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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계획도시를 가다 ⑤|러시아 아카뎀고로도크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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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카지노가 들어선 주거단지의 청소년 문화궁전 ‘유노스치’. 아카뎀고로도크가 처한 현실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러면서 카말료바씨는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길어졌지만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인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좀 이상하다. 아카뎀고로도크는 연구소 직원들만 사는 게 아니었던가.

“소비에트 시절에는 그랬죠. 그때는 정부로부터 거주허가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아요. 좋은 거주환경을 찾아 이사 온 외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예요. 연구단지의 숲속 아파트는 가격이 비싸서 연구원들이 살기에는 조금 부담스럽죠. 직원들은 대개 거주단지에 살아요.”

알록달록 페인트 칠한 놀이터도 거주자들이 조금씩 돈을 거둬 마련한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재정사정이 나빠지면서 지방정부나 연구소 모두 큰길 주변에나 신경을 쓸 뿐, 작은 골목까지는 손길이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고급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돈을 부담해 주변환경을 손본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공공영역의 서비스가 약화되어 관리가 허술해진 골목과 생활공간을, 돈 많은 주민들이 대신해서 관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주차장에 늘어선 일제 승용차들 역시 아카뎀고로도크에서 일하는 사람들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의 차인 경우가 많다는 설명. 왠지 더없이 마음에 들었던 도시의 첫 이미지가 조금씩 바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문화궁전에 들어선 카지노



2km 남짓 떨어져 있는 연구단지와 거주단지는 각기 전혀 다른 느낌의 두 길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작나무와 전나무 사이로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숲길이다. 거주단지에서 연구단지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어느 쪽 길로 갈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생태적인 주거환경을 위한 도시 설계자들의 작은 배려다.

시베리아 중흥 노린 ‘과학 러시아’ 전초기지

한적한 연구단지의 아파트 거리

이번에는 거주단지를 살펴보기로 마음먹는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노보시비르스크국립대학교(이하 NGU) 본부건물 앞에서 버스에 올랐다. 이 도시에는 러시아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전차(電車)를 찾을 수 없다. 버스 차장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시베리아에서는 전기가 석유보다 비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돌아온다. 인근에 엄청난 석유가 매장돼 있는 톰스크가 있다는 자랑이 이어진다.

그 때문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시내버스노선과 발달된 택시제도가 대중교통의 전부다. 걷기를 즐기는 이 도시 사람들은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꽤 긴 출퇴근길을 걸어다니기도 한다. 차창 밖으로 자전거에 몸을 실은 젊은이들도 눈에 띈다. 도시 전체에 경사가 거의 없다 보니 자전거는 매우 훌륭한 교통수단이다.

거주단지의 입구인 ‘문화궁전 유노스치(청년)’에 다다른다. 10대 학생들이 각종 스포츠와 레저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카뎀고로도크 건설 당시 극장과 체육관, 수영장 등을 모아 만든 시설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카지노 간판.

2년 전에 들어섰다는 ‘777’ 카지노 입구에는 한눈에도 힘깨나 쓰게 생긴 건장한 남자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다른 쪽 입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정부지원이 줄어든 후 문화궁전을 운영할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임대해주었다”고 말한다. 역시나 돈이 문제였다.

문화궁전을 지나 거주단지의 외곽인 게로야 투르다 거리로 향했다. 아니나다를까, 외곽지역의 분위기는 잘 가꾸어진 연구단지의 고급 아파트들과는 사뭇 달랐다. 여기저기 움푹 팬 도로에는 며칠 전 내린 빗물이 아직까지 남아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흐루시초프 서기장 시절 한 동(棟) 짓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는 조립식 아파트들은 세월이 흘러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거주단지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이바노프 거리에 이르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 보였다. 인도는 잡풀이 무성해 통행이 불편할 정도였고, 곳곳에 만들어진 놀이터는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나 다름없었다. 잡초에 뒤덮인 놀이기구는 시커멓게 녹이 슬어 있었다.

도시 설계자들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구역마다 하나씩 마련해놓은 운동장이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씩 나타나는 이 운동장에도 잡초가 무성하기는 마찬가지. 야간경기를 위해 만든 높은 조명탑과 축구골대 또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행정책임을 맡고 있는 시 정부는 거주단지까지 신경을 쓸 능력이 없고, 연구단지의 부유한 외지인들과는 달리 거주단지 주민들은 나서서 동네를 관리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의사 벤야민 시콜로프(52)씨의 이야기였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공공의 것’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강했죠. 거꾸로 소련이 붕괴된 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것’에만 집착하게 됐다고 할까요. 돈이 생겨도 자기 집에만 신경 쓸 뿐이지, 동네나 거리, 하다못해 아파트 계단같이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간’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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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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