 개발했다. 1957년 10월4일 R-7 우주발사체는 무게 83.6㎏, 직경 58㎝의 스푸트니크 1호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소련이 위성을 쏘아 올리자 그때까지 ‘소련을 단순한 농업국가’로 여기며 애써 무시해오던 미국의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소련은 미국보다 4년 늦은 1949년 원자폭탄을 개발한 바 있는데, 적잖은 미국인들은 스푸트니크 충격으로 ‘소련의 위성이 미국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에 빠져들었다(위성은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 없다).

당시 미국에서는 육군과 해군이 독자적으로 우주발사체를 개발하고 있었다. 육군팀은 폰 브라운 등 독일에서 온 학자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었고, 해군팀은 미국 학자가 주축이었다. ‘국가 체면’을 의식한 미국 정부는 뱅가드(Vanguard : 선구자)라는 우주발사체를 개발해온 해군에게 위성을 쏘아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스푸트니크 성공 두 달 후쯤인 1957년 12월6일, 미 해군은 위성을 탑재한 뱅가드를 발사했으나 뱅가드는 지상 1.5m를 올라가다 발사대와 함께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폰 브라운 박사를 중심으로 한 육군팀이 대타로 나서게 되었다. 육군은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 넉 달 후쯤인 1958년 1월31일 익스플로러로 명명한 위성을 탑재한 주피터-C 우주발사체 발사에 성공했다.

익스플로러는 스푸트니크 1호보다 훨씬 높은 고도 370~2580㎞ 타원 궤도를 돌았다. 한편 체면을 구긴 미 해군은 1958년 3월17일 뱅가드 우주발사체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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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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